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과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

↑ 게르니카 폭격 현장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민족은 바스크인이다. 이들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피레네 산맥 지역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중앙정부와 별 마찰 없이 자치활동을 벌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1936년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내전을 일으켰을 때 반(反) 프랑코 인민전선 편에 선 것이 화를 불렀다. 당시 바스크 자치정부에는 반프랑코 세력인 공화파, 사회당, 공산당은 물론 당연히 프랑코 편에 속해야 할 가톨릭 교회와 부르주아 정당(바스크 민족당)까지 참여했다. 프랑코는 가톨릭 교회까지 반 프랑코 인민전선 정부군에 가담한 바스크인들의 굳건한 단결을 무너뜨리려면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7년 봄 프랑코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드리드 전투를 일시 중단하고 바스크의 성지로 꼽히는 게르니카를 표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 독일 공군의 콘도르 비행단이 게르니카를 무차별로 폭격했다. 프랑코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이른바 ‘게르니카의 비극’이었다. 비극을 제일 먼저 보도한 것은 4월 27일자 런던의 석간 신문들이었다. 4월 28일자 ‘더 타임스’는 ‘게르니카의 비극! 공습으로 파괴된 마을! 목격자는 보고한다’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내용은 이랬다. “게르니카! 바스크에서 가장 오래되고 문화적 전통의 중심인 이 마을은 반란군의 비행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무방비 마을은 3시간 15분 동안 독일의 하인켈 폭격기와 융커스 폭격기, 그리고 하인켈 전투기 등으로 편성된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았다.… 폭격기는 500kg에 달하는 폭탄과 1kg의 소이탄 3,000발을 비가 내리듯 떨어뜨렸다. 달아나는 사람들에게는 전투기로부터 기총소사가 퍼부어졌다.… 폭격 목적은 바스크 사람들의 사기를 죽이고 바스크 민족의 요람지를 파괴하는 데 있었다.… 공격 날짜도 선택된 것이었다. 월요일은 장이 서는 날로 이 지방 농민이 모여드는 날이었다. 오후 4시 30분 성당의 종(鐘)이 비행기의 접근을 알리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지하실과 방공호로 대피했다.… 5분 후 독일 폭격기 1대가 나타나 6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5분 후 두 번째 폭격기가 나타나 마을 중심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15분이 지났다. 이번에는 3대의 융커스 편대가 날아와 파괴를 계속했다. 7시45분까지 그들은 파상적으로 공격했다. 인구 7,000여 명에 3,000여 명의 피란민이 있던 마을은 서서히 그리고 계획적으로 파괴되었다.… 독일 공군의 폭격은 새로운 전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었다.… 비행기는 마을의 전 지역을 구역으로 나누어 이 잡듯이 폭탄을 투하했다.… 바스크 사람들이 유일하게 한 일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이 잡듯이 마을에 폭탄을 투하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유럽에 알려지자 제네바에서 긴급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자리에서 게르니카의 비극을 국제적으로 조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프랑코는 “바스크인들이 후퇴하면서 스스로 폭파하고 방화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미 자신들의 영웅적 행위를 자랑하고 있던 콘도르 비행단의 조종사들에게도 출격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독일에 요청했다.

프랑코군이 외국 특파원들을 게르니카로 안내한 것은 5월 1일이었다. 사전 조작을 마친 터라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는 인민전선 측을 비난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빨갱이들이 월요일 오후부터 그와 같은 악랄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는 주민들의 증언은 프랑스의 우익계 신문들에 실렸다. 이처럼 정부군과 프랑코군의 상반된 정보와 조작이 뒤범벅이 되어 서방 세계에 전해지고, 프랑코의 내전 승리 후 침묵이 강요되면서 ‘게르니카의 비극’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졌다.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 이후부터였다. 1978년 스페인과 서독 정부가 게르니카 폭격에 관한 비밀문서를 해금하기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자료들이 하나둘 공개되었다. 독일 측 자료에 따르면 폭격에 참가한 콘도르 비행단의 전투기와 폭격기는 모두 42대였다. 50t의 고성능 폭탄과 소이탄이 투하되었다. 독일군이 개발한 비밀 무기를 실험하고 실전 경험을 쌓는 실험장으로 이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미국의 한 역사학자 조사에 따르면 3시간 여에 걸친 사상 최초의 융단폭격으로 마을의 70%가 쑥대밭이 되어 1,654명이 죽고 889명이 다쳤다.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당시 스페인의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게르니카의 비극’이 알려진 것은 폭격 후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피카소는 그동안 구상해온 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게르니카의 참상을 벽화에 담기로 했다.

피카소는 먼저 황소, 말, 여인 등 60여 점의 크로키와 데생을 그린 뒤 화폭으로 옮겨 넣었다. 이렇게 완성된 ‘게르니카’는 6월 4일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으로 옮겨졌다. 검은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x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한 다른 작품과 달리 피카소는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 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했다. 전등의 빛은 히틀러군의 폭격을, 황소는 무자비한 독일군을 암시했다. 그 옆에서 몸을 뒤틀며 울부짖는 말은 공포에 질려 죽어가는 희생자들이었다.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쏟아졌으나 정작 벽화를 의뢰한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는 “그림이 인상적이지 않고 볼품없다”며 전시관에서 치우도록 했다. 혹평하는 비평가도 있었다.

피카소 그림 ‘게르니카’

 

‘게르니카’는 1938년 10월 파리를 떠나 세계 주요 도시를 여행했다.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을 때 2차대전이 터져 게르니카는 미국에 발이 묶였다.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던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프랑코 사후인 1981년 9월 10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언론들은 긴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게르니카’를 ‘고국 땅을 밟은 최후의 망명자’라며 반겨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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