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헤이그 밀사 파견과 이준 열사 분사

고종, 헤이그 평화회의를 일본의 국권 침탈 공론화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 체결이 가시화하자 고종은 미국과 러시아를 향해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데 동의하고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전 후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1905.9)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고종의 요청을 뿌리쳤다. 결국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되었다.

고종은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 기자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취했다. 첫 대상은 영국의 트리뷴지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였다. “을사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다”는 고종의 밀서가 스토리 기자에게 극비리에 전달된 것은 1906년 1월 29일이었다. 스토리는 1903년 홍콩에서 창간된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지의 부편집장을 지내고 러일전쟁에 관한 책까지 쓴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당시 고종은 사실상의 포로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의 붉은 옥새가 찍힌 밀서는 한복 바짓가랑이 속에 밀서를 숨겨 밖으로 빼낸 고종의 측근을 통해 스토리에게 전달되었다. 밀서에는 ▲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고 ▲독립권을 한 치도 타국에 양여할 수 없으며 ▲조약의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므로 내치상 한 건도 인준할 수 없다. ▲통감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물론 황실권도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고 ▲세계 열강이 조선을 집단보호 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기를 바란다는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별도의 제목은 없었으나 인장만은 대한제국에서 외교문서에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대한국새’를 찍어 국가 문서임을 분명히 했다.

스토리는 1906년 2월 7일 중국 지부(芝罘·현 산동성 연태)에 도착하자마자 주중 영국영사에게 고종의 밀서 사실을 알리고 그 내용을 기사로 작성해 런던의 트리뷴지 본사로 송고했다. 기사는 이튿날인 2월 8일자 트리뷴지 3면 머릿기사로 실렸다. ‘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실질적으로 포로 신세’라는 내용의 기사는 영문으로 번역된 6개항의 밀서 내용과 함께 신문에 게재되었다.

기사는 로이터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조선, 일본, 중국 신문에도 실려 평소 “을사조약은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을 곤혹스럽게 했다. 주영 일본대사관이 “고종이 조약에 동의했다”고 억지를 부리며 트리뷴지 보도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자 스토리는 2월 10일자 또 다른 기사로 일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일본이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해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한 상세 전말을 고종 측근의 말을 인용해 쓴 것이다. 이 기사 역시 로이터통신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전송되었다.

스토리는 더 나아가 1906년 10월부터 트리뷴지에 ‘동양의 장래’란 시리즈를 연재하고 12월 1일자에는 문제의 밀서 사진을 크게 실었다. 고종이 보낸 밀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프랑스 대통령에게도 1906년 5월과 6월 밀서를 보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6년 8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고종은 세계 47개국이 모이고 러시아가 주관하는 제2차 평화회의야말로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 침탈을 국제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1905년 10월 말 관립 법어학교 교사 에밀 마르텔을 북경 주재 러시아공사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11월 1일자로 “헤이그 국제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한다”는 의사를 북경 주재 러시아공사를 통해 전달했다. 고종은 러시아 측 태도에 고무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용익에게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고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할 것을 지시했다.

 

세 밀사, 일본의 국제법 위반 폭로해

문제는 1906년 8월에 열릴 예정이던 제2차 평화회의가 강대국들의 사정으로 1년 연기되고 그 1년 동안 러시아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1906년 4월 3일자로 헤이그 주재 러시아대사가 네덜란드 외무부에 보낸 서한을 보면, 대한제국은 분명히 초청장을 발송한 47개국 중 12번째로 명단에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러시아가 동아시아 전략을 일본과 타협하는 쪽으로 반전시켜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을 불참시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이런 사실은 10월 9일 주일 러시아공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통보했다.

러시아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종에게는 여전히 평화회의 특사 파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종의 특사로 밀명을 받았던 이용익이 1907년 2월 급서했기 때문에 고종은 다른 밀사를 물색해야 했다. 그래서 결정한 특사가 이상설(정사)과 이준(부사)이었다. 당시 이상설(1870~1917)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기 때문에 이준(1859~1907)이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고종은 이준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고 있는 이상설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주러공사 이범진을 통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짐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1907년 4월 20일 수결과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을 작성해 시종과 내시, 그리고 고종의 생질 조남승을 거쳐 상동청년학원에 극비리에 보냈다. 상동청년학원의 이회영·이시영 형제, 전덕기, 양기탁 등이 이것을 부사로 임명된 이준에게 전해주었다.

이준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의 제1기생 출신으로 법관양성소에서 6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수료 이듬 해인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관한 법조인이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 한 달 만에 면직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법과에서 체계적으로 법을 다시 공부했다. 1898년 귀국 후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1905) 등 사회 활동에 전념하다 1906년 대한제국 최고 사법기관인 평리원(대법원) 예심판사(검사)로 임용되었다.

걸음마 단계였던 개화기 검찰의 부패를 적발하는 검찰 내 포청천 역할을 했으나 항명 파동으로 체포·수감되었다. 종친인 고종의 감형 조치로 곧 석방되긴 했지만 평리원 검사직에서는 쫓겨났다. 그러던 중 고종의 밀명을 받은 것이다.

이준은 고종의 위임장을 품에 숨긴 채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을 만났다. 두 사람은 5월 21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보름 후인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이범진(1852~1911)을 만났다. 1901년 주러시아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일제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 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항일 외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상설·이준 두 밀사는 이범진 공사와 함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15일간 체류하면서 교섭을 벌였지만 결국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지 못했다. 당시는 1907년 7월 30일에 타결된 러일 협약을 앞두고 있던 시점으로, 러시아는 일본과 비밀협상을 통해 몽골에서 특수 이해를 보장받는 대신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자유행동을 인정하기로 합의한 상태여서 대한제국의 지원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러시아는 이에 그치지 않고 헤이그 평화회의 의장을 맡은 러시아 넬리도프에게 전문을 보내 두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해도 협조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두 밀사는 어쩔 수 없이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1887~?)과 함께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야 했다. 당시 20세였던 이위종은 9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외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

세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평화회의가 개최되고 열흘도 더 지난 6월 25일이었다. 6월 15일 개회한 만국평화회의는 10월 18일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한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개별적으로 서울을 출발, 7월 헤이그에 도착했다. 세 밀사는 투숙지인 더 용 호텔 앞 현관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공개 활동을 시작했다.

희망과 절망,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가운데 밀사들은 6월 26일 대회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에게 고종의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내보이며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이미 넬리도프 의장에게 대한제국 특사들과의 접촉을 삼가라는 전문을 보내놓은 탓에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특사들은 영국·프랑스·독일·중국 대표 등도 만나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문전 박대를 당했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까지 있어 특사들은 끝내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특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한 독립 호소문을 배포하는 등의 선전 활동뿐이었다. 특사단은 ‘만국평화회의보’ 6월 27일자 지면을 통해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폭로했다. 호소문은 만국평화회의보뿐만 아니라 ‘런던 타임스’, ‘뉴욕 헤럴드’ 등에도 전재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 6월 30일자에는 일본의 강압을 낱낱이 고발한 이위종의 호소문이 ‘왜 조선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영국의 로이터통신도 특사들의 활동 상황을 세계로 전파했다.

특사들은 7월 8일 국제기자클럽에 초청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위종이 “대한제국 황제의 서약이 없는 을사조약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열변을 토하자 각국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날의 연설회 장면은 ‘헤이그 신보’ 7월 10일자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양식 매너가 몸에 밴 이위종을 “대한제국의 왕자”라고 소개한 언론도 있었다.

일본의 수석대표는 “청중 앞에서 프랑스어로 1시간 동안 웅변조로, 격렬하게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고 본국 외무부에 보고했다. 일본인으로는 유일하게 대회를 취재한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그들 3명은 진실로 애국의 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안은 것 같았다”는 기사를 남겼다.

이처럼 열강 대표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여도 특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준 부사가 통분을 참지 못하고 7월 14일 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위종은 그 전에 며칠 일정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가 7월 18일 돌아와 임종은 하지 못했다. 이준의 죽음은 7월 17일자 ‘만국평화회의보’, ‘헤이그 신보’, ‘더 텔리그라프’ 등에 실렸다. 신문들은 “얼굴에 생긴 종양 수술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얼굴의 종기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결과, 단독(상처에 균이 들어가 생기는 급성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더 용 호텔에 2일간 안치되었던 시신은 7월 16일 이상설과 호텔 주인에 의해 헤이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자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윌리엄 스티드는 “유일하게 이준의 최후를 지켜본 이상설이 영어로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는 말을 되뇌었다”고 기록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7월 18일자 기사에서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장렬하게 자결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자결설, 병사설, 단식 순절설 등 사인을 놓고 설들이 무성했지만 1962년 우리 정부 조사에서 병사로 최종 확인되었다.

일본은 이준의 분사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조선의 재판소가 궐석재판을 열도록 압력을 가해 8월 8일 이상설에게는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하도록 했다. 이준의 시신은 현지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63년 10월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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