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일제가 중점을 둔 것은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사업

일제는 1904년의 러일전쟁 승리 후 농업회사나 조합 등을 통해 조선의 농업경영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흉계를 꾸몄다. 일본인 지주와 회사는 1905년경부터 토지조사와 토지 매수를 시작해 각종 농장을 설립했다. 이런 추세는 일본의 국가자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설립한 후 더욱 활발했다. 동척은 일본의 영세 농민을 조선에 이주시킨 뒤 저리의 식산흥업 자금을 제공해 척식 사업을 한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척식’의 사전적 의미가 ‘미개한 땅을 개척해 사람이 살게끔 하는 일’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 땅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임자 없는 땅으로 보았다는 방증이다.

일본의 식민 단체 중 하나인 동양협회가 동척 설립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델로 한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에 관한 보고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한 것은 1907년 12월이었다. 뒤이어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조약 때 일본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1908년 3월 일본 의회에 제출하고 의회가 통과시켰다. 사실상 일본 혼자 북치고 장구친 법이긴 하지만 아직 조선의 국권이 살아 있던 때라 일본은 조선인 일부를 임원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구색을 갖췄다.

1908년 8월 26일 동척법이 제정되자 일제는 일본인 82명, 한국인 23명을 설립위원으로 임명해 동척의 설립을 구체화했다. 동척은 1908년 12월 28일 한일 합자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발행주식 20만 주 가운데 7만 주는 조선 정부가 토지(5,300만 평)로 출자한 6만 주와 양국 황실 지분으로 구성되었고 13만 주는 양국 국민을 상대로 공모했다. 조선 정부 예산의 40%에 육박하는 자본금 1,000만 원은 조선 정부와 일본 정부·재계가 마련했다. 일제가 동척을 한일 합자회사로 설립한 이유는 이민 사업에 필요한 광대한 토지를 확보하는 데 조선 정부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척은 서울 황금정 2정목(을지로 2가)에 위치한 구제중원 자리에 본사를 두고 190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업무는 이주사업, 농업경영, 토지개량 등이었다. 이 중 일제가 중점을 둔 것은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사업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인구밀도를 과소평가하고, 기간지라도 일본의 집약적 농법을 도입하면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지 않고도 대량 이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동척을 활성화한 것은 토지조사사업

동척은 한국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주규칙’을 인가받아 1911년부터 1927년까지 총 17차례 일본인을 조선으로 이주시켰다. 하지만 인원 수는 계획에 턱없이 모자랐다. 게다가 조선 농민과도 갈등이 심각해 결국 이민 사업은 축소·폐지했다.

동척을 활성화한 것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8년간 전 국토를 낱낱이 파헤쳐 임자 없는 땅을 무조건 동척에 귀속시켰다. 근대적 토지소유 개념이 부족한 데다 일제에 협력하기가 싫어서 신고를 하지 않은 자영농민들은 눈 뜨고 땅을 빼앗겼다. 결국 값이 싸고 간척이 쉬운 낙동강·영산강·금강 유역의 땅은 물론 전국의 곡창지대까지 동척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척 소유의 땅은 1913년 1억 4,130만 평으로 늘어나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20년 경에는 소유지가 2억 7,210만 평에 달했다. 이는 당시 조선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면적이었다.

동척은 1911년 금융부를 신설, 일본 시장에서 외채를 모집한 자금으로 금융 업무를 본격화해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과 함께 조선의 3대 금융기관 역할을 했다. 이들은 농민이 토지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간 후 갚지 못하면 동척의 소유로 만들어 토지를 집적했다. 또한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준 뒤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했다.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동척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

동척의 만행은 전남 나주군 궁삼면에서 일어난 ‘이회춘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12년 봄 동척은 궁삼면에 일본인 이민을 위해 무작정 이민 배당지를 선정하고 강제로 토지 분할 표목을 박았다. 이회춘의 노모가 이에 항의하며 표목을 뽑아내자 이를 본 일본군 헌병이 군화로 노모의 흉부를 차 논두렁에서 즉사시킨 것이다.

1926년 12월 28일의 나석주 의사 의거도 동척에 대한 응징이었다. 나 의사의 고향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은 예로부터 조선 왕실의 궁방전이 많은 곳이었다. 동척이 이 땅들을 차지하는 바람에 북률면민 대부분은 동척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에 항의하는 소작쟁의가 동척 소유인 북률농장에서 빈발하는 가운데 나석주 의사가 동척에 폭탄을 투척한 것이다.

동척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만주로 이주했다. 그 숫자가 1926년까지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우리 농민들이 떠난 곳에는 일본인 이주민이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와 농촌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함으로써 일제의 대변자이자 앞잡이 역할을 했다.

동척은 사세가 커지자 1917년 동척법을 고쳐 양국 국적의 회사를 일본 국적의 회사로 만들어 본점을 도쿄로 옮겼다. 서울에는 조선지사를 두었으며, 부산·대구·목포·김제·대전·경성·원산·사리원·평양 등 9개 도시에는 지점을 설치했다. 중국에도 8개 지점을 설립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미 군정은 한국 내 일본인 소유재산(적산)을 미 군정청 소유로 귀속시켰다. 이때 동척의 소유재산을 인수·개편해 ‘신조선회사’로 개명하고 1946년 2월 창설한 ‘신한공사’가 관리하도록 했다. 당시 신한공사의 소유 경지는 한국 논밭 경지의 12.3%, 소속 농가는 전체 농가의 27.1%나 되었다.

사진으로 잘 알려진 동척 건물은 1911년 가을, 처음 업무를 시작한 구제중원 자리(을지로 2가)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내무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67년 건물을 매입한 외환은행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외환은행은 1972년 건물을 철거한 후 1980년 은행 본점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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