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기타고 세계로

[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 ⑫] 버몬트주, 우드스탁, 퀘치 협곡,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공원,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 캘빈 쿨리지 대통령 농장, 잔디의 미학

↑ 퀘치 협곡(Quechee Gorge). 바위산 정상이 양쪽으로 쪼개져 그 사이로 최고 50m 깊이의 협곡이 형성되었다.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버몬트주

▲우드스탁(Woodstock)

 

중후한 멋을 지닌 아름다운 작은 도시

오늘은 버몬트주의 우드스탁(Woodstock)이다. 이곳은 동네 이름만 떠올리면 목재만 쌓여있을 것 같은 산골 이름 같아도 중후한 멋을 지닌 아름다운 작은 도시다. 일찌감치 영국 총독의 면허를 받아 카운티의 행정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쏟아지는 장대비가 아침에 잠깐 멈추는 듯 해서 중앙로를 한 바퀴 돌며 산책했다. 잘 단장된 집들과 멋진 디스플레이로 한층 멋을 뽐낸 가게들, 그리고 짜임새 있는 도시 배치와 오타퀴치강(ottauquechee river)의 운치 있는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중심 지역을 한 바퀴 도는 데 30분도 안 걸렸다.

우드스탁 시내

 

길가에 세워진 간판 하나도 세련된 디자인과 우아한 장식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평범한 집들도 창가와 외벽에 세심하게 배치된 장식들이 앤틱 박물관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계속 내리는 비로 세차게 흘러내리는 좁은 강을 가로질러 에치빔을 놓고 땅과 빔에 걸쳐 지어놓은 집이 애교스러운 파격을 보여줘 괜히 즐겁다.

버몬트주의 중심을 남북으로 가르며 솟아 있는 그린 마운틴의 계곡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개천과 강을 만들어 다리도 많다. 작은 다리에는 제각각 특색있게 만든 지붕을 씌워서 독특한 인상과 미감을 준다. 지붕이 있는 다리를 ‘커버드 브릿지(Covered Bridge)’라고 하는데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과 색칠을 해놓아 인상적이다. 그러다보니 모든 커버드 브릿지를 찾아다니는 관광코스도 있다.

우드스탁 시내의 오타퀴치강에 걸쳐 있는 허름한 커버드 브릿지도 카메라 셔터를 유혹한다. 게다가 오색 딱따구리가 다리 옆 나무를 요란스럽게 쪼아대고 있어 나를 환영하는 듯 하다. 마을 한가운데는 연륜을 자랑하는 교회와 그 옆 하얀 도서관이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있다. 비가 내린 이른 아침이어서 행인은 거의 없지만 집집마다 울긋불긋 화사한 꽃들을 심어놓은 화분이 현관과 낮은 담장에 놓여 있어서 걷는 이를 즐겁게 한다.

커버드 브릿지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 역사유적 공원

 

자연보호의 역사적 스토리와 토지 소유자의 책무를 일깨워주는 공원

우드스탁의 대표적 관광상품은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 역사유적 공원(Marsh-Billings- Rockefeller National Historical Park)이다. 잔뜩 기대를 하고 부지런히 찾아갔더니 이곳도 어김없이 메모리얼 데이 즉 현충일(5월 마지막 월요일)부터 문을 연단다. 뉴잉글랜드의 많은 관광지가 6월부터 10월까지 문을 연다. 그만큼 겨울이 길고 추워서 그렇겠지만 정말 중요한 곳을 보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대신 앞집의 빌링스 팜 박물관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비싼 입장료만 내고 소똥 냄새만 맡고 돌아 나왔다.

빌링스 농장

 

이곳은 전통적 영국식 목장으로 말, 양, 젖소 등이 너른 들판에서 사육되고 있었는데 현재는 전문적 사육 농장이라기 보다는 관광 교육용 목장으로 운영되는 것 같다. 과거 목장의 모습과 낙농기구들, 농부들의 생활상과 주거형태가 밀납 인형과 사진 등으로 전시되어 있다. 주로 유치원 아이들이 단체로 설명을 듣고 동물을 만져보고 마차를 타보고 있다.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공원은 자연보호의 역사적 스토리와 토지 소유자의 책무를 일깨워주는 대표적 공원이다. 약 70만 평의 숲이 잘 관리되어 자연자원의 보존, 교육, 휴양, 관광등에 잘 활용되고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이 긴 것은 이 숲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세 사람의 이름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원 이름이 긴 것은 세 사람의 이름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

그 첫 번째 인물이 조지 퍼킨스 마쉬(George Perkins Marsh, 1801~1882)다. 마쉬는 자기집 농장인 이 숲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키웠다. 외교관이 되어 유럽을 돌면서 인간의 개발 행위가 얼마나 자연을 황폐화시키는지를 수없이 목도하고 1864년 환경운동의 고전적 저서 ‘인간과 자연 (Man and Nature)’을 저술했다.

왼쪽부터 조지 퍼킨스 마쉬, 프레데릭 빌링스, 로렌스 록펠러

 

두 번째 인물은 프레데릭 빌링스(Frederic Billings, 1823~1890)다. 그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쉬 시절에 변호사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큰돈을 벌어 마쉬 가족의 농장을 인수했다. 남북전쟁 직후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버몬트로 물밀듯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1800년대 중반 버몬트의 숲이 수없이 남획되어 침식되고 황폐화되었다. 빌링스는 후세에 현명한 숲 관리자의 모델을 남기기 위하여 농장을 조성하고, 과학적 숲 관리 프로그램을 미국 최초로 개발했다. 그가 죽은 후 빌링스의 플랜은 그의 부인과 세 딸이 이어받았고, 그 후에는 손녀딸 매리 프렌치(Mary French)에게 이어졌다.

세 번째 이름은 로렌스 록펠러(Laurance S. Rockefeller, 1910~2004)다. 록펠러는 빌링스의 손녀딸 매리 프렌치와 결혼해서 이 숲과 인연을 맺었다. 원래 록펠러 가문은 20개 이상의 국립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해 온 자연애호 가문이었다. 로렌스 록펠러도 그 가문의 자연사랑 정신을 타고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 5명의 자문역으로 활동하면서 자연보존과 야외 레크레이션을 필수 국가 어젠다로 삼도록 노력했다. 결국 매리와 로렌스는 그들의 우드스탁 농장을 국가에 기증하여 버몬트주 최초의 국립공원인 마쉬 빌링스 록펠러 국립공원을 설립했다.

 

명품 숲과 정원을 가꿔 국가에 헌납한 부자들 덕분에 산골 깡촌이 명품 도시로 거듭나

공원이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공원 입구에 있는 저택과 정원을 외부에서 둘러볼 수는 있었다. 1800년대 앤 여왕 시대풍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3층 저택은 흰색 창호를 단 붉은 벽돌집으로 마쉬의 아버지가 1805~1807년에 지은 것이다. 집 앞에 서있는 독일가문비나무가 우람한 가지를 땅에까지 드리우고 있어 그 늠름한 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옛 장원들의 품격은 앤틱 스타일의 건축양식, 역사를 안고 자라온 아름드리 수목, 묵은 세월의 흔적이 합쳐서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원 입구의 록펠러 저택(왼쪽)과 정원

 

저택 안에 있는 옛 가구들과 인테리어, 각종 풍경화 콜렉션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간직하고 저택 앞길을 가로질러 벨베데레 테라스 정원으로 갔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이태리식 정원과 방갈로를 쫒기듯 둘러보았다. 아직 개장 전이라 정원이 가꾸어지지는 않았지만 봄 기운에 수목과 화초들마다 생기가 가득했다. 입구에는 초봄인데도 깊은 산중 숲으로 들어가는 듯 녹음이 우거진 침엽수들이 늘어서있다. 그 너머로 톰산(Mount Tom)으로 가는 약 30여㎞의 마차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볼 시간이 없어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세상 모든 일과 자연까지도 사람을 잘 만나면 명품이 되고, 잘못 만나면 공해가 된다.

마차길

 

우드스탁은 이름 그대로 옛날에는 벌목 마을이었다. 모두들 돈을 벌기 위해 원시 숲의 거목들을 벌채하여 목재로 팔아 넘기면서 주위의 산들이 남벌로 황폐화되어갈 때,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부자들이 대를 이어가며 명품 숲과 정원을 가꾼 뒤 국가에 헌납한 덕분에 산골 깡촌 우드스탁이 명품 도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빌링스 부부는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는 열정에 더하여 미국의 자연 풍경을 가장 미국적으로 표현한 허드슨강파 풍경화를 비롯한 많은 그림들을 수집하고 고옥에 가득 수장함으로써 후세에 길이 빛나는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이 저택의 미술품 감상만 하여도 이 먼 동네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있을 정도이나, 우리는 입장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떠나야 했다.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

 

우리나라의 대관령 길이나 한계령 길과 비슷

이번 여행의 반환점을 도는 셈인데 비가 너무 자주 내린다. 날씨 변덕을 피해 그냥 하는 일 없이 쉴 수만 없는 것이 단기 여행자의 숙명이다. 비가 그치기만을 기원하며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는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 드라이브에 나섰다. 버몬트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그린 산맥의 동쪽 사면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아름다운 산세를 감상하며 달리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대관령 길이나 한계령 길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뚫고 먼저 89번 주간고속도로를 타고 약 80㎞ 이상 북쪽에 있는 스토우(Stowe)로 단번에 가서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며 경치를 구경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퀘치 협곡, 산 아래의 강이 산 정상을 절반으로 쪼개 만들어져

우드스탁 동쪽의 퀘치 협곡(Quechee Gorge)에 들렀다. 뾰족한 바위산 정상이 양쪽으로 쪼개져 그 사이로 최고 50m 깊이의 협곡이 형성되고 이 협곡이 오타퀴치강으로 흐르면서 절경을 만들어냈다. 하이웨이가 퀘치 협곡 정상을 지나게 되어있다.

협곡 정상에 있는 여행안내소에서 알려주는 대로 산 아래로 난 길을 겨우 찾아 내려갔으나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을 내려다 볼 수는 없었다. 실족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펜스를 길게 쳐놓아 펜스 너머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계곡 하류까지 내려가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발길을 돌려 다시 하이웨이로 올라갔다. 계곡을 건너는 하이웨이 차도의 다리 난간을 통하여 내려다 보는 것이 가장 높은 곳에서 협곡을 내려다 보는 최상의 위치였다.

퀘치 협곡

 

어떻게 산 아래의 강이 산 정상을 절반으로 쪼개서 그 사이로 흐를 수 있을까? 1만 3000년 전 빙하작용으로 바위가 쪼개졌다고 한다. 쪼개진 바위산 틈새로 흐르는 강물은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에너지도 공급해준다. 우드스탁은 이 폭포와 저수댐을 이용해서 동력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공장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사진을 몇 장 찍고나니 잠시 멈추었던 비가 다시 후두둑 내리기 시작한다.

우드스탁 근처에 각시가 매우 좋아하는 유명한 빵집이 있다. 아더왕 제분소(King Arthur Flour)다. 비가 내리는데도 주차장에 차가 빽빽했다. 들어가보니 제빵기구와 빵 재료가 진열되어 있다. 규모가 좀 크긴 한데 왜 관광명소로 소개되는지는 모르겠다. 자료를 보니 이 회사는 22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제분회사로 표백하지 않은 최고 품질의 밀가루를 생산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임금님표’ 쌀과 비슷한 상표인 것 같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샌드위치를 사서 먹었는데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다운 드라이브길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왕복 2차선의 길 양옆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 그리고 다양한 모양과 색으로 초록의 여백에 포인트를 주는 집들이 조화롭고 정다웠다. 버몬트가 대부분 낙농업에 종사하는 곳이기에 집들은 가축과 관련 사료와 도구를 함께 수용할 수 있게 높고 크게 지어졌다.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

 

하이웨이는 깊은 협곡 바위들 사이를 헤집고 달리기도 하고 넓은 초원을 두르고 있는 원만한 산들을 배경으로 달리기도 한다. 비가 이렇게 심하게 오지 않았다면 초봄의 여린 파스텔톤의 색들로 눈이 부셨을텐데 많이 아쉽다. 5월의 뉴잉글랜드 대부분의 초원은 초록색 잔디와 노란색 민들레꽃이 황홀한 조화를 이루며 눈을 즐겁게 한다.

버몬트주의 최고봉은 맨스필드산이다. 그곳에 있는 스토우(Stowe)는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다. 중간에 워터베리(Waterbury), 웨이츠필드(Waitsfield), 그랜빌(Granville), 로체스터(Rochester), 피츠필드(Pittsfield)를 거쳐 킬링턴(Killington)까지 내려가는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는 즐거운 드라이브길이다.

비가 내려 시야가 우중충했지만, 비를 흠뻑 먹으며 푸르러가는 수목과 잔디가 행복해 보였다. 중간에 그랜빌에서 본 모스 글렌(Moss Glen) 폭포는 수량 자체가 워낙에 풍부한데다 마침 쏟아지는 빗물까지 더해져 그 장대한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다 보았다.

모스 글렌 폭포

 

뉴햄프셔주가 화이트 마운틴 관광이라면 버몬트주는 그린 마운틴 관광

약 2시간이 걸리는 드라이브 길의 도로포장 상태는 불량했지만,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천천히 달렸다. 마치 드라마 ‘초원의 집’이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속으로 들어가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눈이 정말 호강했다. 뉴햄프셔주가 화이트 마운틴 관광이라면 버몬트주는 그린 마운틴 관광이다.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 드라이브는 미국인들이 아름답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곳이지만 내 눈에는 그 정도로 감흥이 크지는 않다. 산이 많고 산과 산 사이로 난 도로를 많이 달려본 한국인에게 이 도로는 아름답지만 이국적이지 않고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을 단풍길, 겨울 설경, 그 외에도 철 따라 변하는 풍경과 굽이굽이 동네마다 갖추고 있는 볼거리를 둘러보지도 않고 빗속의 단순한 드라이브만으로 도로를 평하는 게 조심스럽다.

버몬트주와 뉴햄프셔주는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면적, 기후, 사투리, 생업(스키와 관광)도 비슷해서 종종 쌍둥이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두 주는 아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버몬트주의 산들은 비교적 온화하고 기복이 완만하며 곳곳에서 나타나는 목장들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반면 뉴햄프셔주는 주 전체가 하나의 숲이다. 전체 면적의 85%가 숲이고 나머지는 호수이거나 아예 숲이 들어설 수 없는 수목한계선 위이다. 때때로 마을이나 스키리조트가 나올 뿐이다.

 

▲버몬트 플리머스
쿨리지 대통령의 특이한 취임식

 

드디어 해가 밝게 비추는 아침을 맞는다. 먼저 아름다운 소도시 킬링턴을 차로 대충 한바퀴 돌아보고 플리머스에 있는 미국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의 생가로 향했다. 다시 버몬트 100번 하이웨이를 따라 내려가면 남쪽으로 15마일 약 25분 거리에 있다. 물론 이곳 플리머스는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와 다른 곳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 플리머스가 많다는 것이다. 한 사이트에 따르면 미국에만 플리머스가 18곳이나 된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

 

쿨리지는 미국 역사상 버몬트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이다. 그는 부통령으로 재직할 때 워런 하딩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혹은 덕분에 졸지에 대통령이 되어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희귀한 취임 과정을 거쳤다. 부통령일 때 마침 생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하딩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해 한밤중 새벽 2시 43분에 호롱불을 켜고 바로 여기서 지역 공증 변호사였던 아버지 입회 하에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미국 대공황 직전의 대통령이라 공과의 평가가 많이 엇갈린다. 작은 정부, 자유방임주의 정책이 경제의 활력을 살렸다는 긍적적인 평가가 있긴 하지만 적절한 규제로 경제를 통제하지 못해서 결국 미국 경제의 버블이 터져서 대공황에 빠지게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연 이틀간 많은 비가 내린 뒤라 하늘은 맑다 못해 새파랗다. 날씨는 갑자기 여름이 온 듯 더웠다. 생가에 도착하니 아니나다를까 현충일(5월 마지막 월요일)부터 개장한다고 한다. 실망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농장 안으로 들어가 밭을 매고 있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멀리서 왔는데 개장을 하지 않아 실망이 크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걱정하지 말고 둘러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준다.

 

쿨리지 대통령 농장

쿨리지가 태어난 집은 앞에 보이는 기념품 가게 뒤 건물이고 4살 경에 바로 길 건너 집을 새로 지어서 그 곳에서 자랐으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주 찾아와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서 기념품 가게 2층 홀에서 댄스파티를 열었단다. 또 여름휴가 때면 이 농장이 여름 백악관이 되어 업무를 이곳에서 보았으며 주요 인사들이 너무 많이 들락거려서 농장 한쪽에 3개의 단칸 오두막이 있는데 거기에 몰래 가서 숨어서 쉬기도 했다며 깔깔대며 웃었다.

쿨리지 대통령 생가

 

할머니는 당시에는 이 농장이 이 동네 플리머스의 중심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농장 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고 생가 뒤편에 있는 플리머스 치즈공장이 마을에서 가장 큰 작업장이었으며 쿨리지 대통령은 죽어서 농장 입구에 있는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며 자세한 설명을 줄줄이 이어간다. 쿨리지가 취임할 때 사용한 호롱불과 서약한 성경, 테이블 등이 농장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대통령 집안은 당시 대단한 부농이었던 것 같다. 그 대단한 재력이 있었기에 이런 깡촌에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농장은 오늘날 주정부가 사들여 버몬트주에서 관리하고 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기억하며 이 넓고 아름다운 농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부자들의 재산이 대를 물려가며 개인 소유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적절한 보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20세기 초의 농촌 마을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드넓은 초원이 당시에는 밭으로 사용되었겠지만 현재는 잔디밭 초원으로 아름답게 관리되고 있다. 그 넓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잔디밭이 어느 곳은 평지로 어느 곳은 낮은 언덕을 이루며 파도치듯 펼쳐져 있다. 그 끝에는 울창한 숲이 그린 마운틴답게 둘러싸고 있다. 초원 사이로 흐르는 시내와 호수에서 오리들이 유유히 노니는 평화로운 풍경 속에 관람객이라고는 철모르고 찾아 온 우리 부부 두 사람 뿐이다.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는 중에 또 한 아주머니가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며 말을 걸어온다. 나는 이번 여행 중에 비가 너무 와서 힘들었다고 말하며, 5월이 이곳에서는 우기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우기가 아니라 금년이 특별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곳은 겨울에는 건조하지만 봄이 되면 간간히 오는 비가 땅을 적셔주어 밭도 매고 정원도 가꿀 수 있어 비가 매우 반갑다고 말하다가 여행자에게는 불편할 것이라고 겸연쩍게 덧붙인다.

문득 쿨리지 대통령 부부의 일화가 생각나 적어본다.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는 말이 있다. 쿨리지 대통령이 아내와 농장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농장의 한 농부가 그곳의 수탉이 하루에 12번이나 교미를 한다고 하자, 놀란 영부인이 농부에게 “대통령에게도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 말을 들은 대통령이 반격하듯 농부에게 물었다. “매번 같은 암탉과 하나요?” 농부의 답은 “아니요, 매번 다른 암탉과 합니다”였다. 그러자 쿨리지 대통령이 한 말. “그 말을 내 아내에게 해주세요.” 정리하면 쿨리지 효과란 새로이 등장한 대상을 향해 성적 욕구를 나타내는 현상을 지칭하는 심리학 용어다.

‘쿨리지 효과’에 등장하는 닭들

 

상쾌한 날씨에 푸른 초원 위에 펼쳐진 옛날 부농의 농장을 기분 좋게 둘러보고 이제 버몬트주의 남부 도시 맨체스터로 갈 차례다. 다시 버몬트주 100번 도로를 찾아서 남쪽으로 48.5마일 약 1시간20분의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잔디의 미학

 

잔디밭 위에 있는 모든 사물은 아름답고 생기 있어

이번 여행에서 날마다 감탄한 것이 잔디밭이다. 서양은 잔디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언제 어는 곳을 가든지 대지는 잔디로 덮여있다. 나는 서양의 땅에는 잔디가 저절로 자라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저렇게 잔디가 깔려있다고 생각했었다. 이토록 풍부한 푸른 초원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목축업이 발달했다고 생각했다. 지평선이 아득한 평원은 물론 스위스 산정까지 온통 초지가 덮여있다. 잔디밭 위에 풀을 뜯고 있는 소떼의 모습을 우리는 목가적 풍경이라고 부르며 평화를 연상한다.

잔디는 모든 미학의 바탕이다. 잔디밭 위에 있는 모든 사물은 아름답고 생기가 있다. 잔디밭 위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만 서있어도 아름답고, 여러 그루가 무리지어 서있어도 아름답다. 잔디밭 위에는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만 피어있어도 아름답고, 100년 묵은 아름드리 느릅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르며 서있어도 아름답다.

잔디밭에 둘러쳐진 엉성한 나무막대 울타리는 단순한 경계나 포장이 아니고 아름다운 오브제가 된다. 잔디밭은 비워도 아름답고 채워도 아름답다. 5월의 맑은 날 경계가 보이지 않는 넓디 넓은 잔디밭에 노랗게 봉긋봉긋 피어난 민들레꽃의 군무는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화려한 꽃들로 가득찬 꽃밭에 드문드문 드러나 보이는 잔디는 신선한 아름다움이다.

뉴잉글랜드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잔디

 

무질서도 잔디 위에 올려놓으면 질서로 바뀌어

잔디밭에는 돌맹이 하나가 놓여있어도 의미가 되고, 작은 야외식탁과 의자가 놓여있어도 의미가 된다. 잔디로 덮여있는 마을공원에 놓인 벤치 위에서 아기를 안고 담소하는 부부의 모습도 그림을 감상하듯 감동이 몰려온다. 잔디밭 언덕 아래로 이어진 호숫가에 매여있는 작은 배의 풍경은 평화 그 자체이다.

잔디밭은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아름답다. 소박한 집 옆에 붙은 손바닥 만한 잔디밭에 심어놓은 빨간 장미 한 송이만으로도 훌륭한 정원의 기품이 보인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으로 보인다. 지저분한 가축도 잔디밭 위에 올려놓으면 목가적 풍경화가 된다.

무질서도 잔디 위에 올려놓으면 질서가 된다. 탱글우드 음악공원의 넓은 잔디밭 위에 제멋대로 무리지어 앉아서 음악연주를 감상하는 모습 자체가 질서이고, 잔디밭 위에서 펄펄 뛰며 강한 비트에 몸을 맡기고 흔들어대는 젊은이들의 몸놀림도 질서가 된다. 잔디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시각적으로는 배척하지 않는다. 잔디는 모든 시각적 존재의 친구이다. 잔디와 어울리지 못하는 물체는 없다. 잔디는 여백이면서 내용이다. 잔디는 바탕이면서 초점이다. 잔디는 스스로를 드러내면서도 은근히 남을 도드라지게 한다.

뉴잉글랜드를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보는 모습이 잔디 깎는 모습이다. 그들이 왜 잔디 깎는 일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제야 그 해답을 찾았다.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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