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날 것 같던 박동선 사건, 싱겁게 끝나
해방 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한미관계는 어느 정도 우여곡절과 갈등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협조와 우호의 관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리고 균열이 생겼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독재정치에 실망했고, 한국은 미국이 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69년의 닉슨독트린 후 오히려 지상군을 철수하기 시작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
박정희 정부는 이런 양국의 갈등이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직접 미 의회를 상대로 로비공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폭발한 것이 한미관계를 벼랑까지 몰고 간 ‘코리아 게이트’ 이른바 ‘박동선 사건’이었다.
사건은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지 기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는 “FBI와 연방대법원이 박동선과 한국계 공작원이 미 의원 20명 이상에게 금품을 제공한 사실을 조사 중”(10월 15일), “박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등이 90여 명의 전․현직 의원에게 50만~100만 달러의 뇌물 뿌려”(10월 24일)라고 상세히 보도했다.
이 보도가 있기 전에도 워싱턴포스트는 수 차례 박동선에 대해 보도했다. 1975년 3월 17일자에서는 조지타운 클럽을 무대로 한 박동선의 사교활동을 큼직한 사진과 함께 소개했고, 7월 27일에는 ‘박동선은 수수께끼의 한국인’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그럼에도 당시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박동선은 보도를 묵살했고 이후 1년 동안은 언론도 비교적 잠잠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0월 24일의 워싱턴포스트 보도는 미 정보기관의 수사가 이미 상당 부분 진전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실제로 보도가 있기 전인 1976년 9월 박동선은 법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 조사가 있기 전인 10월 6일 박동선은 미국을 빠져나갔다.
한국 정부, ‘청와대 도청’한 미국 향해 되레 큰소리 쳐
워싱턴포스트가 관련 기사를 연속적으로 터뜨리자 뉴욕타임스를 비롯 다른 언론사들도 뒤질세라 기사를 쏟아냈다. 반면 한국의 신문이나 방송은 정부의 보도 통제로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했다. 한국 신문은 12월 28일에야 처음 박동선 사건을 보도했다.
당시 미국 신문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내에서 장기집권 하고 있는 박정희 정권이 밖으로까지 손을 내밀어 미국에 부도덕한 손길을 뻗쳤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일부 행정부 관리와 의원들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워싱턴포스트의 첫 보도가 있고 11일이 지나서야 “이 사건은 한국 정부와 관계없는 일이며 박동선이 개인사업을 위해 벌인 로비”라고 발표했다. 물론 해외 통신사만을 상대로 한 발표였다. 한국 정부는 전반적으로 수세에 몰려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도 한 가지 사실에서만은 미국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도청이었다. 근거는 1976년 10월 27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한국 정부는 1971년부터 5년 동안 꾸준히 로비를 벌여왔으며 증거는 미 CIA가 청와대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는 보도 내용이었다.
도청 보도는 두 가지 점에서 미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한국 정부의 로비 사실을 증명하려면 도청 자료를 근거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미국의 주권 침해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점이 첫 번째였고, 미 법원이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도청 자료만으로는 박동선의 뇌물 제공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두 번째였다. 결국 박동선의 직접 증언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만 확인된 채 도청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