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국내 첫 라디오방송국 ‘경성방송국’ 개국

당시 용어는 라디오방송이 아니라 무선전화방송

1920년 11월 2일 오후 6시, 세계 최초 라디오 정시 상업방송이 미국에서 시작되고 1924년 10월 일본에서 도쿄방송국이 설립되는 등 주요 국가마다 방송국이 속속 개국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라디오방송 바람이 불었다.

1924년 11월 29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기자들을 상대로 체신국(현 광화문 KT 빌딩) 안에서 방송 실험을 하고, 1924년 12월 10일 일본전보통신 경성지국이 체신국에서 쏘아 올린 방송 전파가 미쓰코시 포목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에 설치된 나팔형 전기확성기(스피커)를 통해 음악으로 울려 퍼진 것은 이 땅에 도래할 라디오 시대의 개막 팡파르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방송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 방송 형식을 갖춘 것을 기준하면 최초 방송은 1924년 12월 17일 민간방송국 설립을 위해 시도한 조선일보의 시험방송이었다. 그날 서울 관철동의 우미관 앞에는 아침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무선전화방송 실험을 보고, 듣고, 느껴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1주일 전 일본전보통신 경성지국이 체신국에서 방송 전파를 쏘아 올리고 미쓰코시 포목점 3층에서 이 전파를 받아 음악으로 들려준 바 있어 이날의 조선일보 방송은 ‘우리나라 최초’라기보다는 ‘민간 최초’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순수 한국인이 주관하고 방송 형식을 그런대로 갖췄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라디오방송이라고 하지 않고 무선전화방송이라고 칭했던 조선일보의 이 방송은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하루 세 차례씩 이어졌다.

 

방송 형식을 갖춘 최초 방송은 조선일보의 시험방송

3일간 아나운서 역할을 한 사람은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였다. 12월 17일 하루동안 독자(11시), 여성(1시), 일반인(3시)을 상대로 세 차례 방송을 진행한 최은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일보가 수표동 납작한 기와집에 있을 적이었다.… 사장실이 송신기를 장치한 임시 방송실이었다. 벽과 창에… 광목 휘장을 들여서 방음장치를 하였고… 둥글넓적한 마이크가 방송실 복판에 놓였으며 안테나도 옥상에 세워져 있었다.”

당시는 라디오 수신기가 보급되지 않았을 때여서 조선일보는 시내 우미관 극장에 대형 확성기를 설치해놓고 일반인들이 객석에 앉아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일보 라디오를 들어보려는 인파는 서울은 물론 인천·수원·개성·의정부 등지로부터 수천 명이 몰려왔다.

첫날 1회 행사 때 조선일보 사장실에서 진행된 이상재 사장의 연설과 이동백 씨의 단가가 멀리 우미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자 시민들은 신기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로 첫 방송을 축하해 주었다. 오후 1시에 시작된 2회 행사 때는 윤극영의 동요 ‘반달’,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 정악 전습소원의 관현악 합주, 조동석 씨의 단소 독주가 이어져 청중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첫날 2회 행사가 용산에 있던 일본 육군 무선전신국에서 나온 강한 전파로 방해를 받게 되자 18일 저녁부터는 경성공회당(옛 소공동 서울상공회의소 자리)으로 장소를 바꿔 방송했다.

조선일보는 서울 성공에 이어 인천·수원·개성·영등포 등지에서도 방송 공개 시험을 했다. 1925년 11월 1일부터는 울산·경주·포항 등 영남권 30여 개 지역을 도는 대규모 순회방송도 했다. 조선일보가 이렇게 방송에 열심이었던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민간방송국을 개국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일보를 포함해 11개 단체가 신청한 방송국 설립은 허가하지 않고 경성방송국만 허가해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을 꿈꿨던 조선일보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경성방송국’은 우리나라 최초 라디오방송국

1925년 3월 22일 일본 최초의 도쿄 라디오방송이 개국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방송국 ‘경성방송국’이 발기인 총회를 연 것은 1926년 2월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설립을 주도하고 이사장도 일본인이었으나 개국 직원 중에는 몇몇 한국인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과 마현경 부부, 이옥경과 노창성 부부가 있다.

최승일은 ‘프로듀서 국내 1호’로, 마현경은 ‘경성방송국 공채 아나운서 1호’로 한국 방송사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옥경은 1926년 7월부터 체신국 무선방송소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1927년 1월 특별채용되었다. 이옥경과 경성방송국 기술부 직원 노창성 사이에 태어난 딸이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다.

경성방송국은 1926년 12월 서울 중구 정동 1번지(현 덕수초등학교)에 2층 건물을 준공하고, 2개의 안테나 철탑을 설치한 뒤 1927년 1월부터 틈틈이 시험방송을 내보냈다. 그리고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일본어로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로 시작되는 첫 라디오 전파를 쏘아 올리면서 한국 방송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옥경은 첫 방송 때 일본인과 나란히 우리말로 방송하는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옥경은 ‘조선인 최초 라디오 아나운서’인 셈이다. 호출부호는 일본에 할당된 호출부호 ‘JO’에 일본의 4번째 방송국(도쿄 AK, 오사카 BK, 나고야 CK)이라는 의미로 ‘DK’를 붙여 ‘JODK’가 부여되었다. JODK의 주파수는 690㎑였고 출력은 1㎾였으며 방송 장비는 영국 마르코니사 제품이었다.

방송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총 17시간 동안 할 예정이었으나 장비와 인력 부족으로 시간이 불규칙했다. 초기에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7 대 3의 비율로 방송하다가 조선인의 불만이 커지자 1927년 7월부터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6 대 4로 조정했다. 막상 방송국은 개국했으나 더 큰 문제는 비싼 청취료와 고가의 수신기였다.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원이었을 때 2원의 청취료는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혼자 들을 수 있는 미약한 수신기는 10∼15원, 한 가족이 들을 수 있는 수신기는 100원, 고급 수신기는 4,000원이나 호가해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면 수신기를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개국 당시의 청취 계약자는 조선인 275명을 포함해 모두 1,440명에 불과했다.

 

라디오 청취하려면 대문 밖에 청취 허가장 붙여야 해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는 계약 내용도 까다로워 계약자는 대문 밖에 청취 허가장을 붙여야 했다. 이처럼 비싼 청취료와 고가의 수신기로 인한 라디오 보급률의 저하, 조선어·일본어 혼합 방송에 따른 청취자 불만 등의 문제로 경성방송국은 급기야 경영난에 빠졌다. 원인이 수신기 보급의 정체에 있다고 진단한 경성방송국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각기 따로 방송하고 지방 방송국을 세우는 것으로 타개책을 세웠다.

조선어 방송은 1932년 12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현 서울시 연희동)에 10kW급 연희송신소가 준공되면서 가능해졌다. 이때 들여온 방송 장비는 일본이 자체 기술로 처음 만든 장비라고 해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900㎑의 경성 제1방송(일본어)과 610㎑의 경성 제2방송(조선어)으로 분리된 역사적인 2중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33년 4월 26일이었다.

조선어 방송이 독립되고 이후 라디오 수신기 보급까지 활발해지면서 경성방송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1933년 8월 현재 라디오 청취 허가자는 모두 2만 5,126명이었고, 이 중 조선인은 4,118명이었다. 라디오 청취자가 늘어나자 도청이 극성을 부렸다. 조선일보 1933년 5월 29일자는 “라듸오가 일상생활에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됨에 따라 불법 청취자가 늘어가는 경향이 있어… 감시원을 집집마다 조사케 하고 있다”고 전했다. 적발되면 ‘무선전신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1,000원 이상의 벌금에 처해졌다.

당시 라디오의 인기는 하늘을 찔러 악기점에서 틀어주는 라디오의 ‘짜쓰(재즈)’를 듣기 위해 인파가 몰리자, 경찰이 ‘교통 방해’를 이유로 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조선일보 1932.2.13). 또 택시와 버스에도 라디오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경찰은 “그렇지 않아도 교통사고가 많은 이때, 더 많은 교통사고를 낼 염려가 있다”며 불허 방침을 밝혔다.(조선일보 1935.9.10).

경성방송국은 지방에도 라디오방송국을 속속 설립한 후 1935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된 지방 방송국은 1945년 해방 당시 총 16개로 늘어났다. 경성중앙방송국은 해방 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47년 9월 미국 애틀랜타의 국제무선통신회의가 ‘HL’을 한국의 호출부호로 할당함에 따라 일본식 ‘JODK’에서 한국식 ‘HLKA’로 바뀌었다. 다채널 라디오 시대가 열린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방송 기독교방송(CBS)이 개국한 1954년 12월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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