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일본, 러일전쟁 승리 후 대한제국에 대해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지위 확보

러일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1905년, 일본이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1905.8)을 체결해 사실상 대한제국에 대해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러시아와도 포츠머스 강화조약(1905.9)을 맺어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감리·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은 터라 국제적으로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당사자인 대한제국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렇게 차례로 일본의 대한제국 점령을 용인했다. 친일적인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운명을 보호국으로 결정한 러일 간의 흥정을 평화조약이라고 포장해 미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외교적 정지 작업을 마무리한 후 1905년 10월 27일 내각회의를 열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야 한다는 이른바 ‘대한제국 보호권 확립 실행에 관한 각의 결정’을 의결했다. 이미 영국·미국이 동의하고 기타 열강도 대세로 인정하는 상황이어서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 실행이 무르익었다는 판단에서였다.

보호국화를 관철하기 위해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특명 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1월 9일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군 1개 사단이 ‘조선주차군’이란 이름으로 주둔했다. 조선주차군은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덕수궁) 주변을 사실상 포위하고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대관정(대한제국의 영빈관)에 상주하면서 5분 거리에 있는 경운궁을 감시했다.

이토는 도착 다음날인 11월 10일 천황의 친서를 고종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임무를 시작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천황의 친서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분리하려는 이간책이었다. 이토는 11월 15일 오후 3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대한제국의 외부를 폐지하고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할 것을 골자로 하는 ‘조약안’을 내놓으며 “조약을 거부할 경우 결과가 어찌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고종은 “외교권 위임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나 외교권을 행사하는 독립국이라는 형식만은 존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대한제국의 외교 사무에 대해 일본의 감독을 받더라도 독립국가로서의 외교 권한만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저녁 7시 무렵에는 “일본 정부가 조약안을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하면 정부 대신들이 의논해 조처하라”는 말로 그 중차대한 결정을 내각에 떠넘겼다. 이토는 고종의 책임 회피 발언을 회심의 미소로 반겼다. 국제여론상 ‘황제 협박’보다는 ‘대신 협박’이 더 부담이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뜻을 간파한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가 11월 16일 오전 대신들을 불러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동의하지 않자 이번에는 이토가 그날 오후 대신들을 불러 “조약 체결에 협력할 시에는 상당한 보상을 할 것이고 협력하지 않을 시에는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대신들은 이토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론을 펴지 못한 채 외교를 담당하는 ‘외부’를 통해 조약안이 접수된다면 타협의 길이 있을 것이라며 소극적 동의의 뜻을 전하면서 대한제국의 이름만은 보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도 그날 밤 고종을 만난 자리에서는 조약 반대로 의견을 모았다.

 

고종, 외교적 수단으로 나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어

대신들은 11월 17일 오전 하야시 공사를 찾아가 조약 체결 반대의 뜻을 전하고 그날 오후 고종을 찾아가 대책회의를 열었다. 오후 3시 경운궁 중명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이완용 학부대신이 고종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말해 달라며 조약을 끝까지 반대할 의지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그러면서 조약 체결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조약 내용 중에서 보태고 빼고 고칠 내용을 미리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고종과 대신들의 동의로 이후 논의는 조약문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대신들이 물러날 즈음 고종은 “이미 짐의 뜻을 말했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대신들이 중명전을 빠져나가고 있던 오후 8시 이토가 하세가와 사령관을 대동하고 나타나 고종의 알현을 요청했다. 고종은 인후통이 심하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토는 일본군이 경운궁 주위를 삼엄하게 포위하게 한 뒤 중명전을 빠져나가려는 대신들을 윽박질러 다시 중명전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토 대신 이완용(학부대신)이 일일이 대신들에게 찬반을 물었을 때 한규설(참정대신)과 민영기(탁지부대신)는 반대했다. 한규설은 일본 헌병들에게 끌려나가 회의장 밖의 별실에 감금되었다. 이완용, 이지용(내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4명은 일부 자구 수정을 전제로 찬성을 표명했다. 박제순(외부대신)은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슬그머니 태도를 바꾸었으며 이하영(법부대신)은 오락가락했다. 이른바 ‘을사5적’에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외에 이하영과 박제순을 넣고 빼는 데는 그들의 오락가락했던 태도 때문이다.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을사5적은 이하영을 제외한 5명이다.

이토는 대신들의 수정 요구를 반영한 조약 초고를 고종에게 올려 열람하게 했다. 고종은 조약문에 “본국이 부강한 뒤에는 이 조약이 무효가 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뜻의 문구를 별도로 첨부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이토는 직접 “조선이 부강할 시”라는 문구를 조약에 삽입했다. 그러고는 “조약 문구를 수정하자고 한 것은 찬성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다수결로 동의한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명칭도 없는 조약문을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내밀면서 하야시 공사와 함께 서명하도록 했다.

박제순과 하야시가 5개조로 구성된 이른바 ‘을사조약’에 서명한 것은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경이었다. 조약서 상 날짜는 조약을 미리 작성했던 11월 17일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날씨가 흐리고 으스스할 때면 1905년 을사년을 빗대 “을사년스럽다”고 했고 이 표현은 오늘날 “을씨년스럽다”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박제순은 서명의 공로를 인정받아 11월 22일 참정대신(총리), 1907년 출범한 이완용 내각 때는 내부대신(1909)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에도 다른 7명의 대신과 함께 서명함으로써 이완용과 더불어 대표적인 매국노로 분류되었다.

조약 중 ▲일본국이 대한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대한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제1조) ▲일본국 정부는 대한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제2조) 등의 조항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사라졌다. 또한 대한제국 황제 밑에 1명의 일본인 통감을 두되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하며, 대한제국의 개항장 및 기타 필요한 지점에 이사관을 설치해 통감 지휘 하에 종래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 및 본 협약 실행을 위해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리하게 한다(제3조)고 명시했다.

 

조약의 성립 절차를 하나도 거치지 않아 무효

일제에 남은 과제는 하루속히 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 보호권을 대외적으로 승인받는 절차였다. 1905년 11월 23일 조약 체결 사실을 관보 호외에 외무성 고시로 공표하고 영국, 미국, 청국, 프랑스, 독일 등 대한제국의 수교국 정부에 을사조약 전문 및 일본 정부의 선언서를 통보했다. 대한제국에서는 12월 16일자 관보를 통해 ‘한일협상조약’이라는 명칭으로 공표했다.

이후 미국을 필두로 영국, 청국, 독일, 이탈리아 등 주한 외국 공관이 대한제국을 떠났다. 각국이 공사관 철수에서 보여준 적극성의 정도는 일본과의 친소 관계, 대한 정책의 비중, 동아시아 정책 노선의 반영이었다. 조약에 따라 ‘외부’는 폐지되고 대한제국의 외교 사무를 관장할 ‘통감부’가 1906년 2월 1일 설치되었다.

문제는 을사조약이 위임·조인·비준이라는 조약의 성립 절차를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이처럼 중요한 조약은 주권자로부터 조약의 체결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자가 조약에 날인·서명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인데도 이를 뒷받침하는 고종의 어새나 서명이 들어 있지 않고 위임장이나 위임 사실을 기록한 문서가 양국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조약의 불법성을 입증하고 있다.

을사조약에 박제순과 하야시가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는 표현이 있긴 하지만 ‘상당한 위임’을 명시한 문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것은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는 내용의 조약을 고종이 순순히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상당한 위임’이라는 구절을 집어넣어 위임 과정을 거친 것처럼 위장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조약은 당연히 무효”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조약 명칭을 정하지 않은 채 조약문을 만든 것도 일본이 얼마나 급하게 서둘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즘 우리가 부르는 을사조약, 을사보호조약 등의 명칭은 후대에 을사년(1905)에 맺어진 보호조약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 지금 한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조약 원문 어디에도 조약의 이름이 없고 고종의 어새나 국새는 더더욱 찍혀 있지 않다.

을사5적은 12월 16일 조약 과정을 상세히 적은 상소를 올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대신이 함께 죄를 지은 것인데 유독 자신들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하소연하고 억울함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궤변과 함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각지 유생들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화하라는 상소를 올리거나 도끼를 등에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읍소했다. 민영환은 울분을 참지 못해 11월 30일 자결하고 조병세는 다음날 음독 자살했다. 12월 4일에는 학부주사 이상철, 시위대 김봉학이 자결했다. 고종은 자결자들에게 따로 시호와 훈장을 표창하면서도 을사5적에게는 사직을 만류하는 이중적 정치 행보를 계속했다. 고종은 열강이 대한제국을 이미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줄타기 정치 수완과 외교적 방법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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