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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⑮] 영친왕과 두 여인… 한국인 약혼자 민갑완은 기구한 운명으로 빠져들었고 일본인 배우자 이방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겼다

↑고종 황제 일가.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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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구한말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의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두 여인과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1897~1970)이고 두 여인은 영친왕의 한국인 약혼녀 민갑완(1897~1968) 규수와 영친왕의 황태자비가 된 일본인 이방자(1901~1989) 여사다.

 

■영친왕 가계

영친왕의 이름은 이은이다. 1897년 10월 20일(음력 9월 25일)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비 사이에서 태어나 10살에 영친왕으로 봉해졌다. 고종에게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3남 1녀였다. 아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 이강(1877~1955), 영친왕 이은(1897~1979) 3명이고 딸은 덕혜옹주(1912~1989)가 유일했다. 순종은 정실인 명성황후, 의친왕은 귀인장씨, 영친왕은 후궁 순빈엄씨, 덕혜옹주는 귀인양씨에게서 태어났다. 순종과 의친왕은 영친왕보다 각각 23살, 20살이 많고 여동생 덕혜옹주는 15년 아래다.

1901년 이전 촬영한 고종과 순종과 영친왕 이은(왼쪽 두루마기 차림).

 

고종은 1882년과 1893년 순종과 의친왕을 각각 혼인시키고 1907년 3월 10살인 영친왕의 배필을 간택했다. 그런데 고종이 1907년 6월 일어난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은 일제의 강제로 그해 7월 19일 아들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바람에 아들 영친왕의 혼인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영친왕은 자손이 없는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제로 8월 7일 책봉되었다. 황자 서열로는 영친왕 이은보다 20살이나 나이가 많은 의친왕 이강이 순종의 다음 서열인데도 영친왕이 황태제로 책봉된 것은 명성황후와 의친왕의 생모 장상궁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이은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엄비)가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순종과 의친왕의 나이가 3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것도 작용했다.

■민갑완 간택

1907년 영친왕의 배필로 간택된 여성은 영친왕과 생년월일(1897년 10월 20일)이 같은 서울 출생의 민갑완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민석호는 이완용의 외사촌 형이었고 아버지 민영돈은 명성황후의 먼 조카뻘이었다. 민갑완의 배다른 두 언니 중, 둘째 언니는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비의 큰아버지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의 맏며느리였다. 민갑완이 태자비로 간택된 데에는 이러한 집안 배경이 작용했다. 민갑완에게는 두 남동생이 있었는데 민천식과 민억식은 각각 민갑완보다 9살, 12살 아래였다. 특히 민천식은 누나 민갑완을 평생동안 극진과 희생으로 모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민갑완의 삶은 민갑완의 회고록 ‘백년한(百年恨)’에 근거한 것이다.

민갑완이 초간택을 위해 대궐로 들어간 것은 10살 때이던 1907년 2월이었다. 민갑완은 왕가에서 진행하는 구술시험을 치렀다. 가문의 내력, 어른들의 생신일과 연세, 제삿날까지 물었을 때 민갑완은 흐트러짐없이 대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초간택을 통과했는데  민갑완은 간택일을 회고록에서 1907년 3월 14일로 기억했으나 조선왕조 고종실록은 1907년 3월 12일자에 ‘영친왕 부인의 초간택이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날 확정된 간택 대상자 7인의 명단에도 민갑완 이름은 없다.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최종 간택되었는지는 실록에 나와있지 않으나 어쨌든 민갑완이 최종 간택되어 민갑완 집안은 혼례일이 정해져 내려올 날만 기다렸다.

 

■영친왕 일본 강제 유학

그런데 간택이 있고 9개월 뒤인 1907년 12월 영친왕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연히 고종과 생모 엄비가 10살 밖에 안된 영친왕을 인질로 잡아가는 것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영친왕의 스승으로 임명된 이토 히로부미는 “황태제에게 신문물을 접하게 하고 신식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며 일본 유학을 강행했다. 물론 일제의 진짜 목적은 영친왕을 볼모로 끌고 가 일본의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일본의 문명·문화·풍습 등에 젖게 하는 즉 영친왕의 일본인화였다. 다만 영친왕에 대한 메이지 일본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과 대접은 각별했다.

일본으로 가기 전 영친왕과 이토 히로부미(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보내진 후 엄비는 아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1911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은 엄귀비가 죽어서야 귀국했으나 사인이 열병(장티푸스)이어서 엄귀비의 처소인 덕수궁 함녕전 부근에 다가가지 못했다. 고종은 영친왕이 일본으로 끌려갔어도 민갑완과의 혼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민갑완 집에 상궁을 보내 “시국이 시끄러워 예식을 행할 순 없지만 예물을 전달하니 이해하고 받아주길 바란다”며 혼인의 징표로 금지환(金指環) 즉 금가락지를 전달했다. 이를테면 약혼반지를 건넨 것이다.

그러나 혼례는 치러지지 않은 채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되었다. 일제는 메이지 천황의 명에 따라 ‘이왕가’에 명목상으로 일본 황족의 일원이라는 특별 자격을 부여했다. 고종 황제에게는 ‘덕수궁 이태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순종은 폐위해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했다. 영친왕 역시 황태제에서 ‘왕세제 영친왕’으로 격하한 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일제는 영친왕을 일본 황족학교인 학습원과 일본 육사에 보내 교육하고 1917년 육군 소위로 임관시켰다.

 

■민갑완 파혼

민갑완은 영친왕의 귀국과 혼례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간택된 몸이어서 궁중법도에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수도 없었다. 1911년 엄비가 죽어 영친왕이 조선에 왔을 때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1916년 8월 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친왕이 일본 황족의 공주와 약혼했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민갑완 집안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1918년 1월 상궁들이 민갑완의 집에 들이닥치더니 10년 전 황실에서 보낸 금가락지를 돌려달라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시 얼마 후에는 영친왕이 일본 황족과 결혼할 예정이므로 그 전에 민갑완을 다른 집안으로 출가시키겠다는 확답을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막무가내로 요구했다.

민갑완의 부모는 “남이야 누구한테 시집을 가든 무슨 상관이냐” “금가락지도 기념으로 갖고 있겠다”며 따지고 버텼으나 총독부의 회유와 협박에 어쩌지 못하고 결국에는 금가락지 등 신물을 왕실로 돌려주고 ‘갑완을 금년(1918년) 내 다른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으면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각서까지 써주었다. 이 충격의 여파로 1918년 5월 할머니가 작고하고 아버지마저 1919년 1월 초 세상을 떠나 줄초상을 치렀다. 당시만 해도 황태제의 약혼자였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신분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에 민갑완에게는 파혼 후에도 고관 집안에서 결혼을 희망하는 요청이 많았다. 그러나 민갑완은 누구의 청혼도 거절하고 홀로 살았다.

젊었을 때 민갑완 모습

 

■영친왕-이방자 결혼

영친왕의 결혼 상대는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1901~1989)였다. 한국에서는 이방자로 불렸던 그녀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 노미야의 장녀로 태어나 학습원 초·중등과를 졸업하고 장차 천황이 될 히로히토의 배우자 후보로까지 올랐으나 간택되지 못하고 1916년 8월 천황의 명에 따라 영친왕의 배필로 정해졌다. 일제의 목적은 일본인 여성을 영친왕의 배우자로 삼아 양국 간 잡혼을 통한 내선융합 정책을 관철하려는데 있었다.

왼쪽은 이방자(7살)와 어머니, 여동생 사진이고 오른쪽은 이방자의 12살 때 모습이다.

 

영친왕과 이방자가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1916년 8월 3일자 일본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육사 생도이던 영친왕은 휴가지 별장에서 신문 보도를 통해 자신의 약혼 사실을 알 정도로 혼인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결혼은 1919년 1월 24일 일본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3일 전인 21일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1년 3개월 뒤인 1920년 4월 28일로 연기되었다. 도쿄 영친왕저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일본 황족, 조선의 종친, 데라우치 조선총독 등이 대거 참석했다. 순종은 서울에서도 조선식으로 결혼식을 하길 원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물론 결혼을 반대하는 비판과 저항이 적지 않았다. 결혼 반대 편지가 일본으로 수없이 날아들고 당시 메이지대 학생 서상한은 결혼식을 저지하기 위해 식장에 수제 폭탄을 가지고 들어가려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체포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영친왕 이은을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꾸짖었다. 4월 28일자 국내 신문은 영친왕의 결혼 사실을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하면서 그 아래에 민갑완의 근황을 다뤘다. ‘세자 전하와 혼의(婚議)가 있었던 상중(喪中)의 민규수’(동아일보)와 ‘어혼약(御婚約) 있었던 민낭자, 지금부터의 각오’(조선일보)였는데 특히 조선일보는 이 기사 때문에 창간되자마자 50여일만에 신문이 압수되는 수난을 겪었다.

영친왕-이방자의 결혼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1920년 4월 28일자)

 

▲결혼 성사 과정

이방자가 천왕의 명에 의해 영친왕과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통설과 달리 이방자 어머니가 적극 추진해서 결혼이 이뤄졌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하 조선 왕·공족을 다룬 책 ‘천황의 조선병합’(호세이대 출판국, 2011년)는 배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일본 ‘황실전범(皇室典範)’에 의하면, 황족은 황족하고만 결혼할 수 있었는데, 다른 황족 가문에서 딸의 배필감을 찾지 못한 이방자 어머니가 황족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던 이은에게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친왕은 명목상으로만 황족이었을 뿐 실제로는 왕공족이어서 황실전범에 따라 결혼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방자 어머니는 데라우치 조선 총독에게 중매를 요청했고 일본 정부는 자기들이 주장하던 ‘일선융합’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했다. 결국 일본은 단 한 건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황족의 딸이라도 왕공족의 남성과 결혼할 수 있도록 1918년 11월 ‘황실 전범’을 개정했다.

고종은 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양론이 있다. 순종의 상궁 김명길은 수기 ‘낙선재 주변’에서 “고종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영친왕의 가례 결정 소식을 듣고는 ‘수국(讐國·원수의 나라)의 황족 여자를 어찌 자부(子婦)로 삼겠느냐. 짐이 생존해 있는 한 이 혼사는 성립될 수 없다’고 강력한 반대를 보이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대한 고종의 순응적인 태도에 비춰보면 신빙성이 적다.

반면 구한말부터 15년간 대한제국 궁내부와 이왕직(일제시대에 이씨 왕실에 대한 사무를 담당하던 기관)에서 일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에 의하면, 이왕직 차관으로부터 두 사람의 혼사에 대한 얘기를 들은 고종은 “이는 이조 500년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기반”이라며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이방자 어머니도 자신의 일기에 “조선의 이태왕 전하는 매우 기뻐했는데… 고종은 영친왕이 일본에서 공부하며 성장했고 일본 황족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궁정도 평온하게 될 것이라고 안심했다고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영친왕 이방자 결혼 (1920년 4월 28일)

 

■민갑완 중국 상해로 망명

민갑완은 영친왕이 결혼을 하고 2개월 뒤인 1920년 6월 외삼촌을 따라 남동생(민천식)과 함께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총독부의 감시 때문에 더 이상 조선에 있을 수 없어 감행한 망명이었다. 민갑완이 상해로 떠난 후 일본 형사들이 민갑완 집에 뻔질나게 찾아가 딸을 불러들이라고 협박과 공갈을 일삼았다. 일본의 간섭은 민갑완이 임시정부 요인 김규식의 도움을 받아 적을 둔 중국 상해의 미국인 학교에까지 미쳤다. 일본 영사관 직원이 학교를 찾아가 교장을 성가시게 하자 교장이 민갑완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도록 해 결국 민갑완은 학교를 중도에 포기했다.

민갑완의 중국 상해시절 모습. 민갑완(중앙) 오른쪽이 동생 민천식이고 왼쪽이 올케 윤정순이다. 앞 어린이는 조카 병순이다.

 

그럼에도 민갑완의 상해 생활은 전반적으로 평온했다. 혼담이 몇 차례 들어왔으나 모두 거절했다. 영친왕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안타까운 것은 고국에 살고 있는 가족이 세상을 떠났어도 찾아가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홀로 슬픔을 삼켜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1928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제대 예과에 다니던 둘째동생 민억식은 1936년 고국에서 세상을 떴다. 상해에서 민갑완을 돌보아 주던 외삼촌도 1935년 급서했다. 특히 외삼촌 이기현이 숨졌을 때 절통함이 극에 달했다. 외삼촌은 민갑완 남매에게는 상해 망명 생활을 지탱해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김규식을 통해 민갑완 남매를 상해의 미국 학교에 보내 신식교육을 시킨 것도 외삼촌이었다. 이기현의 손자 중 알려진 인물이 이현재 전 경제부총리다. 민갑완은 이후 상해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48세이던 1945년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다.

 

■영친왕의 풍족한 일본 생활

영친왕 부부는 1921년 8월 첫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8개월 후인 1922년 4월 뒤늦게 결혼 인사차 한 살된 아들을 데리고 서울을 방문했다. 그런데 5월 11일 갑자기 아들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 부부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아들 시신은 청량리에 소재한 엄귀비 묘소 영휘원에 딸린 봉우리를 숭인원으로 이름 짓고 그곳에 묻었다. 이방자는 1923년 한 차례 유산했다가 1931년에야 둘째 아들 구를 얻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영친왕은 4년만에 다시 귀국해 조선조 제28대 왕통을 계승했다. 영친왕은 왕세자에서 이왕 전하로, 이방자는 왕세자비에서 이왕비 전하로 승격했다.

부부는 1927년 5월 유럽으로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상해를 거쳐 유럽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상해 임시정부가 영친왕을 상해에서 납치·설득해 독립운동으로 이끈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납치 계획은 누군가의 밀고로 무산되었고 부부는 상해를 거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영친왕은 홍콩과 싱가포르를 거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의 10여개국을 돌아보고 1년 뒤인 1928년 4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영친왕은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군 고위 간부로 진급을 거듭했다. 감시를 받아야 하는 허울 좋은 황족의 신분이긴 했으나 황족 예우를 받아 생활은 풍족했다. 메이지 천황이 영친왕에게 일본의 왕족들만 사는 도쿄 중심지에 그것도 2만평 대지 위에 영국식으로 멋지게 지은 대저택(1930년 건축)을 제공하고 생활비도 풍족하게 내준 덕에 일본 왕족들보다 오히려 더 호화스럽고 여유있는 생활을 했다.

영친왕의 도쿄 대저택 모습. 지금은 아카사카 호텔의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군인으로 승승장구해 연대장과 사단장을 거쳐 1940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8월에는 제51사단 병력을 이끌고 중국 금주( 錦州) 전선에 투입되었다. 영친왕은 어느날 하얼빈 역두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현장이 궁금했다. 이토는 과거 조선 침략의 제1인자이자 영친왕을 직접 일본으로 데려간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영친왕은 평소 이토를 고맙게 생각해왔다. 인간적인 애정으로 늘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영친왕은 이토의 조난비 앞에서 조의를 표했다. 영친왕은 태평양전쟁 발발 후인 1943년 본토의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일제 말기, 한 행사장에 참석한 영친왕과 아들 이구, 이방자 여사

 

■해방 후 영친왕

▲‘신적강하(臣籍降下)’ 조치로 생활고 시달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다. 영친왕과 일본의 관계는 자동적으로 단절되었다. 영친왕은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었다. 일제의 패망 후 영친왕은 조선의 왕 자리를 자기 몫으로 생각하고 귀국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방자 여사는 조선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귀국을 망설였다. 영친왕의 복벽(퇴위한 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것)과 이복형 의친왕의 옹립을 둘러싼 음모와 알력도 발목을 잡았다.

그 무렵 일본에 살고 있는 다른 이씨 왕족의 생활도 비극적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덕혜옹주는 1946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작은조카 이우(의친왕 아들)는 히로시마 소재 서부군관구사령부의 고급참모(육군 중좌)로 근무하다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맞고 34살에 숨졌다. 장인은 전쟁범죄자로 몰려 감옥에 들어갔다.

왼쪽은 어린시절의 덕혜옹주이고 오른쪽은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의 모습이다.

 

더욱이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총사령부가 1947년 10월 일본 황족들 가운데 히로히토 천황의 직계 3개 집안만을 황족으로 인정하고 방계 황족들은 평민으로 내려앉히는 ‘신적강하(臣籍降下)’ 조치를 단행하면서 일본 황족의 모든 경제적 특권을 박탈하고 가혹한 재산세를 부과함에 따라 황족에 준했던 영친왕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영친왕 부부는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저택을 참의원 의장의 공관으로 빌려주고, 하인들이 살던 방으로 물러앉았다. 사실 이것은 당시 사토 참의원 의장이 이은을 돕기 위해 필요도 없는 공관을 빌린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의 초청으로 1950년 2월 일본을 방문했다. 귀국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할 때라 영친왕은 종친(전주이씨)인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형식이든 본국 귀환에 대해 언질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우리 국민도 영친왕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들은 얘기는 호의도 온정도 없는 “귀국하고 싶으면 돌아오라”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낙담한 영친왕은 귀국을 단념하고 일본에서 여생을 보낼 결심을 했다.

 

▲아들 졸업식 참석위해 한국 국적 포기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영친왕의 일본 국적은 자동 상실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그동안 징발로 사용해오던 일본인 건물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도쿄에 있는 각국 대표부에 대해서도 즉시 다른 곳에 집을 구해 나갈 것을 통고했다. 대한민국 주일대표부도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도쿄 저택도 국유이므로 반환받아 대표부로 쓰라고 지시했다. 사실 당시 일본 정부의 견해나 연합군최고사령부 방침이 이른바 속지주의여서 도쿄 저택은 국유 몰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대표부는 덮어놓고 저택을 반환하라고 독촉하고 성화를 댔다. 이에 영친왕이 “재산이라곤 이 집밖에 없고 해방 후 5~6년 동안 수입 없이 살고 있으니 시세보다 싸게 사가라”고 해 한국 정부에서 40만 달러에 매입하되 20만 달러는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지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에서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아 매매는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친왕은 하루가 급했다. 경제는 어렵고 세금도 크게 불어나 자칫 차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당시 영친왕의 저택은 도쿄에서도 달걀노른자 땅에 있었다. 대지가 무려 2만평에 호화스러운 영국식 3층 건물로 건평이 500평이나 되었다. 결국 영친왕 저택은 당시 중의원 의장이자 세이부 그룹 회장에게 팔렸다. 소문으로는 최소 1억 수천만엔을 받을 수 있었으나 중재인의 농간으로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집을 팔아 빚을 갚고 500만엔짜리 집을 샀다.

1956년 영친왕은 아들의 MIT대 졸업식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주일 한국대표부에 여권을 신청했으나 서울 경무대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영친왕은 결국 일본 궁내청으로 가서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을 받았다는 것은 조선의 왕손이 정식으로 일본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들의 MIT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후 미국에서 잠시 생활한 영친왕 부부와 아들 이구

 

영친왕은 미국에 다녀온 뒤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영친왕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국적을 얻은 후 그대로 한국에 눌러앉으면 일본 국적은 자연히 소멸되는 제도를 활용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에 대해 한국 정부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지만 이방자의 친정에서도 반대했다. 6·25전쟁 후 분단국가에서 또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대로 일본에서 살면 될 것을 왜 위험한 한국으로 돌아가냐는 것이다.

 

▲귀국과 별세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귀국을 바라는 편지들이 국내에서 답지했으나 영친왕과 이방자는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귀국을 보류하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던 중 새로 등장한 민주당 정부의 장면 총리가 영친왕에게 속히 환국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친왕은 그 무렵 고혈압으로 인한 뇌혈전증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의 몸이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조차 하지 못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의장도 나섰다. “영친왕이 일본에서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길거리에서 눈을 감으면 민족 전체의 수치”라고 주일대표부에 연락해서 “도쿄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 입원시키고 비용은 전액 정부에서 지급하라”고 지시하고는 특사를 도쿄로 보냈다.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 12일 미국 방문 길에 잠시 도쿄에 들렀을 때 바쁜 와중에도 이방자를 만나 “하루속히 국적을 한국으로 환원하라”며 “병환에 차도가 있으면 조국에서 편안히 지내시라”는 뜻을 전했다.

이에따라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40년만에 귀국하고 이방자도 영친왕의 조국 방문을 구체화하기 위해 6월 14일 20년만에 내한했다. 마침내 영친왕 부부가 귀국한 것은 1963년 11월 22일이었다. 영친왕은 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이런 영친왕에 대해 당시 국내에 있던 민갑완은 동정과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민갑완은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간의 기대를 갖고 집수리를 하는 등 만약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영친왕은 이미 식물인간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영친왕은 1970년 5월 1일 별세해 경기 남양주 홍릉·유릉 경내의 영원(英園)에 묻혔다.

영친왕 사후 이방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내 낙선재를 지키며 20여년간 장애인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말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들과 지내다가 1989년 귀국했다. 그리고 그해 4월 30일 낙선재에서 영면한 뒤 영친왕과 합장되었다. 낙선재에서 함께 지내던 덕혜옹주가 숨진 지 9일 만이었다.

 

■해방후 민갑완

민갑완은 1946년 6월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을 따라 환국선을 타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여관을 전전하고 친척집에서 동가숙서가식 해야 하는 가난이었다. 1948년 김규식의 도움으로 종로 관훈동 의친왕저 사동궁 양관에 머물기도 했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남동생 민천식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부산 남동생 집에서 근근히 생활하던 민갑완의 소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8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 덕분이었다. 사회면 중 3분의 2정도를 할애한 특종기사는 민갑완이 일제의 탄압으로 파혼 당하고, 약혼예물을 빼앗기고 50여 년 간 망명과 빈곤의 삶을 눈물로 감내하며 살았다는 내용이다.

민갑완의 말년 생활을 특종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58년 6월 29일자)

 

민갑완은 1962년 ‘백년한(百年恨)’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백년한’은 간택 당시 상황이 적혀 있어 영친왕의 간택 행사에 대한 사료 중 하나로 뽑힌다. 다만 어렸을 적 일을 50여년 뒤 회상하고 회고록도 민갑완이 직접 쓴 게 아니고 친척이 다시 정리한 것이어서 오류가 많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회고록 출판 후 민갑완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자 ‘백년한’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1963년 8월 개봉되었다.

민갑완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68년 2월 19일 부산 동래에서 71세로 타계했다. 서울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방자는 “역사와 정치 제물이 되어 똑같이 희생당한 여인으로 늘 미안한 마음이 들고 친근감과 동정이 생겨 한번 만나보고 싶었으나 만날 기회 없이 별세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민갑완의 말년 모습

 

■영친왕 아들 이구

1945년 일본이 패망했을 때 이구는 학습원 고등과 학생이었다. 이구는 5년 뒤인 1950년 학습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위해 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성양복점에 취직했다. 당시 미군 기관지인 ‘성조’지는 “한국의 전 황태자 이왕의 아들이 미군 상점의 점원이 되었다”며 이구의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했다.

이구는 맥아더 사령부의 배려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는데 그러러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여권이었다. 영친왕과 이구는 일본 패망 후 한국 국민으로 외국인 등록을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주일대표부에 여권 발급을 신청했다. 그런데 미국으로 떠날 날자가 임박해도 도무지 여권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구는 일본 궁내성의 양해를 얻어 일본 정부의 임시 여권으로 1953년 출국했다. 그리고 1956년 MIT공대를 졸업하고 뉴욕의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8살 많은 직장동료 우크라이나-독일계 미국 여성 줄리아 리를 만나 1958년 결혼했다.

이구와 아내 줄리아 리

 

이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귀국 후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서울대와 연세대 등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하고 건축설계회사 임원으로 근무했다. 재주 많고 정이 많은 성품의 줄리아였지만 낯선 궁궐 생활과 종친들의 외면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할 수 없었던 종친회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구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이구는 경영하던 사업체가 부도나자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 부부는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줄리아 리는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줄리아는 이혼 후에도 한국에 머무르다가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

이구는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과거 아버지의 도쿄 저택 자리에 지어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2005년 7월 16일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한국의 창덕궁에서 치러졌다. 당시 줄리아 리는 마침 한국에 잠시 머물고 있었지만, 장례식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이구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적통도 끊겼다. 그러자 이구의 사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의친왕의 9남인 이충길의 아들 이원을 이구의 양자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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