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백두산 정계비 설치

지금은 중국 땅에 속해 있는 간도(間島)는 예로부터 중국과 한국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던 황무지였다. 처음 이 곳에서 힘을 세운 세력은 여진족이었다. 1636년 청을 세운 그들은 자신들이 성지로 여기는 이 지역에 이민족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봉금(封禁)정책을 폈다. 1627년(인조5년) 조선과 국경을 획정하는 ‘강도회맹’을 맺었으나 여전히 조선 사람과 청나라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잇따르자 청 황제 강희제가 1712년(숙종 38년) 오라총관 목극등을 파견, 양국간 경계를 분명히 하도록 지시했다.

조선은 박권에게 일을 맡겼으나 목극등이 “100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며 박권을 따돌린 채 조선의 하급 관리인만을 대동하고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5월 15일, 목극등은 백두산 천지 동남쪽 4㎞ 지점에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의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정계비에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정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고 씌어졌다. 토문강을 쑹화강(松花江) 상류로 여겨온 조선인들에게 정계비 내용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백두산 동쪽으로 흐르다 땅 밑으로 복류했다가 다시 땅위로 나와 쑹화강과 합쳐지는 것이 토문강이었기 때문이다. 양국은 복류하는 지역에 목책·석퇴·토퇴를 쌓아 국경을 분명히 했다.

백두산 정계비 이후 국경분쟁은 수그러들었으나 1869년∼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어 조선 사람들이 대거 간도로 이주하면서 다시 표면화됐다.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국경회담을 열었지만 ‘정계비와 주변에 설치된 목책·석퇴의 위치를 근거삼아 토문강을 경계로 해야한다’는 조선정부와 ‘토문·도문(圖們)·두만은 모두 같은 강’이라는 청의 입장차가 커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일본이 끼어들어 일본·청 간의 ‘간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봉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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