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기타고 세계로

[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①] 연재를 시작하며, 영국의 신대륙 이주사, 뉴잉글랜드 초기 형성기

↑ 뉴잉글랜드 위치

 

by 김정일

前 금융인·수원 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 [美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15회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6개주는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뉴햄프셔, 버몬트, 메인

미국의 뉴잉글랜드 여행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동부 미국인들이 즐겨찾는다는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의 아름다운 자연을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봄날에 만끽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식민지 개척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독립의 기운이 싹트고 독립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흔적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 역사의 치욕이라 할 수 있는 노예제의 폐지를 외치며 남북전쟁을 주도한 곳이 바로 뉴잉글랜드였기에 이번 여행에서 미국의 역사까지 재미있게 둘러볼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신세계에서,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 땅에 건설해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끝에 마침내 이룩한 도시들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미국의 정신, 미국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 활동하던 현장을 방문한 것은 그들의 책을 읽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진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다.

뉴잉글랜드 6개주 구분

 

뉴잉글랜드는 미국 북동부 지역의 6개주, 즉 매사추세츠주, 코네티컷주, 로드아일랜드주, 뉴햄프셔주, 버몬트주, 메인주를 일컽는다. 이중 매사추세츠만(灣) 일대는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간난신고 끝에 처음 도착한 미지의 땅이었다. 점점 이주자가 늘어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근 지역으로 주거지가 확대되고 자치가 실현되었다. 미국의 본격적인 태동이었다.

초기 이주자들은 절대 지배자를 배제하고 조심스럽게 주민 상호간 협약을 맺어 주민자치를 실현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독특한 국가 시스템을 뿌리내렸다. 나는 이곳에서 위대한 역사, 숭고한 신앙, 진실한 선각자들, 최고의 대자연을 한꺼번에 만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뉴잉글랜드는 자동차 여행의 적지(適地)

뉴잉글랜드는 뉴욕주와 붙어있는 미국 북동부 지역이다. 다소 생소하지만 우리가 흔히 들어온 미국사의 상식, 즉 메이플라워호, 플리머스, 독립전쟁, 남북전쟁, 청교도 등을 떠올리면 곧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곳은 자동차 여행의 적지(適地)다. 넓디 넓은 미국 땅에서 자동차 여행을 하려면 관광지 간 이동거리가 길고 그래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운전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정력을 소모하는데 반해, 뉴잉글랜드는 소규모 면적의 주가 옹기종기 몰려 있어 이동거리가 짧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관광지가 곳곳에 많다. 다양하고 기품있는 숙박시설이 산재해 가성비가 높다는 것도 장점이다. 컬럼버스가 인도를 찾아가려고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세계사를 바꾼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그 대서양도 실컷 만끽할 수 있다.

대서양 해안을 따라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바라보는 광경은 실로 가슴 벅차다. 애팔래치아 산맥이 남북으로 이어지며 형성한 산악지대가 뉴잉글랜드 지역을 관통하면서 만들어낸 미국 최고의 휴양지 모습과 전설적 이야기들은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말로만 듣던 거대한 호수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들어보지도 못한 호수들이 뉴잉글랜드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어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상상을 초월한다.

애팔래치안 산맥 (출처 브리태니커 사전)

 

뉴잉글랜드가 이처럼 유서깊고 멋진 관광코스인데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이 지역을 제대로 안내하는 책이 별로 없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그럼에도 기억과 메모에 의존한 내 여행기가 엉뚱한 내용을 기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이 없지는 않다. 영어가 짧은 내가 듣고 해석한 내용이라 잘못 전달할 수 있겠다는 걱정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뒤따르는 여행자들이 지적하고 정정해 주면 되지 않겠나 하는 배짱으로 여행기를 쓴다.

이번 여행은 딸의 미국 대학 졸업식 참석 길에 기획된 것이면서 나의 직장생활 38년을 마치는 정년퇴직 기념 여행으로 마련되었다. 나는 과거 유럽과 미국 서부를 열흘 정도 렌터카로 여행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유 일정을 잡아 렌터카로 여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딸의 학교가 있는 뉴욕주를 중심으로 장소를 물색하다가 결국에는 내 취향에 맞는 뉴잉글랜드로 정해졌다.

 

■뉴잉글랜드 형성기의 역사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청교도와 상업자본가들 간 이해의 산물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의 절대군주들과 재력가들의 후원을 받는 수많은 식민지와 교역 거점들의 건설이 본격화된 것은 17세기 초였다. 절대군주에게는 식민지 확보와 확대가 국가 발전의 중요한 토대였고 상업자본가들에게는 확실한 축재 수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뉴잉글랜드는 거룩한 신앙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청교도들의 종교적 동기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자본가들의 경제적 동기가 합력해서 건설된 독특한 식민지다.

당시 뉴잉글랜드에 진출하려면 영국 국왕의 특허장(patent)을 받아야 했다. 상업자본가들이 식민지 회사를 설립한 뒤 국왕의 특허장을 받아 식민지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관할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권한과 자금을 대여한 뒤 식민지 정착민들로부터 추후 물품으로 돌려받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1620년 100여 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의 플리머스에 도착하고 어렵게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1629년 찰스1세가 의회를 해산했다. 이 때문에 의회에 기반을 두고 있던 영국 내 청교도들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위축되었다. 여기에 윌리엄 라우드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국교회도 청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중시켰다. 유럽 대륙의 30년전쟁으로 대외무역이 위축된 것도 이 분야에서 활동이 컸던 청교도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크게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윈스럽(John Winthrop)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부유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나 대규모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고 각종 공직에 종사했다. 독실한 신앙인답게 많은 시간과 물질을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일에 바쳤다. 청교도에 대한 국교회의 탄압이 증가하자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각오를 했다. 어려움에서 벗어날 피난처를 마련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존 윈스럽

 

그러던 중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가 국왕의 특허장을 받아 신대륙 뉴잉글랜드의 찰스강과 매리맥강 사이의 정착지에 식민지를 개설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을 떠나 신앙의 보금자리를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퓨리턴(청교도) 지도자들과 협의한 후 뉴잉글랜드 이주에 관한 ‘케임브리지 합의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료 청교도들에게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영국을 떠나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퓨리턴 국가, 퓨리턴 교회의 설립을 위하여 뉴잉글랜드로 떠나자고 설득했다. 이런 자신의 뜻을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에도 전달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가 윈스럽을 메사추세츠 초대 지사로 선출하면서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는 급물살을 탔다.

 

▲영국의 신대륙 초기 이주사

그러면 그때까지 진행된 영국의 신대륙 이주사를 살펴보자.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사는 영국인이 신대륙에 건설한 정착지 세 곳에 대한 기술로 시작된다. 1607년 버지니아에 건설한 제임스타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주한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 그리고 1630년 존 윈스럽을 따라 영국에서 이주해온 청교도들이 보스턴을 중심으로 개척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앞서 신대륙에서 식민의 꿈을 펼쳐보려는 영국인들의 노력은 많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시도는 영국 왕 헨리7세의 후원을 얻은 베니스 출신 존 캐벗의 1497년 북미 해안 탐험이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발을 내디딘 지 불과 5년 뒤였다.

이후 윌리엄 호킨스, 리처드 호어 등 몇몇 모험가의 산발적인 원정 활동이 있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신대륙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년)이 즉위하고 정치가 안정되고부터였다. 그 무렵 영국 사회에 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1577년에서 1580년까지 3년에 걸친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세계 일주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는 시대의 풍운아요 모험가

그로부터 몇 년 후 새로운 풍운아요 모험가가 등장했으니 월터 롤리(Walter Raleigh)다. 롤리가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을 구체화한 것은 1584년이다. 롤리는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것을 믿고 여왕에게 신대륙 식민지 건설 특허권을 달라고 간청했다. 여왕은 1584년 3월, ‘기독교 군주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모든 이교도의 땅을 식민하고 소유할 권리’를 롤리에게 부여했다.

월터 롤리

 

롤리는 그로부터 한 달 만인 1584년 4월, 정찰대를 신대륙에 보냈다. 정찰대가 1584년 9월, 2명의 인디언 원주민을 데리고 귀국하자 곧 정식 원정대를 결성했다. 400여 명의 1차 원정대가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떠나 역사적인 항해길에 오른 것은 1585년 4월 9일이었다. 원정대의 대다수는 급료를 받는 용병이고, 실제 신대륙 정착 예정자는 전체의 4분의 1이 약간 넘는 108명이었다. 원정대는 8월초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섬에 도착했으나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10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110명의 2차 원정대가 1587년 5월 8일 플리머스항을 떠나 7월 22일 로어노크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대 역시 식량난을 견디지 못해 원정대 대장이 자신의 딸을 포함해 일부 대원을 현지에 남겨둔 채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 원정대장은 영국-스페인 간의 긴장으로 출항하지 못하다가 1590년 3월 버지니아로 떠났으나 현지에 남아있던 원정대는 종적이 묘연하고 정착지는 사라졌다. 롤리는 그후로도 원정대를 수 차례 로어노크에 보냈으나 그때마다 폭풍이나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해안에 상륙도 못하고 돌아왔다.

1차 원정대 대장 존 화이트가 1585년 현지를 방문한 후 그린 지도. 오른쪽 지도에서 빨강색 표시가 로어노크섬이다.

 

롤리의 식민 사업은 이렇게 실패했지만 그의 꿈은 후세에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멋진 신세계’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유산의 직접적 상속자인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은 롤리의 비전과 정신을 기려 1792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앙 부근에 주(州)의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롤리’로 명명했다.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영국의 첫 식민지

롤리가 실패한 최초의 식민지 건설을 영국이 성공한 것은 1607년이다. 장소는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이었다. 현재 미국 동쪽의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 걸쳐 위치한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으로 흘러드는 5개의 큰 강줄기 가운데 맨 아래쪽 줄기는 제임스강이다. 그 강어귀에서 내륙 쪽으로 약 60마일을 거슬러 오르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제임스섬이고, 제임스타운은 이 작은 섬의 연안에 세워진 정착지의 이름이다.

제임스타운 위치

 

콜럼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1607년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정착지와 그 주변 지형의 이름을 당시 국왕 제임스1세에서 따왔다. 제임스타운은 1698년 주도가 윌리엄스버그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초기 정착민 사회의 중심지였다.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는 버지니아 식민회사(Virginia Company)다. 1606년 4월 제임스1세가 내린 칙령을 근거로 설립되었다. 제임스타운에 정착할 목적으로 구성된 첫 이주자 144명은 1606년 12월 20일 출항했다. 그들은 4월 26일 체서피크만에 도착하고 5월 14일 제임스섬에 당도했다. 항해 도중 39명이 사망해 일행은 10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도 식량부족과 인근 늪의 극성스러운 모기로 인해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려 다수가 죽었다. 그러자 버지니아 식민회사는 낯선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7인 평위원회가 식민지 운영을 책임지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했다.

제임스 1세

 

존 스미스는 신대륙 식민지의 길잡이이자 조타수

7인 중에는 존 스미스(1580∼1631)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정착지 주변 지형을 답사하고 인디언과 협상하고 교역해 식량을 구해오는 임무를 맡았는데 담대한 용기와 능란한 임기응변으로 잘 수행했다.

존 스미스(왼쪽)와 현재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있는 스미스 동상

 

디즈니의 만화영화로도 유명한 포카혼타스 일화도 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 일어났다. 1607년 12월 스미스는 식량을 구하러 일행 9명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인디언의 포로가 됐다. 곧 처형되려는 순간 인디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12세)가 추장에게 스미스를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이주자들이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가 이처럼 목숨을 걸고 발로 뛰어 구해온 식량 덕분이었다.

이런 공으로 스미스는 1608년 9월, 임기 1년의 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가장 큰 문제점을 근로 경험이 적은 양반층(젠트리) 이주자들의 무력과 나태에 있다고 봤다. 이들은 생존에 필요한 실무적인 일은 기피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 찾는 일에 매달리기 일쑤였다. 스미스는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밭을 갈고 사냥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면서 방책을 더욱 공고히 쌓고, 우물을 깊이 파 안전한 식수를 확보하고, 옥수수 재배 면적을 대폭 늘려 식량 자립도를 높였다. 버지니아의 강들과 체서피크만을 탐사해 놀랄만큼 정확한 버지니아 지도도 만들었다.

그후로도 이주자들이 증가해 할 일이 많아졌으나 스미스는 1609년 9월 화약 폭발로 화상을 입어 귀국해야 했다. 스미스가 떠난 후 이주자들은 버지니아 식민사에 ‘기근의 시기’라고 기록된 최악의 겨울을 보냈다.

포카혼타스가 존 스미스의 목숨을 구해주는 순간을 그린 그림

 

스미스가 식민지 건설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이유

스미스가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공식 지도자로 일한 것은 1년이 채 안된다. 그런데도 역사는 그를 식민지 건설의 주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몇 가지다.

첫째는 그가 식민지의 지형과 사정, 인디언 원주민의 생활상, 이주자들과의 관계, 식민의 난관과 그 대안에 관한 길잡이와 조타수 역할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에서 버지니아로 떠날 때부터, 자생적인 농장형 정착지 건설만이 식민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는 스미스의 이런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머지않아 버지니아의 식민지는 물론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도 스미스의 비전대로 자영 공동체의 길을 걸으며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버지니아 식민사의 가장 권위 있는 ‘기록자’였다는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 스미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모두 7권의 책을 남겼다. 그중 5권이 버지니아에 관한 것이다.

셋째는 신대륙에 정착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해 1614년 다시 출항해 새로 상륙한 곳에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사추세츠주 남동부에 위치한 코드곶만(Cape Cod Bay)에서부터 메인주 북부의 페놉스콧만(Penobscot Bay)에 이르기까지 해안의 자세한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국 후 다시는 신대륙 땅을 밟지 못했으나 ‘뉴잉글랜드 해설’(1616년) 등의 책을 쓰고 뉴잉글랜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정밀 지도를 만든 덕분에 영국인들에게 식민지 이주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포카혼타스 공주 이야기

포로가 되어 죽을 목숨이던 스미스를 살려준 포카혼타스 공주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1614년 식민자 중 한 사람인 존 롤프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전에도 제임스타운의 이주자들을 자주 찾았고 그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도왔다. 남편 롤프가 담배 재배에 성공해 제임스타운 식민지가 영속적인 정착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도움 덕분이었다.

포카혼타스의 원래 이름은 마토아카다. 포카혼타스라는 이름은 그가 어렸을 때 성격이 자유분방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 1616년 영국에서 그린 위 판화에도 마토아카로 씌어있다.

 

1616년 포카혼타스는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남편의 나라 영국을 찾았다. 국왕 제임스 1세는 물론 자신이 생명을 구해준 스미스도 만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듬해 신대륙으로 돌아오기 직전 병을 얻어 영국에서 사망했다. 21년의 짧은 생애였다.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담배 재배에 성공해 자활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에 자극받아 신대륙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이주자가 날로 증가하던 1620년 11월 11일, 41명의 청교도를 포함해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 북쪽 해안가인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리고 12월 11일 플리머스에 상륙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그로부터 10년 뒤 본격화한다.

 

▲매사추세츠 정착

1630년 4월 8일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4척의 배가 매사추세츠로 떠났다. 한 달 후 다시 7척의 배가 떠나 매사추세츠 퓨리턴 식민지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1630년 한 해 동안 약 2,000명이 매사추세츠에 새 터전을 잡았고, 그 후 10여 년에 걸쳐 매사추세츠의 인구는 약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초대 지사 윈스럽은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구상했다.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기쁨과 슬픔, 노동과 고통을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건한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신분에 따른 빈부 격차는 당연한 것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통념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신분과 재산권 제도는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볼 때 복종을 거부하는 빈자는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를 어기는 것이고 가난한 자를 약탈하는 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된다.

존 스미스가 제작한 지도(1616년)를 토대로 1624년 인쇄한 지도. 뉴잉글랜드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왼쪽 상단 얼굴은 존 스미스

 

1630년 6월 도착한 신대륙은 세일럼(Salem) 근처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들의 꿈을 펼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답사팀이 매사추세츠만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지리를 익혔지만 적당한 정착지를 합의하지 못하고 논쟁만 계속되었다. 그 사이 극도의 피로와 열악한 거주환경으로 이주자들이 질병에 걸리고 쓰러졌다.

설상가상 북쪽 해안지대에 프랑스인들의 습격 소문까지 돌자 지도자들은 한 곳에 정착하려던 당초의 방침을 바꾸어 분산 거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각각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워터타운, 록스베리, 도체스터, 메드포드, 사우거스, 샤우무트, 찰스타운 등 7개의 정착촌이 생겨났다. 이 중 샤우무트는 나중에 영국의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으로 이름을 바꾸고 매사추세츠의 중심지가 되었다.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청교도 동상. 1887년 제작

 

▲매사추세츠 중심지는 보스턴

처음에 보스턴은 지형이 협소하여 대규모 정착지로는 부적합하고, 바다 쪽으로 너무 돌출해 있어서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여러 정착촌들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미스틱강과 찰스강이 함께 매사추세츠만으로 유입되는 지형적 여건 덕분에 해안지방과 내륙지방 사이의 교역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마실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토지가 넉넉했다.

보스턴은 3개의 작은 구릉으로 형성된 반도 형태여서 처음에는 편의상 세 개의 언덕을 뜻하는 ‘Tramount’ 또는 ‘Trimountain’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나중엔 ‘비콘 언덕(Beacon Hill)’으로 불렸다.

한 번 분산되자 다시 한 곳에 모여 견고한 성곽도시를 건설한다는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그동안 힘들여 일궈온 정착지를 포기하는 것을 이주민들이 꺼렸다. 그렇다고 정착지를 계속 분산하는 것은 퓨리턴 지도자들의 당초 이상과 어긋난다. 식민지의 사회질서 유지에도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반영해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는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법률과 규정을 제정하고 여러 제도와 기구를 도입해 각 공동체에 적용했다.

 

▲식민지 공동체
교회 체제는 신자들 상호간의 계약에 따른 회중교회 제도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꿈꿔온 이주민들에게 교회 체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영국에서처럼 주교가 개별 교회를 관장·지휘하거나 특정 계급이 성직 임명권을 하향식으로 행사하는 중앙집중식 질서는 청교도들이 원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교회 체제, 신앙 생활 규범, 일상생활 규칙을 신자들 상호간의 계약으로 규정해 가는 회중교회 제도가 식민지 생활에서 혼란을 줄이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첫 케이스로 찰스타운과 워터타운에 회중교회가 조직되었다. 찰스타운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턴으로 옮겨져 보스턴제일교회가 된다. 회중교회에서는 교회의 조직과 통솔은 물론 성직자, 교사, 장로, 집사 등 다양한 직분자의 선출과 임명은 교회 구성원 즉 ‘회중’의 권한에 속하고, 이 권위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교훈과 관행에 근거를 두는 것이라고 믿었다.

존 윈스럽과 그를 따르는 청교도 그림

 

윈스럽 지사가 이끄는 식민지 정부가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식민지 정부와 교회 사이에는 일체감이 형성되어 상호 협조 속에 행정체제가 자리잡았다. 식민지 정부는 자유인 신분자들에게만 재산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또 재산소유권자만 행정에 참여하고 교회 정회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교회 정회원에게만 토지가 분양됨으로써 교회는 신앙 공동체 뿐만 아니라 세속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자유인 신분이 아닌 이주민들은 자유인 신분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유인 신분을 얻으려면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야 했다. 교인은 크게 정회원과 일반교인으로 구분했다. 일반교인이 정회원이 되려면 충분한 신앙적, 도덕적 자질을 함양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매사추세츠에서 교회 정회원이 된다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는 하나의 보증서였다.

 

상·하류층의 서열 사회 유지하고 토지는 차등 분배해

몇 년 뒤인 1636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정부가 뉴타운(지금의 보스턴 케임브리지)에 대학을 세우기로 하고 기금을 조성했다. 이후 1636년은 하버드대의 공식 창설 연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대학(New College)’ 또는 ‘새 도시 대학(The college at New Towne)’으로 불렸으나, 1638년 존 하버드 목사가 죽으면서 이 대학에 수백권의 책과 재산의 일부를 기증한 것을 기념해 1639년 3월 학교명을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로 바꾸었다.

하버드 대학은 좁은 의미의 신학대학은 아니었지만 신앙을 부차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평범한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당시 청교도들이 지향하던 시대적 요청과 신앙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유능한 인재 배출이 설립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 안에 있는 존 하버드 목사

 

식민지 공동체에서는 영국에서의 양반층(gentry)이 상류계층을 형성하고 그 아래 일반주민들이 하부계층을 형성했다. 상류계층은 영국에 있을 때부터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더니 뉴잉글랜드에 와서도 여전히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이 상류계층은 영국에서 익숙하게 경험해 온 존경과 복종에 기초를 둔 이른바 ‘서열 사회’를 그대로 뉴잉글랜드에 이식하려 했고, 일반주민들도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이런 사회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다. 덕분에 윈스럽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은 일반 주민들의 큰 저항 없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토지 분배에는 시각차가 컸다. 일반 주민들은 모든 토지가 평등하게 고루 분양돼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상류층은 식민지의 발전을 위해서 토지 사용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므로 투자 능력에 따라서 토지를 차등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힘이 약한 서민들의 일방적 패배로 끝이 났다. 결국 새 토지법에 따라 보스턴 상류층은 1인당 평균 약 200에이커의 땅을 분양받고 많이 받은 사람은 700에이커까지 받았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돌아 온 땅은 1인당 평균 30에이커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겨우 8에이커를 분양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마저도 용인 신분에게는 토지분양이 제외되었다.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려는 꿈 포기하고 정치·경제적 번영의 길 선택해

이후 계속적인 이민자들의 증가로 1640년 보스턴의 인구는 약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새로운 토지가 활발히 조성되고 새로운 정착촌이 계속 증가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스턴의 사정이 점점 지도자들의 꿈을 외면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적 동질성이 점차 약화되고 직업과 종교관 등의 다양성이 증대되었으며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보스턴은 항구로서의 유리한 입지조건 등으로 식민지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청교도의 꿈을 가로막는 갖가지 역기능의 진원지가 돼가고 있었다.

보스턴은 계속 밀려드는 이주민들이 뉴잉글랜드에 첫발을 딛는 곳이다보니 상업과 무역의 번영을 누렸다. 이주자들의 체류비 수입 뿐만 아니라 모피, 목재, 농어축산물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하고 식민지 정부의 행정, 사법, 입법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런 이유로 점차 세속적 부의 축적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는 물신주의가 깊이 스며들었다. 매사추세츠 퓨리턴 식민지를 기획하고 지도해온 초대 지사 윈스럽도 1649년 사망했다. 결국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려는 꿈이 점차 희석되면서 정치·경제적 번영의 길로 방향을 틀며 달려갔다.

 

▲뉴잉글랜드 동맹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영국 본국의 간섭과 지배에서 자유로운 자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어느 정도 퓨리턴 자치 식민지의 기초를 갖춰나갔다. 인근에 위치한 코네티컷, 뉴헤이븐, 플리머스 등 소규모 식민지와 연합하여 ‘뉴잉글랜드 동맹’을 형성하고 맹주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명예혁명 후 영국은 제국정책의 일환으로 해외의 모든 식민지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1691년에는 매사추세츠의 법적 지위를 국왕의 직속 식민지로 바꾸는 새 칙허장을 발급했다. 이렇게되자 매사추세츠는 더 이상 퓨리턴 자치 식민지가 아닌 하나의 평범한 국왕 직속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청교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서, 당시 청교도 가정은 아이를 평균 17명쯤 낳았다. 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헤켓 피셔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이주기에 매사추세츠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미국 양키들의 종축 역할을 했다. 그들의 번식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200년 동안 한 세대 마다 인구가 두 배씩 증가했다. 1700년 무렵에는 인구가 10만 명, 1800년 무렵에는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630년부터 1640년 사이에 매사추세츠로 건너온 영국인 정착민 2만1000명의 후손은 그렇게 늘어난 것이다.”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클릭 ☞ 시리즈 1 뉴잉글랜드 연재를 시작하며
클릭 ☞ 시리즈 2 뉴욕
클릭 ☞ 시리즈 3 코네티컷주 – 1
클릭 ☞ 시리즈 4 코네티컷주 – 2
클릭 ☞ 시리즈 5 매사추세츠주-1
클릭 ☞ 시리즈 6 매사추세츠주-2
클릭 ☞ 시리즈 7 로드아일랜드주-1
클릭 ☞ 시리즈 8 매사추세츠주-3 플리머스
클릭 ☞ 시리즈 9 매사추세츠주-4 콩코드
클릭 ☞ 시리즈 10 메인주
클릭 ☞ 시리즈 11 뉴햄프셔주
클릭 ☞ 시리즈 12 버몬트주-1
클릭 ☞ 시리즈 13 버몬트주-2
클릭 ☞ 시리즈 14 뉴욕주-1
클릭 ☞ 시리즈 15(끝) 뉴욕주-2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