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 적군파 ‘아사마 산장’ 인질극

1968년 1월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기항저지 투쟁, 1969년 1월의 도쿄대 야스당 강당 공방전 등으로 맹위를 떨치던 일본 학생운동이 소수화․과격화로 내몰리면서 다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주목한 것은, “혁명은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교토대생 시오미 다카야의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관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관동파가 대립한 끝에 관서파가 결국 당 중앙위에서 제명당했다. 관서파는 200여 명의 조직원을 기반으로 ‘공산동(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를 결성(1969.9)했다. 적군파는 화염병과 폭탄으로 경찰시설을 파괴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산중에서 무장훈련 중이던 주력부대 53명이 검거되고 1970년 3월 시오미 의장마저 체포되어 조직은 사실상 와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요도호 납치가 결정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자 적군파는 1971년 7월 공산당계 지하조직인 인민혁명군과 함께 ‘연합적군‘을 결성한 뒤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경찰이 이들의 아지트를 급습한 것은 1972년 2월 16일이었다. 그러나 5명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2월 19일 도쿄 북쪽의 피서지인 미나미 가루이자와의 아사마 산장에 침입했다.

그들은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삼아 경찰과 인질극을 벌였다. 9일 동안의 설득에도 투항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2월 28일 오전 10시 200여 명의 경찰 특공대가 산장에 투입되었다. 범인들은 8시간 동안의 총격전 끝에 오후 6시 15분 쯤 모두 검거되었다. 일본 적군파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런데 경찰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일본 열도를 들끓게 했다. 그해 초 내려진 소집령에 따라 산악지대에 모인 29명 가운데 15명이 같은 조직원들 손에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살해 이유도 거창한 사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소한 트집 때문이었다. 자아비판 과정에서 연애 경력 등을 이유로 동료를 간단히 죽음으로 내몰고 임신부까지 처형한 극한적 잔혹상에 일본 국민은 치를 떨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