20세기 이야기

영친왕, 日 황족 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

↑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 당일 모습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이 나이 많은 형(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제가 된 것은 생모인 엄비 덕분

고종에게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3남 1녀였다. 아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9) 3명이고 딸은 덕혜옹주(1912~1989)가 유일했다. 순종은 명성황후, 의친왕은 상궁 덕수 장씨, 영친왕은 후궁 순빈 엄씨, 덕혜옹주는 궁녀 양귀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 4명은 이복남매들이다.

조선조의 적통인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1907년 즉위할 때 이은이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20살이나 나이가 많은 의친왕 이강을 제치고 이은이 황태제가 된 것은 명성황후가 죽고 없는 상황에서 이은의 생모인 엄비가 최고 서열인 데다 눈치가 빠르고 처신에 능했기 때문이다. 이강의 생모 장상궁은 이미 죽고 없었다.

엄비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2년 후 이은을 낳아 명성황후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지 않았다. 반면 장 상궁은 명성황후가 살아 있을 때 순종보다 불과 세 살 어린 이강을 낳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긴 명성황후에게서 모진 박해를 받았다. 장 상궁은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겨나 10여 년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강은 명성황후 사후에도 이은을 낳은 엄비의 눈총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고독한 젊은 날을 보냈다.

이은은 1900년 영친왕에 봉해지고 1907년 순종의 즉위에 맞춰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강요로 10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보내졌다. 고종은 영친왕의 일본행을 반대했으나 이토는 ‘태제에게 신문물을 접하게 하고 신식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본 유학을 강행했다. 물론 일제의 목적은 식민지의 태제를 볼모로 끌고 가 억류하는 한편 일본의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일본의 문명·문화·풍습 등에 젖게 하는 것, 즉 조선 태제의 일본인화였다.

 

영친왕-이방자 강제 결혼은 잡혼을 통한 내선 융합 정책의 일환

영친왕이 일본에 있던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이왕가’에 명목상으로 일본 황족의 일원이라는 특별 자격을 부여했다. 고종 황제에게는 ‘덕수궁 이태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순종은 폐위해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했다. 영친왕 역시 황태제에서 ‘왕세제 영친왕’으로 격하한 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일본 황족학교인 가쿠슈인과 일본 육사에서 교육해 1917년 육군 소위로 임관시켰다.

다음 단계는 일본인 여성을 영친왕의 배우자로 삼아 양국 간 잡혼을 통한 내선 융합 정책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가 영친왕의 배필로 선택한 인물은 나시모토 마사코, 즉 이방자(1901~1989)였다. 이은보다 4살 아래인 이방자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 노미야의 장녀로 태어나 가쿠슈인 초·중등과를 졸업하고 장차 천황이 될 히로히토의 배우자 후보로까지 올랐다가 간택되지 못하고 1916년 8월 영친왕의 배필로 정해졌다.

이은과 이방자가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1916년 8월 3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에 실렸다. 육사 생도이던 이은은 휴가지 별장에서 신문 보도를 통해 자신의 약혼 사실을 알았다. 이방자도 자서전에서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전하와 약혼하게 되다니!”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이방자는 그때부터 머리를 조선식으로 가르마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문제는 천황과 천황 일족을 법률적으로 규정하는 ‘황실 전범’이었다. ‘황실 전범’에 따르면 황실 딸의 결혼 상대는 황족이나 그 아래 계급인 화족의 남성에게만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영친왕은 명목상으로만 황족이었을 뿐 실제로는 화족 아래의 왕공족에 속했다. 따라서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면 ‘황실 전범’을 개정해야 했다. 결국 일본은 단 한 건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황족의 딸이라도 왕공족의 남성과 결혼할 수 있도록 1918년 11월 ‘황실 전범’을 개정했다.

 

영친왕의 결혼 발표에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꾸짖은 독립신문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 도쿄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식을 거행하기 4일 전인 1월 21일 고종이 급사해 1920년 4월 28일로 연기되었다. 하지만 결혼을 반대하는 저항이 적지 않았다. 편지가 일본으로 수없이 날아들고 당시 메이지대 학생 서상한이 결혼식을 저지하기 위해 식장에 수제 폭탄을 가지고 들어가려던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은을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꾸짖는가 하면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이 발행하던 잡지 ‘자유대한’에도 비판 기사가 실렸다. 혼례 당일에는 비록 불발로 그쳤지만 식장에 도착한 이방자의 마차에 누군가 소형 폭탄을 던지는 사고도 있었다.

영친왕이 이렇게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907년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어 11년째 결혼할 날만을 기다리던 민갑완(1897~1968)이라는 여인이었다. 민갑완은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영국·미국·벨기에 공사로 일했던 구한말 외교관 민영돈의 딸이었다. 민갑완과 영친왕은 생년월일이 1897년 10월 20일로 같았다.

일제는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이 확정되자 1918년 벽두에 민갑완에게서 혼약의 징표인 금반지를 회수하고 일방적으로 파혼시켰다. 민갑완의 부친에게는 “신의 여식을 금년 내로 타문에 출가시키지 않으면 부녀가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것을 맹세한다는 서약서를 강제로 받아냈다. 결국 민영돈은 1919년 1월 속절없이 죽었다. 당시만 해도 황태제의 약혼자였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신분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에 민갑완에게는 파혼 후에도 고관 집안에서 결혼을 희망하는 요청이 많았다. 그중에는 박영효의 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의 청혼도 사양하고 홀로 살았다.

일제가 계속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강요하자 1923년 남동생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해 살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동생 부부와 함께 귀국했다. 이후 서울에 거처를 구했다가 1950년 6·25 후 부산에 정착해 동생 부부와 살다가 1968년 일생을 마쳤다.

영친왕의 정략결혼은 1920년 3월 창간 직후의 조선일보에도 불똥이 튀었다. 결혼식 당일 조선일보는 영친왕의 결혼 소식과 함께 민 씨의 강제 파혼 전말을 소개했는데 이 기사가 조선총독부 눈에 거슬려 압수된 것이다. 창간 50여 일 만에 이뤄진, 일제 치하 조선일보 최초의 압수 기사였다.

 

일본 천황가의 배려와 도움으로 최고 지위 유지하며 살아

이방자는 불임 여성이라는 소문과 달리 결혼 이듬해 아들 진을 낳았으나 1922년 4월 조선을 방문했을 때 잃었다. 생후 9개월 만에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숨지자 독살설도 흘러나왔다. 이방자는 1923년 한 차례 유산했다가 1931년에야 둘째 아들 구(玖)를 얻었다.

영친왕은 1926년 순종의 승하 후 형식상으로 왕위를 계승해 이왕으로 불렸다. 일본의 반대로 귀국하지는 못했으나 일본 천황가의 배려와 도움으로 일본에서 최고 지위를 유지하며 살았다. 감시를 받아야 하는 허울 좋은 황족의 신분이긴 했으나 생활은 풍족했다. 군 계급도 계속 높아져 근위보병 제2여단장(1939), 제51사단장(1941)을 거쳐 1943년에는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에까지 올랐다.

일제의 패망 후 영친왕은 조선의 왕 자리를 당연히 자기 몫으로 생각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방자 여사는 조선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귀국을 망설였다. 영친왕의 복벽(퇴위한 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것)과 이복형 의친왕의 옹립을 둘러싼 음모와 알력도 발목을 잡았다. 더욱이 연합군 총사령부가 일본 황족의 모든 경제적 특권을 박탈해 황족에 속했던 영친왕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당시 영친왕은 도쿄 저택, 4곳의 별장, 목장을 갖고 있었으나 ‘커튼을 뜯어 블라우스를 만들 정도’로 생활고를 겪어 부동산을 팔아야 했다. 특히 대지 2만 평에 건평이 500평이나 되는 도쿄 저택은 요지 중의 요지였다. 일본 정부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저택을 팔라고 했으나 영친왕은 주일 한국대표부의 구매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돈을 마련하지 못해 거래가 무산되면서 도쿄 저택은 당시 중의원 의장이자 일본 세이부 그룹 회장에 팔렸다. 시가는 1억 수천만 엔이나 되었으나 사기꾼의 농간으로 4,000만 엔만 손에 쥐었다.

1947년 5월에는 공식적으로 일본 황족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일본 국적도 상실했다. 1950년 2월 영친왕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에 온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귀국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할 때라 영친왕은 종친인 이승만 대통령이 왕인 자신에게 상당한 예를 다할 것이고 어떤 형식이든 본국 귀환에 대해 언질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우리 국민도 영친왕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서 들은 얘기는 “귀국하고 싶으면 돌아오라”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낙담한 영친왕은 귀국을 단념했다.

 

고국에서 7년여 병상에 있다가 1970년 5월 한 많은 생 마쳐

1956년에는 6년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아들의 MIT대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여권이 문제가 되었다. 주일 한국대표부가 이승만 대통령을 의식해 한국인 자격의 여권 발급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영친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본 정부에 여권 발급을 요청했다. 이것은 조선의 왕손이 정식으로 일본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영친왕은 일본인 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실망한 국민들은 그에게서 동정심을 거두었다. 영친왕은 1959년 뇌혈전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1960년 4월 이 대통령이 하야한 뒤 귀국을 바라는 편지들이 국내에서 답지했으나 영친왕과 이방자는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귀국을 보류하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한국 대표부로부터 “박정희 의장이 용태를 걱정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오자 용기를 내 1963년 11월 22일 조상이 묻혀 있는 대한민국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병이 깊어져 활동하지는 못하고 7년여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70년 5월 1일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영친왕 사후 이방자는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홀로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며 장애자 봉사 활동에 전념하다가 1989년 4월 30일 88세로 병사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옆 영원(英圓)에 묻혔다. 낙선재에서 함께 지내던 덕혜옹주가 숨진 지 9일 만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 쇼와(昭和)가 끝나고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헤이세이(平成)가 시작된 해였다.

1931년 도쿄 저택에서 태어난 영친왕의 유일한 핏줄 이구는 195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6년 MIT공대를 졸업하고 뉴욕의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8살 많은 직장동료 독일계 미국 여성 줄리아 리를 만나 1958년 결혼했다. 부부는 1963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함께 귀국해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 짐을 풀었다. 재주 많고 정이 많은 성품의 줄리아였지만 낯선 궁궐 생활과 종친들의 외면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할 수 없었던 종친회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구 선생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이구는 경영하던 사업체가 부도나자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 부부는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줄리아 리는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줄리아는 이혼 후에도 한국에 머무르다가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

이구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다가 과거 아버지의 도쿄 저택 자리에 지어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2005년 7월 16일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한국의 창덕궁에서 치러지고 시신은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 묘역 회인원에 안장되었다. 당시 줄리아 리는 마침 한국에 잠시 머물고 있었지만, 장례식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이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적통도 끊겼다. 그러자 이구의 사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의친왕의 9남인 이충길의 아들 이원을 이구의 양자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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