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일군, 스페인의 게르니카 폭격

↑ 게르니카 폭격 현장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30분, 독일 공군 ‘콘돌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재앙이 내렸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게르니카의 참극은 스페인 내전 때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반대하고 공화파에 속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군은 전투기 성능도 시험할 겸 그들이 자랑하는 ‘하인켈 3’와 ‘콩커스’ 52기를 43대나 게르니카 상공에 띄웠다.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폭격으로 마을의 70%가 쑥대밭이 되었고 7000여 명의 주민 중 16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날이라 북적거렸던 중앙광장에도 폭탄이 떨어졌고 도망가는 부녀자나 노인들에게도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사건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자 프랑코 측은 한때 “공화파의 자작극”이라며 발뺌했으나 곧 독일군의 공습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학살’ 소식을 접한 것은 폭격이 있고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피카소가 붓을 들고 미친듯이 그려나간 그림 ‘게르니카’는 6월 4일 완성되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x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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