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창씨개명 시행

신사참배와 조선어 폐지에 이은 일제 ‘황민화 정책’의 완결편

1937년 7월의 중일전쟁을 분수령으로 일제는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인의 일본화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매월 하루를 ‘애국의 날’로 정해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봉창을 강요했다. 1937년 10월부터는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합심하여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한다’는 내용의 ‘황국신민 서사’를 제창하도록 강요하고 전국의 학교에는 천황의 사진을 배포해 머리를 숙이도록 했다. 1938년 4월에는 일본어만 가르치고 조선어는 선택과목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조선교육령’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정지 작업을 거쳐 시작된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신사참배와 조선어 폐지에 이은 일제 ‘황민화 정책’의 완결편이자 일본 혼을 주입하기 위한 조선민족 말살정책이었다. 일제가 창씨개명의 법적 근거로 삼은 것은 1939년 11월 10일 개정․공포한 조선민사령이었다. 데릴사위를 인정하되 데릴사위는 처가의 ‘씨(氏)’를 따르고,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씨’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등도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성명(姓名)’을 없애고 일본식의 ‘씨명(氏名)’을 도입한 것이다.

일본식으로 ‘씨’를 만들고(創氏), ‘이름’을 고치는(改名) ‘창씨개명’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식의 ‘성명’과 일본식의 ‘씨명’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 중국 고대에서 성(姓)이란 같은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쓴 칭호였고, 나중에 나타난 씨(氏)는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계통(지파)의 구별을 위해 새로 사용한 칭호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가문의 전통이 약해지면서 ‘성’과 ‘씨’의 구별이 점차 사라지고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되었다. 이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성’으로 확대되고 일본에서는 ‘씨’로 범위가 축소되었다.

 

일본 혼을 주입하기 위한 조선민족 말살정책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호적을 새로 편제할 때 전 국민을 친족집단으로 나눠 통치체제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 친족집단이 ‘가(家)’였으며, ‘씨’는 ‘가’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즉 ‘씨’는 하나의 ‘가문’ 개념과 비슷한 ‘가’를 단위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가문의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따라서 이런 일본인들의 눈으로 보면 조선에는 ‘성’은 있지만 ‘씨’는 없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씨’를 새로 만드는 ‘창씨(創氏)’를 강요한 것이다.

조선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창씨개명’을 강요한 이유는 일본의 속셈 때문이었다. 성(姓)이라는 ‘종족’ 단위를 씨(氏)라는 ‘가(家)’ 단위로 바꾸고, 부인과 서양자(양자로 삼은 사위)도 같은 씨(氏)로 부르게 하는 등 조선의 가족제도 자체를 일본식으로 개편해 면면히 이어온 조선의 전통적인 부계혈통 관계를 해체시키고 천황을 종가(宗家)로 하는 일본식의 ‘씨’ 단위 국가로 만들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흐려놓으려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공표하면서 “내지(일본)식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길을 연 것은 사법상 내선일체를 구현하는 길이며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사실은 창씨개명을 발표하기 전, 총독부 경무국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식별이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창씨개명을 반대했었다. 총독부 법무국은 천황 등의 씨를 차용하면 안되고 집안의 호주 대신 문중이나 종친회가 씨를 정해서도 안된다고 조건을 달았다.

창씨개명 신고는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6개월간 이뤄졌다. 당연히 반발이 많았기 때문에 첫 날 신고는 48건에 불과했다. 그 중에는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광수도 있었다.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한 이광수의 사례는 이튿날 총독부의 기관지 경성일보에 대대적으로 실릴 정도로 총독부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초기 3개월 동안은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는 본령 시행 전 호주의 성을 씨로 한다’는 조항이 성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창씨개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격앙된 민심으로 신고율이 극히 저조했다. 신고율이 0.4%(2월), 1.5%(3월), 3.9%(4월)에 그치자 총독부는 행정조직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은 행정기관에서 일을 볼 수 없게 하고 물자를 배급하지 않는 등 각종 불이익을 주었다.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조선식 이름이 쓰인 우편물이나 화물은 배달하지 않았다. 창씨하지 않은 호주에 대해서는 ‘비국민’,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 사찰을 하고 노무 징용의 우선 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유무형의 온갖 압력을 가했다.

그래도 전국 곳곳에서 죽음을 무릅쓴 반발이 잇따랐다. 전남 곡성의 유생 유건영은 당시 총독이던 미나미 지로에게 “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편지를 보낸 뒤 자살하고, 전북 고창의 설진영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 측의 통보를 받고 자기 자녀를 창씨시킨 뒤 자신은 조상에게 사죄하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일본의 강요와 탄압으로 신고율은 12.5%(5월), 27.0%(6월), 53.7%(7월)로 급증하고 마감을 마쳤을 때는 79.3%나 되었다.

대부분의 문중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성을 지키기 위해 온갖 묘안을 짜냈다. ‘본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本○○’, ‘金原○○’으로 하거나 본관을 살려서 ‘金光○○’(광주 김씨), ‘金江○○’(강릉 김씨)로 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이가(李家)’로 바꾼 문중도 있었다. 김해 김씨는 ‘김해(金海)’라고 하고 전주 이씨는 궁궐의 근본이라 해서 ‘궁본(宮本)’이라고 했으며 청주 한씨는 청주의 옛 이름인 ‘서원(西原)’을 씨명으로 했다.

성을 바꾸었으니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며 ‘견자웅손(犬子熊孫)’으로 창씨계를 제출하거나 일왕 ‘유인(裕人)’이나 총독 ‘남차랑(南次郞)’ 등의 씨명을 차용하는 식의 간접적인 항거를 하다가 퇴짜를 맞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천초목(山川草木)’ ‘청산백수(靑山白水)’ ‘강원야원(江原野原)’ 등으로 장난삼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유(柳), 남(南), 임(林), 계(桂)씨 등은 일본에도 같은 씨가 있어 창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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