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최남선 ‘신문관’ 설립과 ‘소년’지 창간

근대 잡지를 펴낸 출판인이자 신문화의 선구자

최남선(1890~1957)은 다양한 근대 잡지를 펴내고 우리의 고전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출판인이자 신문화의 선구자였다. 단군을 우리 역사에서 제외하려 한 일본의 관제 학자들에 맞서 싸운 사학자이자 논객이었다. 무엇보다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해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으나 일제 말기에 친일 활동을 벌여 그를 아끼고 사랑한 동료 지식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최남선이 일찌감치 개화 문명을 접하고 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한약재 무역업으로 거부가 된 부친 최헌규 덕분이었다. 부친은 두 아들 최창선과 최남선이 장차 문명개화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최남선은 1902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성학당에 입학했다. 일본어, 산수, 지리 등을 배우다가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1904년 11월 일본 도쿄부립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집안에 사정이 생겨 1개월 만에 자진 사퇴하고 1905년 1월 귀국했다가 1906년 4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그해 9월 와세다대 고등사범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이번에는 1907년 3월 일본 학생들이 조선 국왕을 모독하는 모의국회 사건에 항의하다 10여 명의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자퇴했다. 일본 유학 시기에 최남선은 2살 위 홍명희의 하숙집에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2살 아래 이광수를 만났다. 세 사람은 ‘도쿄 삼재’로 불렸다.

최남선은 우리의 국력과 국세가 날로 쇠퇴하는 원인이 신문명의 도입과 신문화 건설의 후진성에 있음을 일본에서 절감했다. 1908년 4월 도쿄에서 인쇄 기술을 속성으로 배우고 부친이 내준 자금으로 활판인쇄기, 주조기, 자모기 등을 사 모은 뒤 일본인 인쇄 기술자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1908년 6월 서울 중구 상리동(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동편 어름)에 위치한 부친의 약재상 건물에 ‘신문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위층은 편집실로 아래층은 사무실로 꾸몄다. 옆집을 사서 벽을 튼 곳에는 인쇄 공장을 차렸다. 그 무렵, 출판·인쇄 활동은 신문화 운동의 중심축이자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부친의 자금이 신문관 창립의 밑거름이었다면 형 최창선은 신문관 운영의 숨은 주역이었다. 최남선이 잡지와 단행본의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을 때 형은 발행인·인쇄인으로 신문관 경영을 책임졌다. 신문관은 점차 편집·인쇄·판매의 네트워크를 갖춘 근대적인 출판 복합체로 성장했다.

최남선은 1908년 11월 1일 ‘소년’지를 창간했다. ‘소년’은 오늘날 본격적인 청년교양잡지의 효시로 꼽힌다. 우리나라 잡지사를 돌아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잡지는 1892년 1월 영국인 선교사 올링거 부부가 창간한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다. 한국인이 최초로 발간한 잡지는 1896년 2월 재일 유학생들이 창간한 ‘친목회보’다. 다만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외국인이 발간한 영문 잡지이고, ‘친목회보’는 일본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에 두 잡지를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로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조선 최초의 잡지로 인정하는 것은 1896년 11월 ‘독립신문’의 자매지로 창간한 ‘대죠선독립협회보’(반월간)다. 이후에도 1906년 6월 상동교회의 전덕기가 여성을 위해 창간한 ‘가뎡잡지’, 1906년 11월 청소년잡지로 창간한 ‘소년 한반도’ 등 여러 잡지가 명멸했다.

그런데도 조선잡지협회가 1965년부터 제정·기념하고 있는 ‘잡지의 날’은 ‘소년’지가 창간된 1908년 11월 1일이다. 우리나라 종합잡지의 효시를 말할 때도 언제나 거론되는 것이 ‘소년’지다. 이유는 ‘소년’지가 우리나라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간행물인 데다 내용과 형식면에서 잡지 형식을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소년’지는 우리나라 종합잡지의 효시

‘소년’지 창간호는 대륙을 향해 앞발을 들고 일어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의 한반도 지도를 실어 눈길을 끌었다. 호랑이 지도를 게재한 목적은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가 한반도를 토끼 형상에 비유해 조선이 대륙에 대해 두려워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약한 존재임을 주입하려는 의도를 뒤집는 데 있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에 불과했다. 1년이 지나도 20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이광수, 홍명희, 박은식 등의 문필가들이 필자로 가담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소년’은 요즘의 10대 소년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가진 신세대를 뜻했다. 창간호는 ‘이솝 우화’, ‘걸리버 여행기’ 등 해외 소설과 자연과학, 한국사, 국내외 지리, 석탄과 철 등을 다루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등을 위인으로 소개했다.

‘소년’은 신민회의 청년운동 단체로 출범한 청년학우회의 기관지 역할도 했다. 윤치호·이승훈·최남선 등 12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청년학우회의 취지·강령·동향 등은 ‘소년’을 통해 전파되었다. ‘소년’은 최남선이 창가와 시조를 보급할 때도 적극 활용되었다. 2008년 조선동시문학회는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11월 1일을 ‘동시의 날’로 제정·기념하고 있다. 최남선은 ‘소년’에 투고하는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문장을 쓰도록 요청했다. 시를 쓸 경우 순전한 우리말로 쓰고 그 말의 뜻이 분명하지 않을 때만 옆에 한문을 달도록 했다. 당시는 중국의 고사를 많이 인용하는 것이 글의 질을 높인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소년’은 통감부와 총독부로부터 여러 차례 압수와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다가 1911년 5월 통권 23호로 종간되었다. ‘소년’은 창간만으로도 조선 문학사의 첫머리를 장식할 만큼 기념비적인 일이었지만 최남선의 권두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창간호에 실렸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흔히 최초의 신체시 또는 신시의 효시로 꼽는 ‘해에게서…’는 비록 제목이 번역 투이고 본문의 정조도 지금의 눈으로 보면 퍽 유치하지만, 4·4조나 7·5조 같은 그때까지의 창가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시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의 일대 혁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남선은 이후에도 ‘붉은 져고리’, ‘새별’, ‘아이들 보이’, ‘청춘’ 등의 잡지를 계속 창간했다. ‘붉은 져고리’는 1913년 1월 창간된 첫 어린이 대상의 격주간 신문으로 1913년 6월 제12호를 끝으로 종간되었고 ‘새별’ 첫호는 ‘붉은 져고리’가 종간되기 전인 1913년 4월 발행되었다. ‘아이들보이’는 ‘붉은 져고리’가 종간된 후인 1913년 9월 창간되었다.

최남선은 1914년 10월 성인 대상의 본격적인 종합잡지 ‘청춘’을 창간해 계몽운동에 힘썼다. 이광수·홍명희·현상윤·이상협 등 젊은 문사들이 글을 쓰고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표지를 그렸다. ‘청춘’은 과학·역사·지리·세계고전 등 다채로운 편집으로 종합교양잡지 면모를 갖춰나갔다. 현상금까지 내걸고 문예 작품을 모집했다. 서구의 명작을 소개하고 우리의 고전을 발굴하는 등 근대문학 형성에 기여하다가 1915년 3월 통권 제6호가 국시 위반이라는 이유로 정간되었다. 이후 속간과 휴간, 월간과 격월간을 반복하다가 1918년 9월 제15호를 끝으로 사라졌다.

 

조선광문회, 근대 한국학의 아카이브

최남선은 ‘한글’과 ‘어린이’라는 순 우리말도 창안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우리글’, ‘국문’, ‘언문’, ‘조선글’, ‘배달글’, ‘정음’ 등 다르게 부를 때 ‘아이들 보이’ 1913년 10월호에서 우리말을 처음 ‘한글’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한글을 탄생시켰다. ‘청춘’ 창간호(1914.10)에는 시 ‘어린이 꿈’을 게재함으로써 방정환이 1920년 ‘개벽’지에 발표한 ‘어린이 노래’보다 6년이나 앞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최남선은 일본의 과학잡지나 과학서 등에 실린 서구의 과학·지리·문학 등을 번역해 ‘소년’과 ‘청춘’에 게재했다. ‘대한지지’, ‘조선불교통사’ 등 지리역사서, ‘조선말본’ 등 국어학 사전, ‘검둥이의 설움’(엉클 톰스 캐빈) 등 번역소설류 등도 출판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문고본의 효시인 ‘십전총서’와 ‘육전소설’은 신문관 출판의 가장 큰 공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10전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십전총서’의 첫 문고본은 1909년 2월 발간한 아일랜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늬버유람긔’ 번역본(54쪽)이었다. ‘십전총서’의 발간 예정표에는 10여 권의 책명이 소개되어 있었으나 ‘산수격몽요결’을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발간하고 중단되었다. 우리 고전을 염가로 보급하기 위한 ‘육전소설’도 기획해 ‘춘향전’, ‘옥루몽’, ‘홍길동전’, ‘심청전’, ‘전우치전’ 등 10여 종을 발간했다.

최남선이 근대 조선학의 아카이브이자 당대 최대·최고의 민간문화 계몽기구가 될 ‘조선광문회’를 발족한 것은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이었다. 조선광문회는 서울 중구 삼각동 굽은다리(곡교)에 위치한 부친의 사랑채 2층에서 문을 열었고 신문관은 1층에 자리를 잡았다. 고전 희귀본을 수집·복간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등 순수 학술 문화사업이 설립 취지였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와 언어, 문화를 일으키려는 부흥 운동이자 민족정신의 각성 운동이었다.

조선광문회가 출범하자 박은식·안창호·주시경·장지연·양기탁·이승훈 등 당대 석학과 지식인들이 적극 동참했다. 이들에게 조선광문회는 고전 간행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모여 시국에 관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랑방이었다. 조선광문회는 ‘동국통감’, ‘연려실기술’, ‘해동역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택리지’, ‘산경표’, ‘성호사설’, ‘경세유표’ 등 고전 24종 46책을 포함해 총 35종 59책의 서책을 간행했다.

고서 간행과 더불어 조선광문회가 역점을 둔 사업은 조선어사전 편찬이었다. 주시경,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1911년 시작해 4년간의 작업 끝에 원고 집필을 거의 마무리했으나 주시경이 1914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최남선은 3·1운동의 발단에서부터 상당한 공헌을 하고 조선광문회는 1919년 3·1운동의 산파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3·1운동을 발의한 곳도, 최남선이 3·1독립선언문을 구상한 곳도 조선광문회였다. 3·1운동 후 최남선은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1921년 10월 19일, 2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을 때 신문관과 조선광문회는 침체에 빠져 있었고 부친의 자금 지원도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결국 신문관은 1922년 7월 출판 기능을 중단하고 인쇄소로서만 명맥을 유지하다 1928년 문을 닫았다.

최남선은 1922년 9월 3일 조선 최초의 시사주간지 ‘동명’을 창간했다. 타블로이드 판형인 ‘동명’은 창간호 2만 부가 매진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발매금지 처분과 이에 따른 경제적 타격으로 1923년 6월 3일 23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했다. 다만 동명사는 계속 살아남아 지금도 출판사로 존속하고 있다.

최남선은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를 창간했다. 편집국장 진학문, 정치부장 안재홍, 사회부장 염상섭으로 진용을 짠 시대일보는 한때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대열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경영난의 악화로 최남선은 1924년 9월 퇴사하고 신문은 1926년 8월 폐간되었다. 이후 소유권이 이상협에게 넘어가 ‘중외일보’란 제호로 발행되다가 ‘중앙일보’(1931), ‘조선중앙일보’(1933)를 거쳐 1937년 폐간되었다.

시대일보를 떠난 후 최남선은 출판인·언론인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학자로서의 삶을 본격화했다. ‘심춘순례’(1925), ‘백두산근참기’(1926), ‘금강예찬’(1928)을 발표하는 등 기행수필에서도 남다른 공적을 남겼다. 창작시조집 ‘백팔번뇌’(1926)와 고시조 1,000수 이상을 정리한 ‘시조유취’(1928)를 펴내 시조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에 힘썼으며 시조 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일제 말기에 친일 활동을 벌여 그를 아끼고 사랑한 동료 지식인들 안타깝게 여겨

최남선은 1928년 10월 총독부의 역사 왜곡 기관인 조선사편찬회에 촉탁 편수위원으로 들어가 조선 지성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에 대한 평가는 친일 행위이며 변절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지만 조선의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정립하고 ‘조선사’에 단군을 편입시킬 목적으로 편찬회에 들어갔다는 평가도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최남선은 일본이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최남선의 친일 활동은 거침이 없었다. 1936년 6월부터 1938년 3월까지 약 21개월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만주국의 기관지 ‘만선일보’의 고문과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 교수로 근무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1), 흥아보국단 준비위원(1941.8),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이사(1941.10)로도 활동했다. 1943년 11월에는 총독부의 요청을 받고 이광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 조선인 학병 독려 활동은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태평양전쟁을 성전이라고 강변하며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매일신보 등에 기고했다.

결국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1949년 2월 7일 이광수와 함께 반민특위 조사관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일제하 문화계의 양대 거목이 역사 법정에 끌려나가는 비극적인 순간을 맞았다. 최남선은 옥중에서 작성한 ‘자열서’에서 일제강점기 말엽 전시에 보인 자신의 행동을 ‘훼절’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방향 전환’이라고 변명했다.

6·25는 최남선의 집안에도 비극이었다. 큰딸은 인민군에게 피살되고 사위는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서울대 의대 교수였던 큰아들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전쟁 중 병사하고 막내아들은 월북했다. 막내 동생은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으로 퇴각하면서 사회 저명인사들을 끌고 갔다.

최남선은 종전 후에도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해온 ‘조선역사사전’ 집필에 몰두했다. 그러나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로 활동이 중단되었고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눈을 감았다. 장준하는 사상계 1957년 12월호를 최남선 특집호로 꾸미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 제목의 권두언에 최남선을 평생 ‘민족의 재흥(再興)’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유서가 깊었던 신문관과 조선광문회의 한식 목조 건물은 무분별한 도로 개발계획에 밀려 1969년 4월 27일 허무하게 허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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