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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 ⑤] 매사추세츠주 데덤 정착촌,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 보스턴 커먼, 킹스 교회, 올드 사우스 집회소, 폴 리비어의 집, 퀸시 시장 등

↑ ‘보스턴 커먼’ 공원. 1634년 조성된 미국 최초의 공공공원이라는 역사성이 있다. ‘프리덤 트레일’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매사추세츠주

 

▲데덤 정착촌

 

청교도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이상향적 공동체로 50년 가까이 순항

우연히 묵게된 데덤(Dedham)이란 동네는 보스턴에서 전철을 이용하면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마을이다. 귀국 후 알고보니 매우 의미가 깊은 역사적이고 거룩한 도시였다. 1620~1630년대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해 온 초기 퓨리턴들의 신앙 정신이 이주민들의 계속적인 증가로 점차 세속화되었다. 그러자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일단의 사람들이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물색했다. 코네티컷의 뉴헤이븐,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덴스 등이 그런 곳인데, 그중 가장 전형적인 지역이 데덤 정착지였다.

데덤 정착촌 창설자들은 순수한 청교도 신앙과 이상향적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식민지 정부에서 새 정착촌 건설 허가를 받아냈다. 이들은 신앙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로 결의하고 1636년 여름, 1차로 30여 가구가 보스턴 서남쪽 변두리 구릉지에 200여 평방마일의 정착 토지를 불하받아 정착을 시작하면서 지역명을 데덤이라고 정했다. 정착자들은 엄격한 자체 심사를 거쳐 선발되었고 공동체적 삶의 내용과 형식을 엄격히 규정한 서약서에 서명했다.

데덤의 정착촌에 위치한 페어뱅크스 집(Fairbanks House). 퓨리턴 정착민인 조나단 페어뱅크스가 1636년 지은 집으로 현존하는 목조집 중 북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서약서는 하나님을 경외·경배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바탕으로 모든 약속과 계약이 이뤄져야 하며, 모든 주민은 이 서약에 복종한다는 일종의 신앙고백 형식으로 시작된다. 이와 같은 공동체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입주할 수 없다. 입주했더라도 퇴출당하는 폐쇄적 공동체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신앙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토지는 공동의 경작지, 산림, 목초지와 개인 명의의 주택용지와 텃밭으로 분배했으나 소유권 보다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지향했다. 이웃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분쟁 내용을 의무적으로 공개하고 타인의 원만한 중재를 따르도록 함으로써 평화 유지와 양보 정신을 살려나가게 했다. 따라서 데덤 정착촌은 하나님 중심의 이상향을 지향하는 폐쇄적, 집단적, 자치적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초기 정착민들의 자녀들이 성장하고 세속화되면서 이상의 날개 접어

초기 정착촌에서는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신앙 집회가 매주 금요일마다 개인 집을 돌아가며 열렸다. 서로간의 이해와 친목도 다지면서 교회 설립을 준비했다. 교회는 외부 권위에 의지하기 보다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에 의거해 설립하는 회중교회 형태를 지향했다.

교회 설립 작업은 정착지 이주 후 거의 2년 만에 시작되었다. 먼저 설립위원을 선정한 후 오랜 기간에 걸쳐 그들의 신앙고백을 듣고 신앙 체험을 서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수개월에 걸친 합심기도와 토론 끝에 설립위원 중 한 사람을 설교자로, 또 한 사람을 장로로 선출하여 교회를 출범시켰다.

데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유토피아적 데덤 공동체는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공동체로 50년 가까이 순항했다. 그러나 드높은 이상과 결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불완전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초기 정착민들의 자녀들이 성장하고 세속화되면서 분열하고 마침내 이상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데덤 정착촌의 실험과 시도는 다른 퓨리턴 마을보다 오랫동안 지속되고 의미도 있었다. 이 거룩한 전통의 땅 데덤에 묵게 된 것도 내겐 의미있는 것이었으나 빠듯한 일정 때문에 그 유산들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보스턴 시내

 

뉴욕이 미국의 첨단 중심도시라면 보스턴은 뉴잉글랜드 6개주의 중심도시

일요일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보스턴 시내로 향했다. 거리는 20마일, 소요시간 25분이다. 무조건 내비게이션에다 하버드 대학을 선택하고 보스턴 시내로 진입했는데 무슨 일인지 시내 입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어린 학생들이 끝도 안 보이는 줄을 지어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차가 지나갈 수가 없을 정도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무슨 행사인지도 알 길이 없어 차의 방향을 돌려 다른 길로 들어섰는데 내비게이션은 길이 잘못됐다고 계속 빽빽댄다. 어느 정도 가다가 다시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길로 들어섰지만 다시 학생 무리를 만나서 나아갈 수가 없다. 내려서 물어보니 무슨 환경운동대회가 있어서 오전 내내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며 돌아가는 길은 자기도 모르겠단다. 난감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가는 여행의 딜레머는 중간에 갑자기 길이 막히면 갈 길을 잃고 주변을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오로지 특정 방향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보스턴 지도

 

고민하다가 행선지를 바꿔 구도심인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서야 겨우 길을 빠져 나왔다. 구도심에 들어가니 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가로변 주차장은 모두 만원이다. 공짜로 주차해 보려고 도심을 몇 바퀴 돌았지만 허사였다. 주차 빌딩을 찾아 10시간 주차권을 끊어서 주차하고 관광을 시작했다. 다음 날에는 아예 호텔에서 전철 시간표를 얻어서 전철을 타고 하버드 대학이 있는 케임브리지역에 내렸더니 주차 걱정도 없고 한가해서 좋았다.

뉴욕이 미국의 첨단 중심도시라면 보스턴은 뉴잉글랜드 6개주의 중심도시이자 심장이다. 1630년 청교도들이 건설한 보스턴은 자유와 자치를 소중히 여기는 상공업자, 자영농민, 어부, 선원들의 도시였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18세기 후반에 미국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했다. 19세기에는 열렬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보스턴은 애국심이 무척 강한 듯하다. 보스턴은 그런 자부심을 기억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기여를 잊지 않기 위해 독립혁명으로 이르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을 연결해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자유의 여정을 뜻하는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이다. 보스턴 관광의 핵심인 ‘프리덤 트레일’은 대부분 전쟁 영웅 기념탑과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묘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따라서 ‘프리덤 트레일’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기록인 동시에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전사(戰士)들의 방명록이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

 

‘보스턴 커먼’은 1634년 조성된 미 최초 공공공원

프리덤 트레일은 보스턴의 역사 유적지를 연결하여 보행로 위에 붉은색 칠이나 벽돌로 표시해 놓아서 쉽게 따라 갈 수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의 풍상과 발자국으로 인해 희미한 곳도 자주 있어 몇 번은 이리 저리 헤맸다. 붉은 선을 따라가면 대부분 전쟁 참여 군인들의 묘지, 전쟁 기념탑, 전쟁영웅들의 동상, 전쟁과 관련된 교회와 건물들, 전함 USS 컨스티튜션(Constitution)호 등을 볼 수 있고, 보스턴의 구시가지도 대부분 볼 수 있다.

프리덤 트레일 코스

 

약 4㎞ 정도의 프리덤 트레일의 출발점은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이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공원이지만 1634년 조성된 미국 최초의 공공공원이라는 역사성이 있다. 초기에는 방목장이나 군사훈련장으로 활용되었다. 마녀 처형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독립혁명기의 수많은 항쟁의 집회를 거쳐 최근의 반전 데모에 이르기까지 보스턴의 온갖 영욕의 역사가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독립전쟁 중에는 매사추세츠주 미들섹스카운티에 있는 콩코드에까지 출동했던 영국군의 주둔 캠프로 사용되기도 했다.

보스턴 커먼

 

오늘도 무슨 NGO 행사인 듯 너른 잔디밭 곳곳에는 대형 천막이 쳐져있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있다. 하늘에는 오색 풍선이 줄에 매달려 있고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무대에서는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이들과 구경하는 이들이 둘러서 있다. 곳곳에서 옛날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북을 치며 행진하고 있다.

매사추세츠 주청사는 공원 옆 비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휴일이라 청사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청사 내벽은 매사추세츠의 역사를 벽화로 장식하고, 그레이트 홀에는 매사추세츠주의 351개 시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도열되어 있단다.

매사추세즈 주청사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미 국가가 처음 불려진 곳, 킹스 교회는 보스턴 최초의 영국 국교회 건물

공원 끝자락 지하철역 앞에는 우아하고 좁다란 하얀 첨탑을 높이 세운 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가 있다. 미국 국가가 처음 불려지고, 1831년 교회 강단에서 노예제 반대 성명을 발표한 곳이다. 마침 주일이어서 예배에 참석했는데 성찬식까지 함께 했다. 교회 옆 그래너리 묘지(Granary Burying Ground)에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3명(존 핸콕, 새뮤얼 애덤스, 로버트 패인)을 포함하여 독립전쟁의 영웅들과 보스턴 학살의 희생자 등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부모들이 묻혀있다.

그래너리 공동묘지

 

묘지를 나와서 트레몬트가를 왼쪽으로 따라가다가 바로 다음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스쿨 스트리트로 들어서면 육중한 석조 건물인 킹스 교회(King’s Church)가 보인다. 1688년 영국 왕 제임스2세의 명령으로 보스턴에 처음 세워진 영국 국교회 건물이다. 영국 국교회를 반대하여 생명을 걸고 멀고 험한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왔던 청교도들은 당연히 국교회의 건립을 열렬히 반대하였으나, 청교도 자치 식민지를 폐지하고 국왕 직할 식민지로 재편하여 총독을 파견하고 왕권강화 정책을 편 국왕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당초에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750년 경 현재와 같은 인테리어를 간직한 화강암 교회당으로 개축되었다. 독립전쟁 중 대부분의 왕권파 교인들이 영국이나 캐나다 노바스코시아로 떠나자 1782년 다시 문을 열어 신학적으로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따르고 의식은 국교회를 따르는 절충식 교회로 탈바꿈했다.

킹스 교회(왼쪽)와 파크 스트리트 교회

 

킹스 교회 옆에 또 하나의 작은 묘지공원이 있다. 1630년 이곳에 처음 정착한 청교도들이 조성한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이다. 이곳에 매사추세츠 식민지 건설의 주역이자 최고 지도자였던 존 윈스럽의 묘가 있다. 국교회가 싫어서 목숨을 걸고 온갖 고생을 하며 식민지를 개척하였는데 죽어서 다시 국교회 옆 묘지에 누워있는 아이러니가 새삼스럽다. 국교회 건설을 반대한 청교도들이 교회를 지을 부지를 팔지 않고 버티자 할 수 없이 동네 공동묘지 옆에다 국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이다.

존 윈스럽의 묘지. 윈스럽은 매사추세츠 식민지 건설의 주역이자 최고 지도자였다.

 

올드 사우스 집회소는 영국의 차 과세에 항거하기로 결의한 장소

다시 붉은 트레일선을 따라 가니 작은 벽돌 건물인 올드코너 서점이 있다. 1704년 창간된 식민지 최초의 신문 ‘뉴스레터’, 1719년 설립되어 독립혁명 기간 중 영국 정부 측을 비판한 논설을 게재하여 혁명의 불씨를 살려나간 ‘보스턴 가제트’ 등의 팜플렛이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이름은 서점이지만 사실은 인쇄소 겸 출판사이다. 19세기 초엽에는 에머슨, 소로우, 호손 등 콩코드 지역 문인들의 작품을 출판한 ‘티크너와 필즈’ 출판사가 이곳에 있었다.

다음은 교회 건물처럼 첨탑을 세운 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가 나온다. 영국의 차 과세에 항거하기로 결의한 장소로 유명하다. 1763년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드디어 유럽을 선도하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하였으나, 막대한 전비 지출로 부채더미에 올라 앉게되자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재정수입을 증대하려고 했다.

올드 사우스 집회소(왼쪽)와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주청사)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설탕세, 인지세, 차세 등을 부과하여 재정 난관을 타개하려 하자 식민지인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1773년 12월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수입한 차를 실은 3척의 배가 보스턴항에 입항했다. 보스턴 식민지인들은 총독에게 이 배를 그대로 영국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식민지인들은 올드 사우스 집회소에 모여 총독과 영국 정부를 성토했다. 그리고 인디언 복장을 하고 선창으로 달려가 정박하고 있던 배에 난입하여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에 내던졌다. 이것이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이다. 당시 보스턴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5000여 명의 군중이 이곳에 모여 혁명 지도자들의 사자후를 들으며 성토와 시위를 이어나갔다.

너새니얼 쿠리어의 석판화 ‘보스턴 항구의 차 폐기’(1846년 작)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옛날 주청사)에서는 1776년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발코니가 유명

다음 만나는 곳은 붉은 벽돌로 단아하게 지은 3층 건물에 3층의 흰 첨탑을 얹은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Old State House , 옛날 주청사)이다. 원래는 읍 청사(Town House)였는데, 1711년 화재로 전소되자 1712년 새로 지어 의사당 겸 주지사 청사로 쓰던 건물이다. 보스턴에서 공공건물로서는 현존하는 오래된 건물의 하나다.

식민지 당시는 교회 지도자들이 대개 지역사회 지도자 역할까지 맡아 공동체 행정을 맡고 신앙을 제일로 앞세우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행정 청사들이 교회 건물과 비슷하고 첨탑까지 달려있다. 주청사에서는 1776년 독립선언서가 보스턴 사람들에게 낭독된 발코니가 유명하다.

이 건물의 오른편 교차로 한 가운데가 1770년 영국 주둔군의 발포로 5명이 희생된 ‘보스턴 대학살’ 현장이다. 보스턴 대학살은 계속되는 식민지 과세로 본국 정부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항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세관을 경비하고 있던 영국군 병사 사이에 언쟁이 발생하고 이 와중에 성난 군중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영국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식민지인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다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본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 식민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독립 후 청사는 비콘힐의 신청사로 옮겨갔다.

보스턴 대학살 현장 그림. 뒤 건물은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옛날 주청사)다. 헨리 펠함이 조각하고 폴 리비어가 판화했다.

 

다시 콩그레스가를 곧장 따라가니 패뉼홀(Faneuil Hall)이다. 피터 패뉼이 보스턴시에 기증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아래층은 가게로 쓰고 윗층은 집회장으로 사용하여 자유의 산실 역할을 했다. 독립혁명 전후에 보스턴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서 현안을 논의하고, 토론을 벌이고, 행동을 결의했다. 이곳을 ‘자유의 요람(Cradle of Liberty)’이라 일컫는 이유다.

 

퀸시 시장, 160년 역사의 재래시장을 재개발한 곳

갑자기 생기가 돌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패뉼홀 앞에 1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을 재개발한 퀸시 시장(Quincy Market)이 있기 때문이다. 홀 앞에는 독립혁명을 주도한 새뮤얼 애덤스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기단 한 쪽에 “부패와 두려움을 모르는 정치가(A stateman, incorruptible and fearless)”라고 새겨있다.

약간은 지루한 미국 역사 탐방을 하는 중에 시장을 만나니 반가웠다. 두 개의 긴 건물로 된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다양한 스낵 음식이 있고 활기찬 시장 분위기와 이벤트를 볼 수 있는 장터가 있다.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호객하는 상인들과 길게 줄을 서서 이것저것 골라 먹으며 즐거워하는 관광객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그런데 각시는 역시 음식 박사다. 뉴잉글랜드 지방에는 차우더가 유명하다며 듣도 보도 못한 차우더 가게로 나를 끌고 간다. 역시 차우더 가게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그릇 같이 속이 빈 빵(Bread Boul)에 차우더를 붓고 빵뚜껑을 덮어서 들고 간다. 우리도 이 재미있는 빵그릇에 클램 차우더를 채워 달래서 2층 식사 테이블로 가서 빵그릇을 찢어 차우더를 찍어 먹으며 아픈 다리도 쉬고 점심도 때웠다. 클램 차우더란 게 먹어보니 대합조개 크림스프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장 곳곳에서 들리는 상인들의 목청 높인 호객 소리가 기운을 북돋워준다.

퀸시 시장

 

폴 리비어, 美 독립전쟁 때 연락병으로 맹활약

다시 붉은 트레일 선을 찾아서 따라 가니 독립전쟁 영웅의 집 폴 리비어의 집(Paul Revere House)이 나온다. 프리덤 트레일의 여정에 유일하게 포함된 개인 주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인 올드노스 교회(Old North Church)가 있다. 폴 리비어의 집은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암회색 목재로 지어진 2층 집이다. 17세기 후반 식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곳에서 하노버 스트리트를 따라 북쪽으로 300미터쯤 올라가면 기마동상이 나타난다. 한참을 달려온 듯 말은 가쁜 숨을 내쉬고, 기수의 표정은 심각하다. 폴 리비어다. 프리덤 트레일은 기마상에서 붉은 벽돌 위로 하얀 첨탑이 인상적인 올드 노스 교회로 이어진다.

폴 리비어의 집

 

이 모든 이야기는 영국의 압제로부터 시작된다. 영국 주둔군은 렉싱턴과 콩코드를 타깃으로 정했다. 혁명 지도자인 새뮤얼 애덤스와 존 행콕이 은신해 있고, 반란군의 무기가 숨겨진 곳이었다. 몇 개월 전부터 혁명 세력도 영국군의 군사행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스턴 전역에 소위 감시자들을 배치해 영국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폈다. 폴 리비어는 감시 조직의 책임자였다. 그는 보스턴의 성공한 은세공업자이자 판화가였다. 폴 리비어는 독립을 지지하는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애덤스, 행콕의 정치적 동지였다. 또한 보스턴 장인 사회의 존경받는 리더였다. 애덤스와 행콕이 영국군을 피해 보스턴 외곽으로 도피한 상태에서 도시를 책임져 줄 적임자였다.

보스턴에서 렉싱턴-콩코드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처음부터 육로를 통해 가거나, 바다를 통해 찰스턴에 내린 후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진격을 렉싱턴-콩코드에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올드 노스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랜턴을 달기로 했다. 육로로 움직이면 1개, 바다로 이동하면 2개. 랜턴이 걸리면 영국군의 이동을 알리는 파발마들이 여러 곳에서 렉싱턴과 콩코드를 향해 달릴 터였다.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 주둔군이 렉싱턴과 콩코드의 민병대를 급습하려고 접근했다. 올드 노스 교회 꼭대기에는 랜턴이 2개 걸렸다. 리비어는 작은 배를 타고 찰스턴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부터 말을 타고 렉싱턴을 향해 내달았다. 그 유명한 ‘한밤의 질주(Midnight Ride)’의 시작이었다. 가는 동안 폴 리비어는 주민들에게 영국군의 진격을 알렸다. 렉싱턴에 도착한 폴 리비어는 애덤스와 행콕을 깨웠고, 그들을 무사히 콩코드로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영국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리비어를 비롯한 전령들의 활약으로 혁명 리더들은 피신에 성공했고, 민병들은 속속 콩코드로 모여들었다. 작전 개시 다음 날인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첫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건 식민지 민병대였다. 런던의 내각이 오합지졸이라 무시했던 식민지 민병들이 천하무적이라 자부하던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전의 승리였고, 그 주역은 폴 리비어였다. 메신저 즉 전령의 역할이 이같이 위대한 영웅적 행위로 부각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당시 올드노스 교회에 걸렸던 등불은 ‘자유의 등불(Liberty Light)’로 명명되어 콩코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폴 리비어는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미국과 함께 성장했다. 은세공업자에서 산업혁명 초기의 기업가로 변신했다. 그의 공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사회에 필요한 교회용 종과 군대용 대포를 비롯한 각종 제품을 생산했다. 그는 혁명 동지였던 애덤스나 행콕 등과 달리 정치에 투신하지 않았고, 평생을 기업가로 살았다. 정치가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위대한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Paul Revere’s Ride’(1860년)란 시를 쓰기 전까지는. 리비어의 스토리는 롱펠로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한 편의 시가 됐다. 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며 신화가 됐다.

폴 리비어의 동상. 뒤는 올드 노스 교회다.

 

올드 노스 교회 안에 들어가니 좌석을 가족 지정석(pew)으로 임대하여 낮은 흰 칸막이를 할 수 있게 하고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넓은 면적을 할당하여 개인 취향에 따라 칸막이 장식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이했다. 교회 앞에는 말을 탄 리비어의 동상이 양 옆에 커다란 수목들을 나란히 도열시킨 채 서 있다.

찰스강을 건너는 찰스타운 브릿지는 철난간이 새까맣게 녹슬어 흉물같이 보이는데도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보존·사용하고 있어서 이들의 역사 보존 의식에 감탄했다.

찰스타운 브릿지
전함 ‘USS 컨스티튜션호’, 해상에 떠있는 선박 중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

노스엔드 부둣가의 끝자락에 가면 1797년 이곳 보스턴에서 오크 나무로 건조한 거대한 전함 USS 컨스티튜션(Constitution)호가 건너다 보인다. 이 배는 33전 무패의 무적함대로 유명하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영국 군함의 집중적인 포격에도 거뜬히 버티자 “저 배는 철갑을 둘렀다”라고 외쳤다고 해서 ‘Old Ironsides’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함 USS 컨스티튜션호((USS Constitution)

 

현재 바다에 떠있는 선박 중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라는데 배 안을 둘러보려면 신분증을 제시하고 주머니를 다 털어 전자검사대를 통과하는 부산을 떨어야 한다. 갑판 위로 솟은 세 개의 거대한 돛대와 연결된 수 백개의 팽팽한 줄들이 엉키지도 않고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고 있어 죽고 죽이며 험악했던 과거 역할과는 무관하게 멋있는 신사처럼 보였다.

프리덤 트레일의 종점은 67m의 화강석 오벨리스크 탑으로 된 벙커힐 기념비(Bunker Hill Monument)다. 독립전쟁 발발 초기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벙커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탑은 돈 많은 사람들이 희사하는 거금은 사양하고 일반 사람들이 내는 작은 성금을 십시일반으로 거둬서 건립하느라 17년이나 결려서 1843년에 완공되었다. 벙커힐 전투는 콩코드와 렉싱턴에서 패퇴한 영국군이 보스턴으로 철수하여 찰스강을 경계로 식민지군과 장기간 대치하던 중 발발했다.

1775년 6월 식민지군이 영국군을 압박하기 위하여 영국군 주둔 항구에서 가까운 브리즈힐에 약 50m 길이의 진지를 구축하자 영국군은 보급품을 공급받는 루트인 항구마저 뺏길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세한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함으로써 진지를 빼앗고 식민지군을 벙커힐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승리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영국군 전투 병력의 약 40%에 육박하는 1,054명의 사상자가 났다. 식민지군은 140명이 사망하고 301명이 부상당했다. 식민지군은 전투에서 결국 졌지만, 영국군에 큰 타격을 주고 애국시민군의 저항의지를 오히려 키워주어 길게 보아서는 진 전쟁이 아니었다.

벙커힐 기념비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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