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일합방조약 강제 조인

우리 민족이 36년간 겪어야 할 시련의 전주곡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제의 시나리오는 치밀하고도 주도면밀했다. 일제가 먼저 착수한 것은 대한제국 주변의 외교적 울타리를 모두 걷어내 조선을 국제 미아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을 병탄할 때 혹시라도 있을 열강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국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고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해 러시아마저 무릎을 꿇게 했다.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1905.8)을 체결해 조선에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받았다. 일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정리한 뒤 을사조약(1905.11)과 한일신협약(1907.7)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차례차례 빼앗아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다만 병합의 시기와 방식은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렸다. 이토 히로부미(조선 통감)와 이노우에 가오루(전 주한 일본공사) 등 문치파들은 국제 열강을 의식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자고 주장한 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전 육군대장)와 데라우치 마사타케(전 육군장관) 등 무단파들은 점진적인 병합에 반대했다. 물론 이토 등 문치파들도 병합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병합하기에는 일본의 재정이 부족하고 대한제국이 국제법적으로 보호국 상태인 만큼 열강의 눈치를 살펴 병합에 신중하자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무단파와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전쟁 비용 때문에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외교적으로도 만주를 둘러싸고 미국, 러시아 등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어 신중론에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무단파들이 신중한 병합에 계속 반발하자 이토 역시 1909년 4월 병합에 이의가 없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6월에는 통감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일제가 마침내 야욕을 드러낸 것은 1909년 7월 6일

일제가 마침내 야욕을 드러낸 것은 1909년 7월 6일이었다. 내각회의에서 ‘대한제국 병합에 관한 건’을 의결하고 천황의 재가를 받아 한일합방안을 확정한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대한제국을 병합하되 그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충분히 실권을 확보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되면서 즉각적인 병합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청일전쟁 이래 조선의 독립 보호를 정책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일본 스스로 병합을 선언하는 방식은 부담스러웠다. 그보다는 조선의 자발적인 청원에 의해 병합을 단행하는 모양새가 외교적 마찰도 줄이고 대외적 명분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가 일진회의 실질적 운영자 송병준 등에게 ‘합방 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일진회장 이용구는 1909년 12월 4일 합방 성명서를 발표하고 순종,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총리대신에게 합방 청원서를 전달했다. 수면 아래에서만 논의되던 ‘합방’ 문제가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 전부를 일본 천황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합방 청원서는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완용은 12월 7일 대신회의를 열어 합방 청원을 각하했다. 통감부는 시기상조라며 합방 청원서를 반려했다.

사실 이완용이 반대한 것은 합방 자체가 아니었다. 합방의 공로를 일진회에 빼앗길까 봐 일시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매국노끼리 나라를 팔아먹는 공로를 빼앗기기 싫어 다투는 형국이었다. 일진회의 합방 성명서는 이렇듯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그 시도만으로도 합방이 사실처럼 굳어지고 합방 이후 조선의 정치 체제에 관한 논쟁을 촉발했다.

일제가 야욕을 구체화한 것은 1910년 4월과 5월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조선 병합에 대한 승인을 확보함으로써 병합에 필요한 국제적 조건을 충족한 뒤였다. 병합을 지연시켰던 국제 열강의 승인 문제가 해결되자 병합은 행정적인 절차만을 남겨놓은 상태가 되었다.

병합을 향한 일본의 움직임은 1910년 6월 3일 내각회의에서 ‘병합 이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 방침’이 결정되고 6월 14일 현역 육군대장이자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제3대 통감으로 발령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조선에서도 병합을 위한 일제의 막바지 작업이 진행되었다. 먼저 조선인의 저항을 막기 위해 6월 24일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도록 하고 식민지 치안 확보를 위한 강력한 물리적 장치로 ‘헌병경찰’을 창설했다.

 

순종, “권신이 모두 가(可)하다면 짐도 이의가 없다”

이처럼 병합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가운데 7월 23일 데라우치가 통감으로 부임했다. 데라우치는 곧 헌병경찰을 동원해 모든 옥내외 집회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가차 없이 검속·투옥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문과 잡지 검열도 강화해 조선을 사실상 계엄 상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완용은 8월 4일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에게 보내 합방 조건을 협상하도록 했다. 고마쓰는 “조선의 원수는 일본 황족의 대우를 받으며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지급받는다. 내각의 대신들과 병합에 기여한 자들게도 작위를 수여하고 세습 재산도 받게 된다”는 방침을 전해주었다. 훗날 고마쓰는 이완용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고 술회했다.

데라우치는 8월 16일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통감 관저로 불러 병합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이완용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병합 이후에도 국호를 존속할 수 있도록 하고 국왕의 칭호를 보존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일본은 향후 교섭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이완용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완용이 8월 18일 합병 조약안을 내각회의에 상정했을 때 학부대신 이용직을 제외하고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다.

8월 22일 오후 2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말이 어전회의이지 실제로는 데라우치 통감이 건네준 ‘한일병합 조약안’을 조인하는 데 필요한 ‘전권 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아내는 자리였다. 회의에는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이재곤,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등 각료들과 왕족 대표 이재면,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참석했다. 창덕궁과 경운궁(덕수궁) 주변에서는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완용이 합방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동안 일본과 교섭한 내용 등을 설명하자 나머지 각료들이 동의했다. 순종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 3시 무렵 “권신이 모두 가(可)하다면 짐도 이의가 없다”며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의 전권을 위임하는 전권 위임장에 서명하고 대한제국의 국새를 찍게 했다. 오후 4시 이완용은 조중응과 함께 데라우치 통감 관저를 찾아가 전권 위임장을 보여준 뒤 ‘병합을 알리는 조칙’에 조인했다.

 

조선 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문 닫아

당초 조약의 공포일은 8월 26일이었으나 그 다음날이 순종의 즉위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8월 29일로 바뀌어 양국 관보에 게재했다. 대한제국의 관보는 병합 조약을 게재한 8월 29일자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같은 날 발행된 조선총독부의 첫 관보에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 방침을 담은 법령들이 실렸다.

8개조로 된 조약 중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대한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1조)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2조)가 조선을 일본에 송두리째 넘기는 데 적용한 조문이었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건국 27대 519년 만에 문을 닫았고 조선의 존재도 세계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일제로서는 1873년 정한론 이후 37년 동안 진행한 조선 침탈의 과정을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조약 중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8조를 제외한 나머지 5개 조항은 일본이 조선을 위해 무엇무엇을 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즉 황제·태황제·황태자를 비롯한 황실과 황족, 그리고 공훈이 있는 자 등에게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그리고 은사금 지급 등을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 고위 관료, 재야의 명망 있는 정객 등 76인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이들을 장차 식민통치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국망 3일 전인 8월 26일 순종은 이완용과 궁내부대신 민병석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박제순 등에게는 이화대수훈장을 수여했다. 또 황후 윤씨는 황실과 종친, 이완용의 부인 등 40여 명에게 서봉훈장을 수여했다. 500년 사직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군주와 대신들은 이처럼 나라를 넘겨준 공로로 훈장을 주고받았다.

일제는 조약 공포와 동시에 대한제국의 국호를 폐지하고, 데라우치를 통감부 대신 새로 설립한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에 임명했다. 8월 29일 조선귀족령을 발표하고 9월 10일 대한제국 내각의 인장과 업무를 총독부로 이관했다. 이완용의 처조카이자 비서관이던 김명수는 대한제국 정부 문서 폐기와 이관 작업을 주도했다. 일제는 이렇게 9월 한 달 내내 대한제국 정부 해체 작업을 해치운 뒤 10월 1일 이완용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했다.

 

합방에 공을 세운 친일 매국노와 전직 고관 76명 작위 받아

일제는 10월 7일 합방에 공을 세운 친일 매국노와 전직 고관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후작 작위는 왕족인 이재완·이재각·이해창, 고종의 인척인 이해승,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개화파인 박영효 이렇게 6명이 받았다. 이완용, 민영린(순종의 첫 부인 순명효황후와 남매 관계), 이지용(내부대신이자 왕족) 3명은 백작, 창씨개명 1호 송병준, 정미7적 조중응, 을사5적 박제순 등 22명은 자작, 김가진·이윤용·윤웅렬 등 45명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송병준과 고희경은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 후 추가로 작위를 받은 경우는 1924년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이 유일했다. 여기에 작위를 계승한 습작자를 포함해 조선 귀족은 140∼150여 명에 이른다.

76명 중에는 작위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한규설을 비롯해 유길준·민영달·윤용구·조경호·홍순형 등 6명은 작위를 거절했다. 따라서 실제로 작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68명이었다. 이후에도 자작 김윤식·이용직, 남작 김가진·김사준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실작’했다. 작위를 받은 자들에게는 은사금이 지급되었다.

황실에 대한 호칭과 예우도 바뀌었다. 순종은 ‘창덕궁 이왕 전하’,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 황태자는 ‘왕세자 이은 전하’로 격하되었다. 당초 일제는 고종을 병합 이후 ‘이태공’으로 부르자고 제안했으나 이완용이 ‘이태왕 전하’라는 명칭을 고집해 관철했다. 그것은 일본과 병합 조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로서 체면을 유지하고 황실 및 원로들의 반발을 완화하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일본 측도 원활한 교섭을 위해 이완용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어 황실 칭호는 양보했다. 매국노들이 희희낙락하는 동안 전국에서는 국권 상실에 분노한 자결이 잇따랐다. 우리 민족이 36년간 겪어야 할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