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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 ⑨] 매사추세츠州 콩코드, 독립전쟁, 월든 호수, 헨리 소로, 랠프 에머슨, 나다니엘 호손, 올콧 집안

↑ 월든 호수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콩코드는 식민지인들의 첫 번째 내륙 정착지이자 美 정신사의 중심지

오늘의 일정은 매사추세츠주 콩코드(Concord)다. 이곳은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32㎞ 떨어진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이다. 콩코드는 1635년 식민지 시대 당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인들이 그들의 정착지 너머 뱃길이 닿지 않는 내륙 쪽에 건설한 첫 번째 내륙 정착지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콩코드는 보스턴의 서점이나 대학을 통해 문화적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이면서, 보스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콩코드는 도시 전체가 활기에 차고 아름답다. 집들도 대부분 저택이다. 특히 부러운 것은 집집마다 수 백년은 된 듯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집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목들마다 수관(樹冠·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려 있는 부분으로 원 몸통에서 나온 줄기)이 수려하고 수관 폭이 대충 10여m는 될 만큼 우람하여 집 전체를 감싸주고 지켜주고 꾸며주고 있다. 집집마다 집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성인 나무를 갖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역사성과 조형성과 찬란한 정신문화가 숨쉬고 있다.

콩코드 주변 항공사진

 

미니트맨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향토예비군

관광안내소를 찾아가 콩코드의 주요 관광지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나이가 지긋한 분이 지도를 꺼내 쭉 표시한 뒤 ‘미니트맨(Minute men)’들이 영국군에 맞서 승리한 독립전쟁 기념공원을 설명해주었다. ‘미니트맨’이 낯선 단어여서 무어냐고 물으니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외부 침입자가 몰려온다는 비상 소집통지를 받으면 바로 총을 들고 집결지로 달려가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마을을 지키는 농민자위대”라고 알려주었다.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1분 안에 출동한다고 해서 이름이 ‘미니트맨(Minute Men)’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향토예비군이 연상되어 금방 이해되었다.

4·19 의거일이 한국에서만 중요한 날인 줄 알았더니 미국에서도 1775년 4월 19일은 콩코드에서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날로 기념하고 있었다.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에서는 4월 19일을 ‘애국의 날(Patriots’ day)’로 기념하고 있고, 이날을 기념해 시작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어느덧 1세기가 넘었다. 콩코드 시민들의 봉기가 인근 렉싱턴, 보스턴으로 이어져 독립전쟁의 불길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콩코드는 미국 역사와 정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찾은 날에도 여러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독립전쟁의 의미와 선조들의 거룩한 희생을 배우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이 독립전쟁 당시의 복장으로 소총을 들고 행진하며 미국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설명하고 재현해보였다. 이 작은 마을 콩코드를 찾는 사람이 매년 100만 명이 넘는다니 콩코드야말로 미국 정신의 산실이자 성지다.

 

▲독립전쟁의 배경과 발발과 결과
직접적 원인은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습격사건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동원했다. 곧 북아메리카의 프랑스령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스페인으로부터는 플로리다를 빼앗았다. 그러나 영국은 막대한 전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자 식민지 제국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조세를 강화했다. 영국이 식민지에 설탕세, 인지세, 차세 등을 부과해 재정적 난관을 타개하려하자 식민지인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1773년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너새니얼 쿠리어의 석판화 ‘보스턴 항구의 차 폐기’(1846년 작)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강경 조치를 취했다. 보스턴항 폐쇄, 매사추세츠주 자치권 몰수, 재판권 회수, 본국 군대 주둔 비용의 식민지 부담 등의 강압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총독을 새로 임명하면서 군사령관을 겸임시키고 4개 연대를 보스턴에 파견했다. 그러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공동 대응에 나섰다. 전 식민지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본국 정부에 저항하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영국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 반란군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비축 무기를 몰수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1775년 4월 19일 새벽, 700여 명의 영국군 정규군을 렉싱턴 코먼 근처로 파병했다. 영국군이 당도하자 인근에서 출동한 80여 명의 미니트맨들이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며 맞섰다. 보스턴에 사는 전령병 폴 리비어가 밤새 말을 타고 달려와 영국군 출동 사실을 미리 미니트맨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니트맨들은 수적으로 불리해 영국군 장교의 해산 명령에 따르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총을 발사했다.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었으나 영국군인지 미니트맨인지는 불분명했다. 총이 발사됐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한 영국군 장교가 발사 명령을 내렸고, 영국군은 민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했다.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의 공유지에서 벌어진 첫 충돌은 순식간에 끝났다. 민병대원 8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영국군 피해는 사병 1명이 찰과상을 입은 데 불과했다. 영국군의 승리였다.

1775년 4월 19일 영국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이는 렉싱턴과 콩코드 주민들 그림. (1910년작, William Barnes Wollen)
독립전쟁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계속돼

영국군은 렉싱턴에서 미니트맨을 제압한 뒤 콩코드로 진격했다. 새뮤얼 애덤스와 존 행콕을 비롯한 반란군 지도자들이 도망친 곳, 민병대의 주요 무기고가 있는 곳이었다. 당초 계획대로 콩코드를 장악하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체포한다면, 보스턴과 매사추세츠의 저항은 종식될 터였다.

그러나 콩코드 상황은 렉싱턴과는 달랐다. 미니트맨들이 수적 열세를 감안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콩코드강의 노스브릿지 너머 작은 언덕 뒤로 집결해 관망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콩코드 시내를 샅샅이 수색했으나 작은 대포 몇 문 외에는 화약을 찾아내지 못했다. 폴 리비어에게서 미리 연락을 받은 미니트맨들이 무기를 이미 다른 곳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빈 무기고에 불을 질렀다. 불이 마을회관으로 옮겨 붙으면서 시내에 연기가 자욱했다. 그러자 멀리 노스브릿지 건너 언덕 위에 집결해있던 미니트맨들은 영국군이 마을에 불을 지른 것으로 알고 영국군과 맞서기로 했다.

드디어 교전이 벌어졌다. 대다수가 농부인 미니트맨들이 영국 정규군에 맞서 싸운 첫 전투였다. 미니트맨들이 점점 불어나 500여 명으로 늘어나자 당황한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퇴각했다. 미니트맨들은 1,000여 명으로 숫자가 늘어나자 퇴각하는 영국군을 추격하며 공격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99명이 사망하고 174명이 부상했다. 시민군은 54명이 사망하고 41명이 부상했다. 영국 정규군이 비정규 시민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독립전쟁은 1776년 3월 영국군과 1,100여 명의 보스턴 왕당파 인사들이 보스턴 항을 떠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1776년 7월 4일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으나 전쟁은 계속되어 1781년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항복하고 1783년 9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8년간 이어졌다.

노스 브릿지 (출처 콩코드시 홈페이지)

 

노스브릿지의 총성, 전 세계에 미국 독립의 고고성 알려

강물 위에 걸친 소박한 아치 다리 옆에서

그들의 깃발이 사월 미풍에 날렸다.

여기 한때 농부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쏜 총소리가 온 세상에 울렸다

(By the rude bridge that arched the flood,

Their flag to April’s breeze unfurled,

Here once the embattled farmers stood

And fired 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

에머슨의 집에서 건너다 보이는 콩코드강 위의 작은 다리 곧 노스브릿지에서 울린 총성이 전 세계에 미국 독립의 고고성을 알렸다는 에머슨의 시 <콩코드 찬가(Concord Hymn)>의 도입부다. 시의 제4행 ‘shot heard ‘round the world(총소리가 온 세상에 울렸다)’라는 구절은 가는 곳마다 들려주는 유명한 싯구다.

노스브릿지를 통해 콩코드 강을 건너면 드넓은 초원을 뒤로 하고 산뜻한 미니트맨 동상이 서있다. 오른손에는 총을 들고 왼손에는 쟁기 손잡이를 잡고 있는 미니트맨 동상은 농부이면서 군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노스브릿지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1875년 제작·봉헌되었다. 유명 조각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조각했다. 프렌치는 이후에도 워싱턴 DC의 링컨 동상, 하버드 대학교의 존 하버드 동상 같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동상을 제작했다.

미니트맨들이 초기에 진주했던 노스브릿지 너머 벌판 위 언덕에 세워놓은 간판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세상에 우리의 혁명보다 더 찬란한 운동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하고 고결한 정기로 충만했다”(호손)

“절대 왕정에서 제한된 왕정으로 그리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소로)

“어떤 혁명도 처음에는 한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이었다”(에머슨)

콩코드 올드 노스 다리 부근에 세워진 미니트맨 동상.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쟁기를 움켜쥐고 있다.

 

■콩코드 출신의 유명 문인들

콩코드는 아주 작은 동네인데도 비슷한 시기에 세계적 문인과 사상가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1804~1864),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브론슨 올콧(Bronson Alcott, 1799~1888), 루이자 메이 올콧(Louisa May Alcott, 1832~1888)이 그들인데 이들은 서로의 사상적 교류와 인간적 유대를 통해 19세기 중반 시대정신의 향도 역할을 했다.

에머슨은 이들 중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중심적 인물이었다. 그의 이층집은 지금도 보존되어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책을 많이 소장해 소로와 호손이 수시로 찾아와 책을 빌려 읽고 대화와 토론을 했다. 특히 소로는 에머슨이 방까지 제공할만큼 친분이 깊었다. 소로가 오두막을 지은 월든 호수의 땅도 에머슨의 땅이다. 에머슨은 목사였으나 일찍 사임하고 시와 문학작품을 쓰며 지냈다.

 

▲랠프 에머슨과 기념관
“좋은 성직자가 되려면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는 목사직 사임

랠프 왈도 에머슨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여 인터넷에 많이 떠다니는 글이기에 이곳에 옮겨적는다.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 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뙤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랠프 왈도 에머슨

 

에머슨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목사직을 수행하다가 “좋은 성직자가 되려면 교회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목사직을 사임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전복시키려 했다며 비난했다. 에머슨은 1838년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 신학대학교에서 한 연설 때문에 30년 동안 하버드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 연설에서 에머슨은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교인들의 영혼을 옥죄며, 교리만을 강조한다고 교회를 비난했다. 나 자신도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어 깊이 공감하며 그를 바라보게 된다. 한편으론 기독자는 ‘하나님 앞에서(In front of God), 하나님과 함께(With God) 그리고 하나님 없이(Without God)’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연상되었다. 에머슨은 그후 시인, 수필가, 강연자로 종교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하며, 많은 저작을 했다.

에머슨 하우스는 현재 에머슨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른 박물관 보다 빠른 4월 말 문을 열어 다행히 둘러볼 수 있었다. 하얀 2층집 한가운데 현관 지붕 위에는 미국 정신의 상징이라는 듯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우리 부부가 입장하자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1층 현관 거실은 매표소 겸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고 에머슨의 책이 벽면에 가득 꽂혀 있었다. 그 옆 응접실로 안내되어 앉자 가이드가 부드럽지만 빠른 영어로 에머슨의 일생과 역사 문화적 활동을 소개하고 각 방의 용도와 특징, 가구와 사진, 그림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영어가 짧은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입장객들을 위한 그녀의 직무인 것을.

 

책 빌려 읽고 토론과 대화를 하는 지적 아카데미

에머슨은 약 190여 년 전에 지어진 이 집을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둘째 부인과 살기 위해 1835년 구입했다. 당호를 ‘Bush(덤불숲)’라고 했는데, 지금은 단정한 잔디정원이지만 구입 당시에는 집 주변 삼 면이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월든 호수가 있는 숲으로 길이 나 있다.

에머슨 하우스

 

집과 각 방들은 에머슨 가족이 살던 모습 그대로 잘 보존·정리되어 있다. 에머슨이 저술하며 쓰던 책상을 비롯한 주요 가구들은 길 건너 편에 있는 콩코드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어 모조품이 비치되어 있다. 2층 서재는 그의 친구들인 소로와 호손, 기타 초월주의 회원들이 자주 드나들며 책을 빌려 읽고 토론과 대화를 하는 지적 아카데미였다. “집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은 자주 오는 친구들이다”라는 에머슨에게 좋은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에머슨의 친화력과 영향력 덕분에 많은 지성인들이 이 집을 드나들면서 지성의 전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소로는 에머슨의 가족처럼 방 한 칸을 빌려쓰며 에머슨 부부를 형님, 누님이라 부르며 서재를 이용했다. 에머슨의 아이들도 소로가 호숫가에서 만들어 온 나뭇가지 인형들을 받아들고는 기뻐하며 그를 따라 다녔다. 에머슨이 보던 책들은 현재 하버드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1872년 이 집에 큰 불이 났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에머슨의 책과 원고들은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먼저 날라주어 소실되지 않았다. 에머슨이 유럽과 이집트 여행을 떠난 사이 마을 사람들이 모금을 하여 이 집을 완전히 복구해놓아 에머슨에게 깜짝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는 1882년 죽을 때까지 약 50년간 이 집에서 살면서 수많은 시와 저서를 쓰고 초월주의 운동을 비롯 기독교 개혁, 노예해방을 주창하며 미국의 정신을 선도했다.

 

▲헨리 소로의 오두막
 소로가 은둔 생활을 한 것으로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그렇지 않아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 Thoreau)는 에머슨이 소유하고 있던 월든 호숫가 땅에 직접 오두막을 짓고 1845년부터 1847년까지 2년 2개월 2일 동안 살았다. 소로의 오두막 집터는 흔적이 사라져 잊혀졌다가 1945년 굴뚝 터를 발굴하면서 소로의 집터임을 표시하는 석주를 세워 놓았다. 집터 뒤에는 땔감을 쌓아둔 헛간이 있고, 오른편 아래쪽 호수로 난 길목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곳을 찾아온 순례객들이 소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놓고 간 돌들이 모여서 돌무덤을 이루고 있다. 집터는 호수에서 약간 걸어 올라가는 곳에 있다. 나즈막한 구릉이 둘러싸여 아늑한 그 곳의 아래쪽으로 호수가 펼쳐져 있고 옆길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면 슾지가 있는 숲속이 나온다.

헨리 소로

 

숲과 호수와 오두막만 있는 곳에서 이 철학자는 무슨 재미와 낙으로 혼자 살았을까? 그는 인류 문명이 인간에게 덕지덕지 붙여 놓은 물질주의, 안락함에 길들어진 나태함, 존재 보다 우선하는 소유 의식을 털어버리고 삶의 궁극적 모습을 경험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소로의 에세이집 ‘월든, 숲 속의 생활’(1854년)을 읽을 때는 그가 은둔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콩코드를 직접 찾아가 보니 호수가 마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고, 에머슨을 비롯한 많은 문인·사상가들과 서로 오가며 활발한 교류를 했기 때문에 은둔생활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로의 수필집 ‘월든(Walden)’은 초월주의 문학의 꽃이자 최초의 생태문학으로 불린다. 전원생활을 특유의 문체로 제시해 목가적인 삶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저자는 은둔자, 무정부주의자, 자연주의자로 불렸다.

 

소로에게 숲과 호수는 인생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수도원

소로가 살던 오두막은 지금은 겨우 터만 남아있고, 호수 입구에 ‘월든, 숲 속의 생활’(1854년)에서 묘사한 그대로 오두막집을 재현해 놓았다. 소로는 150년 전에 이미 커다란 집을 짓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돈을 벌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 돈 28달러 12센트로 비바람을 겨우 막을 정도의 집을 직접 짓고 평안하게 살았다.

소로 동상과 오두막집

 

집 안에는 난로와 침대, 작은 책상과 의자 세 개와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라고 했다. 그는 이 오두막에 칩거하면서 하루 4시간 이상 숲속을 사색하며 걸었다. 호숫가로 나가 배를 타고 새나 물고기를 관찰하고 자연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인간을 성찰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물질, 습관, 안락, 나태, 수동성을 버리면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직면할 수 있고, 오히려 정신적 풍요와 성찰이 찾아온다.

단순 소박하게 살면 인간은 더 편안하고 더 많은 정신적 풍요를 얻을 수 있는데도 무작정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다가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고 만다는 깨달음이었다. 소로에게 풍부한 자연을 품고 있는 숲과 호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자 인생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수도원이었다. 그는 교회에서 보다 숲에서 하느님을 만나기가 더 쉽다고 했다. ‘월든’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에게 영감을 주어 ‘이니스프리의 호도(The Lake Isle of Innisfree)’라는 작품을 쓰도록 했다. 소로의 수필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은 부당한 법에 대해 합법적인 개인이 불복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는 수동적 저항 이론을 담고 있어 20세기에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에세이 ‘월든, 숲 속의 생활’과 월든 호수
 현대인에게 많은 위안과 생각거리 던져줘

헨리 소로의 ‘월든, 숲 속의 생활(Walden ; or, Life in the Woods, 1854년)’이란 책은 시골 호숫가에서 쓰기 시작한 평범한 에세이집이다. 그런데도 현대인에게 많은 위안과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러기에 서점의 한쪽 코너에서 지금도 스테디셀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월든 호숫가에 4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단순하면서 고상하게 사는 법을 시연한 것이 오늘날 복잡하고 경쟁적인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누구나 실현 가능한 소박한 생활인데 왜 사람들은 따라하지 못하고 감탄만 할까?

저명한 소로 연구자 월터 하딩은 월든에 대한 다섯 가지 시각을 정리해 발표했다. 그것은 자연에 관한 박물학적 기록, 소박한 삶을 권면하는 삶의 지침서, 물질주의에 지배되는 현대적 삶에 대한 비판서, 탁월한 언어 예술 작품, 그리고 정신적 삶의 안내자로서의 시각이다.

월든 호수는 잔잔하고 맑은 물이 숲에 둘러싸여 있어 상쾌하고 아름답다. 평범하고 고즈넉한 호수인데도 소로의 명징한 사색의 세례를 받은 방문자의 눈에는 성지 분위기가 느껴진다. 호수 한가운데에 떠있는 고기잡이 배가 오히려 성스러움을 훼손하는 것 같은 불경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매년 60여 만명의 방문객이 찾는 순례 성지이면서도 무더운 여름에는 물놀이객들이 많이 찾는 놀이터이기도 하다.

월든 호수

 

호숫가 둘레로 2.4㎞의 산책로가 있다. 한 바퀴 돌아보니 30분 조금 더 걸렸다. 그런데 역사성에 비해 주변 숲의 나무들이 어린 나무들뿐이어서 의아했다. 나중에 월든호수보존협회의 팸플릿을 보니 월든 호수도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진행된 개발 회오리에 휩쓸렸다. 1866년 보트장, 야구장, 식당, 댄싱홀, 조깅 및 자전거 트랙 등을 지어 유원지로 만들었는데 1902년 불타버렸단다. 그 후에도 수영장과 수영강습 부속시설 등이 들어서는 등 심각한 훼손이 이뤄지다가 뜻있는 유지들의 보존 노력에 힘입어 1965년 국립 역사유적으로 지정되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래서 비교적 어린 나무들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나다니엘 호손과 목사관
‘미국과 초월주의의 탄생, 두 개의 혁명을 목격한 집’

콩코드에는 목사관(The Old Manse), 길가집(The Wayside), 과수원집(Orchard House)으로 불리는 18세기에 지어진 옛집들이 있다. 이 집들은 에머슨, 호손 그리고 올콧 집안에서 서로 사고 팔고 빌리면서 거주했던 집들로 서로 가깝고 에머슨의 집과도 불과 몇 백m 거리다.

목사관

 

‘목사관(The Old Manse)’은 에머슨의 할아버지(목사)가 지은 집이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된 콩코드 노스브릿지 전투를 이 집 창문 너머로 목격했을 정도로 ‘미니트맨 국립역사공원’과도 가깝다. 할아버지가 작고한 후에는 재혼한 할머니의 남편 에즈라 리플리 목사님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에머슨도 한때 의붓 할아버지와 함께 이 집에 살면서 자신의 명저 ‘자연(Nature)’을 저술했다.

1842년 나다니엘 호손이 이 집을 임차해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집 이름을 ‘올드 맨스’라고 불렀다. 맨스(Manse)란 스코틀랜드 말로 목사관을 일컽는다. 그러나 호손은 친구 소로가 텃밭도 일구어 주며 도와주었는데도 월세를 내지 못해 3년 만에 쫒겨났다. 이 3년 동안 호손은 20여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현재 국립역사유적지로 지정되었다. 건물 안내 간판에는 ‘미국의 탄생과 초월주의의 탄생, 두 개의 혁명을 목격한 집’으로 소개되어 있다. 목사관 뒤뜰에는 콩코드강이 휘돌아 흐르는데, 강가에 서있는 작고 낡은 헛간마저도 새봄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연한 수목의 잎들과 어울리니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다.

나다니엘 호손

 

호손은 콩코드에서 약 45㎞ 떨어진 세일럼(Salem)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에서 유명한 세일럼 마녀재판에 관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는 성을 바꾸었다. 원래의 성 ‘Hathorne’에 ‘w’를 첨가하여 ‘Hawthorne’으로 바꾸고 삶의 터전을 콩코드로 옮겼다. 이후 몇 차례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실향민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향을 늘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의 작품 ‘일곱 박공의 집’은 고향 세일럼을 무대로 하고 있다.

 

▲올콧 집안과 길가집-과수원집
당대 유명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유서깊은 집

‘길가집(The Wayside)’은 올콧 집안에서 1845년 구입할 당시의 이름은 ‘Hillside’였다. 1852년 올콧 집안이 콩코드를 떠나면서 호손에게 팔자 호손이 당호를 ‘The Wayside’로 바꿨다. 이 집은 훗날 아동문학가 마거릿 시드니(Margaret Sidney)의 소유가 되어 당대 여러 유명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유서깊은 집이 되었다. 오래되어 허술해 보이지만 제법 입체적이고 규모있게 멋을 냈다. 이 3층집도 나와는 인연이 없는지 6월에 개장한다며 문이 닫혀 있어 허탕치고 돌아섰다. ‘주홍글씨’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호손의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올콧 집안은 ‘길가집’을 팔고 보스턴으로 이주했다가 콩코드로 다시 돌아와 1858년 약 1만 5,000평의 과수원이 딸린 18세기 초의 집을 사고 택호를 ‘Orchard House(과수원집)’라고 붙였다. 올콧 집안 사람들은 작은 언덕의 푸른 숲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이고 짙은 회색의 단정한 대칭형인 이 이층집에서 약 20년간 살았다.

한때는 ‘길가집’으로 불리다가 한때는 ‘과수원집’으로 불렸다.

 

이때 올콧 집안 사람들의 구성원은 아모스 브론슨 올콧(Amos Bronson Alcott)과 부인 아비가일 메이 올콧(Abigail May Alcott) 그리고 루이자 메이(Louisa May)를 비롯한 세 딸이 있었다. 또 한 명의 딸 엘리자베스(Elizabeth)는 이 집에 이사하기 몇 주 전에 사망했는데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베스 마취(Beth March)의 모델로 등장한다. 올콧 식구들은 정원과 과수원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채식주의자였다. 노예해방, 여성참정권, 사회개혁 등의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브론슨 올콧은 에머슨, 소로, 호손과 사상적 교류를 깊이 하며 여러 저서를 남겼다. 과수원집 옆에 직접 지은 ‘The Hillside Chapel(언덕가 교회)’에서는 성인교육센터 ‘콩코드 철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창고같이 지어진 검은 목조건물에서는 1977년 철학학교가 부활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 집안 출신으로 또 한 명의 저명인사는 루이자 메이 올콧이다.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sisters)’이 대표작이다. 어린 시절 독서량이 부족했던 나는 전혀 모르는 소설인데, 울각시가 ‘작은 아씨들’이란 책이 한국에서도 많이 읽힌 책이고 영화로도 여러 번 나왔는데 왜 모르냐고 핀잔을 준다. 이 아담한 고옥에 들어서면 매표소 겸 기념품점이 있고, 올콧 집안에서 사용하던 오리지날 가구들을 포함해서 19세기 중반의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루이자 메이 올콧
▲메인주로 출발!

짧지만 알찬 일정이었다. 역사와 자연이 모두 아름다운 콩코드에서 하루 더 머물며 렉싱턴과 세일럼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오늘도 다음 목적지로 떠나야 한다. 이젠 미국 역사 공부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즐기는 여행을 할 것이다. 매사추세츠주를 떠나 미국 지도에서 가장 동쪽 꼭대기에 위치한 메인주로 출발한다. 대서양의 맑은 해변을 구경하기 위해 오건퀴트(Ogunquit)로 간다. 콩코드로부터 이동거리 83마일, 소요시간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이제부터라도 날씨가 도와줘야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을텐데…. 자 미국 동쪽 대서양 해안을 남북으로 잇는 주간고속도로 95번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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