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조선통감부 설치와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

조선통감부 설치는 대한제국 내정 간섭이 목적

을사조약(1905.11.17)을 ‘늑약’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할 뿐 을사조약에 내포된 진짜 중요한 의미는 조선통감부의 설치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통감부의 설치 근거는 “일본국 정부는…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라고 규정한 을사조약 제3조였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12월 20일 칙령 제267호로 공포함으로써 천황 직속의 통감부 설치를 구체화했다. 통감 업무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통감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제국 관헌이 시행하는 제반 정무를 감독하고, 기타 종래 제국 관헌에 속하는 일체의 사무에 대해 감독을 시행한다’(제3조 2항), ‘통감은 대한제국 정부에 용빙된 일본제국 관리들을 감독한다’(제6조)이다. 이로써 일제는 대한제국 내정에 대한 간섭권을 확보했다. 이 밖에도 일제는 조선주차군 병력 사용권(제4조), 통감 유고 시 조선주차군 사령관이 직무를 대신한다(제13조)는 등의 조항도 삽입해 일본 군부가 통감부를 통해 대한제국 통치에 관여할 수 있게 했다.

관제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담당해온 ‘외부’는 1906년 1월 19일, 주한 일본공사관은 1월 31일부로 폐지되고 통감부가 2월 1일 공식 설치되었다. 지방관청을 감독할 이사청도 서울, 부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 원산, 평양 등 전국에 설치해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펼쳤다.

사실 을사조약 제3조를 문구대로만 적용하면 통감부의 업무는 외교에 국한된다. 하지만 내정간섭이 그들의 노림수이다보니 통감부 내에 외교 업무와 상관없는 경무부, 농상공부, 총무부 등까지 신설해 내정을 관장했다.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대한제국 정부의 내치권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통감부가 직접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대한제국 정부에 명령·지시하는 간접적 방식으로 내정에 간섭했다. 통감부는 발족 당시 대한제국의 ‘외부’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1907년 2월부터 남산 기슭에 지어진 목조 2층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다.

초대 통감에는 1906년 2월 한 달간 임시통감으로 활동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차군 사령관의 뒤를 이어 이토 히로부미가 3월 2일 부임했다. 이토는 3월 9일 고종을 알현한 뒤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통감이 부임하면서 기존의 고문관, 참여관, 보좌관, 고문경찰 등은 모두 국적과 신분 여하에 상관없이 통감의 지휘 통솔을 받게 되었다.

통감은 대한제국 정부에 통감부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시정개선협의회’를 구성했다. 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1906년 3월 13일 제1회 시정개선협의회 개최부터 통감이 직접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을 통감 관사로 소집해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집행을 강요하는 자리로 이용했다.

다만 통감부는 고문부를 통한 시정 감독의 방식으로 정부 내각은 어느 정도 장악할 수 있었지만 황제권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궁내부의 권력 행사는 완전히 봉쇄하지 못했다. 재정상으로도 정부와 별도로 궁내부가 각종 잡세를 징수하고 영업 특허를 부여하는 관행이 계속 이어졌다. 궁내부는 그 밖에도 정부 행정에 간여하거나 의정부를 무시하고 직접 행정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여전히 ‘정부 이외의 정부’, ‘정부 이상의 정부’로서 위상을 유지했다.

고종은 일본이 후견하는 친일 내각을 불신임하는 방법으로도 끊임없이 주권 회복을 시도했다. 참정대신 박제순이 이끄는 친일 내각은 보호조약 반대 운동자들의 시위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박제순은 보호조약 체결 당시 책임이 큰 외부대신이었다는 점에서 각계의 공격을 받았다. 일제는 결국 박제순 내각을 경질하고 황제권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친일 내각을 결성할 목적으로 이완용을 발탁했다. 이완용이 보호조약 체결 당시 단호한 찬성 태도를 보인 것과 황제 폐위 방안을 제시한 것 등이 발탁의 이유였다. 고종은 5월 22일 이토의 강권에 따라 이완용을 불러 내각 조직을 하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이토는 가난한 하층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급무사 집안인 이토가(家)에 입양된 덕에 그 역시 하급무사의 신분을 얻었다. 16세에 개화파의 선구자 요시다 쇼인의 쇼카숙에서 수학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토는 그곳에서 평생의 동지가 될 이노우에 가오루와 다카스기 신사쿠 등을 만났다. 이노우에는 훗날 주한 일본공사가 되고 다카스기는 메이지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토가 정치 무대에 첫 모습을 나타낸 것은 외세를 배격하자는 극렬 양이(攘夷)론자로서였다. 1862년 천황가와 막부의 융합론인 ‘공무합체론’을 주장하는 나가이 우다의 암살을 모의하고 영국공사관에 불을 질렀다. 그러다가 1863년 5월 이노우에 등 젊은 무사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영국의 앞선 문명에 충격을 받고 1864년 6월 일본으로 돌아와 ‘양이’에서 ‘개화’로 신념을 바꾸었다.

1867년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으로 조슈번과 사쓰마번 중심의 신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영국 유학 경험 덕분에 외국사무계에 배치되었다. 평민 출신의 이토가 일본 근대 정치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토는 1871년 11월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로 한 ‘견외사절단’이 구성되었을 때도 세계 문명을 접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었다. 이토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을 1873년까지 순방하며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익혔다.

구미 시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메이지 정부는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 대외 전략의 기본 이념인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도 이때 등장했다. 주권선인 국경선을 지키려면 그 바깥쪽에 설정한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는 전략으로 조선은 이익선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정한론자로 즉각 정벌을 주장한 반면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아직 외정에 나설 때가 아니라 국력을 더 기를 때라며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 이와쿠라 등은 1873년 10월 메이지 천황의 동의를 얻어 정한론을 폐기했다. 이토 역시 내치우선론에 동조해 정한론에 반대했다. 물론 조선 정벌의 시기를 늦추자는 것이지 정한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존왕을 내세운 조슈번과 사쓰마번 연합 세력이 천황을 명분 삼아 전국적 복종을 강요한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조슈번 출신에 영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이토는 출세 가도를 달려 1875년 내무경의 지위에까지 올라갔다.

이토는 1882년 일본의 실정에 맞는 헌법을 구상하기 위해 또다시 유럽을 순방해 1883년 8월 귀국했다. 1885년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근대적인 내각제를 도입했을 때는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발탁되어 초기 메이지 정부를 안정시켰다. 1888년 완성된 헌법 초안을 심의하는 추밀원의 초대 의장으로도 활동하며 헌법을 완성해 1889년 2월 11일 7장 76조로 구성된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제3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한다’(제4조)고 규정, 완벽한 전제군주 헌법의 모습을 갖췄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최고의 총리로 일본 국민의 존경 받아

헌법에 따라 1890년 7월 1일 25세 이상,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한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전체 인구의 약 1%가 이에 해당되었다. 이토는 그해 11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첫 의회가 열렸을 때 귀족원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1892~1896년, 1898년, 1900~1901년 기간에도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모두 4번이나 내각 총리대신으로 활동하는 드문 기록을 세웠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일본 헌법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본의 문예춘추지 2002년 2월호가 역대 총리 56명의 서열을 매긴 조사에서 1위에 오를 정도로 이토는 일본 최고의 총리요 일세의 영웅으로 일본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도 피나는 노력과 재능만으로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재산이 없어 당시 천황이 체면이라도 유지하라며 돈을 보냈을 정도로 청렴했다는 점도 일본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한 1906년 3월 2일부터 1909년 3월 통감에서 물러날 때까지 3년 동안 제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면서 조선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토의 부임 후 그동안 한일의정서(1904.2)에 의거해 활동하던 고문 등은 신분 여하에 상관없이 모두 통감의 지휘 통솔을 받게 되었다.

황제권을 배경으로 독자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궁내부의 권력 행사는 한동안 묵인하다가 1906년 7월부터 아무나 궁궐에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고종과 측근 세력의 접촉을 차단하고 황제를 거의 유폐된 상태로 압박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토는 1907년 5월 22일 유약한 기존의 박제순 내각을 경질하고 일찍부터 고종의 폐위를 주장해온 이완용을 참정대신(총리)으로 발탁했다. 내각은 이완용을 따르는 친일 인사들로 조직했다.

이토는 1907년 6월의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19일 고종을 퇴위시키고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을 내세워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형식상 조선인이 ‘장(長)’으로 있는 각 부에 일본인을 차관으로 내정해 차관들이 실권을 가지고 외교와 내정을 집행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추진했다. 또한 한일신협약의 ‘비밀각서’에 의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해 대한제국을 무장해제했다.

이토는 1909년 6월 14일 통감에서 물러나 일본에서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맞고 중국 하얼빈역에서 비명횡사했다. 이토의 뒤를 이어 제2대 통감에는 부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 제3대 통감에는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임명되었다. 데라우치는 7월 2일 경성에 도착, 그해 8월 29일 한일합방 조약을 공포하고 통감부 대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10월 1일 자신이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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