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수만 (출처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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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전 총괄 프로듀서는 거의 50년간 가수, MC, 기획자, 경영자로 다양한 형태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며 K팝의 세계화를 일궈낸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런 이수만에게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SM은 2000년 아이돌그룹 HOT의 중국 공연을 시작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진출을 선도했던 ‘K팝의 종갓집’이다. 방탄소년단(BTS)을 거느린 하이브의 등장 이전에는 국내를 대표하는 여러 K팝 스타를 거느렸던 명문 기획사였다. 하지만 이수만의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으로 매년 거금이 새나가는 문제가 불거져 자신이 세운 회사의 경영진과 정면 충돌하고 급기야 자기 주식의 상당부분을 방시혁의 하이브에 넘기면서 SM에서 중도 하차하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SM의 경영권을 둘러싼 일진일퇴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SM 경영권 인수 의사를 밝히고 나선 두 경쟁자는 BTS·뉴진스 등이 소속된 하이브와 카카오 계열사인 카카오엔터테인먼트다. 하이브는 이수만과, 카카오엔터트는 SM 현 경영진과 각각 손잡으면서 합종연횡하고 있다. SM의 정기 주주총회가 열리는 3월 31일이 되면 SM은 하이브와 카카오엔터 중 한 곳의 품에 안기게 된다. 더불어 SM의 창업주이면서 ‘K팝 아이돌 산업의 창시자’인 이수만의 시대도 막을 내린다.
■개인 삶
이수만(1952~ )은 시대마다 각기 다른 이미지로 기억된다. 1970년대는 인기가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중후반은 유명MC로 이름을 날렸다. 1989년부터 최근까지는 K팝 기획자나 기획사 대표로 활동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우리 가요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기획 가수’라는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었다. 이수만의 등장 전, 1970년대는 몇 사람의 대형가수를 전속으로 하고 있는 레코드사가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했다. 1980년대는 가수들을 관리·보조하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들이 레코드 회사를 설립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가 이수만의 등장 후 프로듀서, 매니지먼트, 자본의 힘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기획사들이 가수를 육성·배출해 가요계를 장악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수만은 아이돌 그룹 HOT의 성공 후 “미다스의 손”, “대중문화의 첨병”, “스타 제조기”로 불리며 우리 가요계를 쥐락펴락하고 그 영향력을 아시아 전반으로 확대해 “K팝 한류 열풍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성공 방식은 이후 우리 가요계 산업의 표준이 되었다.
▲가수와 유명MC
이수만은 서울에서 살던 부모가 6·25 때 피란간 부산에서 1952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연희전문에서 수학물리과를 졸업한 교사였고 어머니는 이화여전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인이었다. 종전 후 가족이 둥지를 튼 곳은 서울 인왕산 자락의 종로구 부암동이었다. 이수만은 집에서 가까운 경복중을 거쳐 경복고에 입학했다. 어머니 덕분에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이수만을 대중음악 세계로 인도한 것은 작은형 이수영이었다. 이수영은 항공대 시절 ‘활주로(runway)’ 밴드를 결성했다. ‘활주로’가 유명해진 것은 가수 배철수가 대학시절 ‘활주로’ 6기 멤버로 활동하면서였다.

이수만은 형이 대학에서 밴드를 결성한 것처럼 자신도 경복고에서 ‘개구리(Frog)’라는 밴드를 결성해 리더를 맡았다. 1971년 입학한 서울대 농과대에서는 교내 그룹사운드 ‘샌드 페블즈’ 2기로 활동했다. 1972년 백순진과 함께 그룹 ‘4월과 5월’을 결성하고 1972년 4월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그해 10월에는 첫 솔로 앨범을 취입,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걸었다. 이수만은 1974년 개그맨 박성원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비바 팝스’의 후속 DJ와 1976년 MBC 라디오의 ‘청춘은 즐거워’ DJ를 맡아 재치 넘치는 언변과 입심을 자랑했다. 가수로는 1976년 MBC 신인가수상에 뽑히고 1977년 자작곡 ‘행복’으로 MBC 10대가수로 선정되었다. 이수만의 입담과 프로그램 진행 능력은 TV로 이어졌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아 재치 있는 진행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 총 8번이나 진행을 맡았다.

▲미국 유학
잘나가던 이수만이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81년 2월이었다. 훗날 이수만은 “1980년 방송통폐합 등 거꾸로 가는 한국 상황에 답답함을 느껴 유학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이수만은 미국 플로리다 공대에 입학했다가 캘리포니아주립대학(노스리지 캠퍼스) 전자공학과로 학적을 옮겼다. 대학 졸업 후에는 같은 대학에서 컴퓨터엔지니어링 석사과정을 밟았다.
유학시절 그에게 충격을 안겨준 것은 1981년 8월 1일 방송을 시작한 미국의 MTV였다. 그가 MTV를 통해 확인한 것은 대중음악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뀌고 있다는 시대 변화의 흐름이었다. 이수만은 MTV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타 발굴을 위해 바닥까지 샅샅이 뒤지는 기획자(프로덕션)와 대형 음반사의 분업화·전문화된 미국의 시스템도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수만이 눈여겨 본 가수 중에는 마돈나도 있었다. 제1회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 시상식이 열린 1984년 9월 14일, 마돈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순결하고도 요염한 신부의 자태를 뽐내며 남자들을 유혹하는 특유의 코맹맹이 목소리로 ‘라이크 어 버진’을 노래했다. 그 무렵 미국 시청자들이 MTV를 보는 이유가 스타의 패션과 가수의 율동이고 세 번째가 노래 감상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는 이수만에게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수만은 멀지 않아 MTV 방식이 한국에도 상륙할 것이고 그것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MTV가 미국에서 얻은 음악적인 소득이었다면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컴퓨터그래픽과 비디오를 공부하던 9살 아래 아내를 만난 것은 개인적인 소득이었다. 두 사람은 1984년 1월 LA의 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수만은 석사학위를 마치고 1985년 6월 귀국했다.

귀국 후 그가 눈여겨본 가수는 미국의 마돈나를 꿈꾸며 1986년 3월 데뷔한 17살의 김완선이었다. 그녀는 볼륨감 있는 몸매와 수준급의 춤 솜씨로 순식간에 가요계의 한 축을 장악했다. 이수만이 주목한 것은 데뷔 3년 전부터 모진 트레이닝을 거친 김완선의 데뷔 과정이었다. 한편 이수만이 미국에서 돌아와 선보인 장르는 테크노였다. 1987년 발표한 ‘뉴에이지’는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인 사운드여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989년 ‘뉴에이지2’ 앨범도 별 반응이 없자 가수 활동을 접고 앨범 제작과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이니셜에서 이름을 따 1989년 2월 설립한 SM기획이었다.
■기획사 대표
▲현진영 : 첫 ‘기획’의 실패
회사 설립 후, 이수만이 관심을 쏟은 것은 ‘남자 김완선’의 발굴이었다. 이상적 모델은 미국의 팝 스타 바비 브라운이었다. 이수만은 당대 유명 춤꾼인 허현석, 이주노, 양현석를 눈여겨보다가 이태원에서 프로 댄서로 유명한 17살의 허현석을 낙점했다. 이수만은 허현석에게 현진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2명의 백댄서를 붙였다. 강남 최고의 춤꾼이었던 강원래와 구준엽이었다. 당시 춤은 청소년들의 또다른 문화 언어였다. 현진영의 춤 실력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수만은 작곡가 홍종화를 현진영에게 붙여 체계적으로 트레이닝을 했다. 특수발성을 목표로 물구나무 선 채 산토끼 노래하기, 뛰면서 노래하기, 산 정상까지 오르며 계속 노래하기 등 트레이닝 과정은 혹독했다.
현진영은 1990년 8월 ‘야한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하고 바비 브라운 스타일의 힙합을 기반으로 한 1집 앨범 ‘뉴 댄스 1’을 발표했다. 열정적인 흑인 음악과 토끼춤을 장착한 ‘현진영과 와와’가 TV화면에 등장했을 때 현진영 손에는 전통적인 마이크가 들려있지 않았다. 마이크는 귀에 걸어 입 앞으로 연결되는 무선 마이크였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현진영은 역동적인 춤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그전까지 노래를 잘하는 남자 가수는 많았으나 비주얼이 강하고 춤을 잘 추는 가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진영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1992년 2집 앨범 ‘뉴 댄스 2’(1992년)에 수록된 ‘현진영 Go 진영 Go’가 TV 화면에 등장했을 때도 10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큼지막한 농구화, 엉덩이에 걸쳐진 헐렁한 바지, 가마니처럼 생긴 화려한 색상의 후드 티, 가슴에 커다란 X자 마크를 단 패션은 그 자체로 화젯거리였다.
문제는 현진영의 방만한 생활 태도였다. 현진영은 대마초 흡연으로 한 차례 위기를 넘기고도 1993년 10월 3집 앨범을 낸 후 또다시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수만은 수년 동안 공들인 가수의 몰락으로 한동안 빚에 시달렸다. 이수만이 현진영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은 인성에 관한 통찰이 부족했다는 뼈저린 자각이었다. 이후 이수만은 몇몇 그룹을 데뷔시켰으나 뚜렷한 히트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수만이 움츠려 있는 동안 1992년 3월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청소년들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음악 시장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하며 문화적 충격을 몰고 왔다. 이수만은 서태지를 지켜보면서 예전보다 비중이 훌쩍 커진 문화 소비주체로서 10대의 위력을 간파했다.

▲HOT : ‘기획’의 승리
현진영의 실패 후 이수만은 아이들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느 연령대의 가수가 노래를 불러야 아이들의 호응이 높은지,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어필하는지를 고민하다가 여론조사기관에 설문을 의뢰했다. 그래서 도출한 공식이 ‘고교생 그룹 + 춤 + 노래 + 새로운 변화’였다. 더불어 10대에게는 댄스와 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수만은 1995년 2월 SM기획을 ‘SM엔터테인먼트’를 확장·개편하고 ‘10대들의 승리’를 의미하는 회심의 프로젝트 ‘하이 파이브 오브 틴에이저(HOT)’를 가동했다. 외모와 춤은 기본이고 개성까지 갖춘 10대 춤꾼들을 물색하기 위해 모집 공고를 내고 중고생들이 많이 모이는 주요 길목으로 직원들을 보냈다.
이수만은 미국을 포함, 전국에서 픽업한 15~16명의 연습생을 집중적으로 지도한 후 그중 뛰어난 5명의 고교생을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문희준, 강타, 이재원, 장우혁, 토니안 등으로 구성된 5인조 아이돌 그룹 ‘HOT’의 탄생이었다. 현진영의 모델이 바비 브라운이었다면 HOT의 벤치마킹 대상은 미국의 5인조 보이밴드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이 음악그룹은 모리스 스타라는 미국 아이돌 그룹의 창시자가 만들어낸 기획 상품이었다. 예쁘장한 백인 소년들이 부르는 흑인 정서의 음악은 순식간에 미국을 점령했다.
이수만은 ‘한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만들기 위해 5명을 밤늦게까지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996년 1월 서태지가 은퇴 선언을 하면서 10대를 대상으로 한 가요 시장이 갑자기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수만은 데뷔에 앞서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 5명을 각기 다르게 포지셔닝했다. 문희준은 유머 가이, 강타는 핸섬 가이, 장우혁은 터프 가이, 이재원은 샤이 가이, 토니안은 무드 가이로 포장했다. 다양한 성향의 팬 들이 취향에 맞춰 팬덤을 형성하도록 다변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먼저 기획하고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이정표 세워
HOT는 ‘10대의 대변자’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1996년 9월 7일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모든 종류의 폭력을 반대한다)’라는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발매하고 같은날 MBC TV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통해 데뷔했다. 데뷔 앨범은 학원폭력을 고발한 갱스터랩 ‘전사의 후예’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다. 젊은 팬들은 격렬한 춤과 랩, 그리고 R&B 창법을 소화하는 잘생긴 10대 소년에 열광하면서 HOT를 서태지를 잇는 그들의 새로운 대변자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후원군이 되었다. 이로써 재능 있는 가수가 먼저 있고 그 후 기획이 필요했던 기존의 가요계 흐름에 역행하는, 먼저 기획이 있고 그 후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첫 번째 앨범은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히트를 쳤으나 타이틀곡 ‘전사의 후예’가 표절 시비에 휘말려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자 이수만은 곧바로 발랄하고 명랑한 소프트팝 ‘캔디’를 두 번째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는 순발력을 발휘해 인기를 이어갔으나 ‘캔디’까지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하지만 이미 팬덤을 형성한 청소년들은 HOT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1997년 7월 발매된 2집 음반 ‘늑대와 양’ 역시 열흘 만에 100만 장을 돌파했다.
이수만은 형 이수영이 대표로 있던 스타월드를 통해 HOT 브로마이드와 화보집을 제작하고 팬클럽 관리를 본격화했다. 1997년 5월 전국 34개 지역 팬클럽 회장이 모여 공식 팬클럽 ‘클럽 HOT’를 결성하고 그해 9월 10대 소녀 1만 5000명이 모인 팬클럽 1기 창단식이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또 하나의 마케팅 기법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이다. 이후 SM과 같은 성격의 기획사가 속속 세워지고 그들의 기획으로 새로운 아이돌 그룹이 연이어 탄생함으로써 한국 가요계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양현석의 양군기획(현재의 YG엔터테인먼트)과 박진영의 태흥기획(현재의 JYP엔터테인먼트)이 그것이었다.
HOT는 K팝을 중국에 전파한 첨병
HOT의 존재에 대해 막연히 10대들의 우상 정도로 생각해오던 기성세대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99년 9월 18일 아이돌 가수로는 최초로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였다. HOT 팬들은 HOT의 상징 색인 흰색 풍선과 플래카드를 들고 열광했다. 공연 도중 문희준이 빗물에 미끄러져 수 미터 아래 바닥에 넘어졌을 때는 200여명의 여중고생들이 함께 쓰러져 실신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어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 소동은 청소년들이 독점적이고 맹목적으로 대중 스타와 교감을 하고 그들끼리 코드를 나누고 있음을 세상에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이튿날에는 HOT의 콘서트를 관람한 것으로 알려진 10대 여고생이 HOT에 대한 애정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일련의 소동으로 HOT는 기성세대의 눈총과 주목을 동시에 받았다. HOT는 이렇게 국내를 평정하고 2000년 2월 중국 베이징의 첫 콘서트에서 대박을 터뜨림으로써 K팝을 중국에까지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HOT는 2001년 5월, 5인의 멤버 중 장우혁, 토니안, 이재원이 5년 계약이 끝나 SM을 탈퇴하고 강타와 문희준 2명만이 남음으로써 5인조 아이돌 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당시 세 멤버는 기자회견에서 음반 1장당 받는 인세가 1인당 고작 20원으로, 다섯 멤버의 것을 합쳐도 100원에 불과했다고 항변했다. SM은 성공이 불확실한 신인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거액이 들어갔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팬들은 ‘1장당 20원’이라는 귀에 쏙 들어오는 문구에 분노했다. HOT는 결국 해체되었지만 그래도 SM은 향후 20년 사업 모델의 단초를 마련하고 기획사 최초로 코스닥 입성(2000년)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SM이 얻은 소득은 컸다.
▲승승장구 그리고 코스닥 상장
SM은 HOT 말고도 미국 걸그룹 TLC를 벤치마킹한 여고생 그룹 ‘SES’(1997)를 비롯해 HOT 업그레이드 버전인 보이 그룹 ‘신화’(1998) 등 스타급 아이돌 가수를 대거 발굴해 국내 아이돌 그룹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이수만은 1등에 만족하지 않고 아이돌 그룹이 벌어들인 수익을 일본 시장 개척에 쏟아부었다. 그가 회사 운명을 걸고 투자한 연습생은 12세 초등학생 보아였다. 보아는 2001년부터 일본 시장의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장의 발판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 1년만에 오리콘 차트 주간순위 1위를 기록함으로써 오늘날 SM 해외시장 진출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SM은 보아에 이어 2003년에 데뷔한 ‘동방신기’도 일본 시장에 투입했다. 동방신기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한류 전사로 활동했다. SM은 이후에도 슈퍼주니어(2005), 소녀시대(2007), 샤이니(2008), f(x)(2009), EXO(2012), NCT(2016), 에스파(2020) 등을 연이어 히트시켜 ‘K팝 종가’의 명성을 이어갔다.

이수만은 1999년 SM 소속 그룹의 음반들이 연달아 성공하며 가요계를 지배하고 매출이 급증하자 코스닥 상장을 준비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보아의 일본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자금이 절실했고 또 하나는 보수적인 일본 기업으로부터 비즈니스 파트너로 인정받으려면 공인된 기업이라는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SM은 화려한 실적 덕에 2000년 4월 엔터테인먼트사 1호로 코스닥에 입성하고 대박을 쳤다. 첫 거래일인 2000년 4월 27일 5325원이었던 주가는 3주 만인 5월 18일 2만원을 넘겼다. 하루 평균 상승률은 12%에 달했다.
SM의 코스닥 상장 성공을 지켜본 다른 연예 기획사들도 연달아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면서 ‘엔터주’라는 투자 카테고리가 생겨났다. JYP(상장 연도 2001년), YG(2011년), 큐브엔터(2013년) 등 다수 엔터사가 상장했다. 방탄소년단(BTS)을 보유한 하이브는 2020년 10월 엔터사 최초로 코스피시장 입성에 성공, K팝 기업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수만은 승승장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02년 검찰의 연예계 비리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2002년 6월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2003년 5월 귀국 후 구속되어 2004년 9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이수만은 1999년 8월 SM의 유상증자 과정에서 회사 대금을 빼돌려 주식 대금을 가장 납입하는 방법으로 11억5000만원을 횡령한 뒤 코스닥시장 등록 후 최대 480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린 혐의를 받았다.
■이수만과 SM의 명암
오늘날 이수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명암도 분명하다. ‘K팝 아이돌 산업의 창시자’ ‘한류 열풍의 개척자’ 소리를 들으며 오늘의 K팝 한류가 있게 한 것이 명(明)이라면 SM의 자금이 이수만 개인기업 라이크기획으로 돈이 빠져나가게 하는 황제경영으로 일관한 것은 명백한 암(暗)이다.
▲먼저 明
이수만과 SM의 대표적인 명(明)을 꼽으라면 첫째가 기획사의 ‘기획’이 있고 나서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또 하나의 마케팅 기법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2000년 기획사 최초로 코스닥에 입성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큰 공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진출을 개척하고 선도했다는 점이다. K팝의 세계화가 가능했던 것은 SM이 음악적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다국적’ ‘무국적’ 전략의 일환으로 해외 작곡가들과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서 음악적 감수성의 일대 혁신을 일으키고, 작곡가 한두 명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작곡가·프로듀서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집단 창작’으로 작곡 방식을 변모시킨 것은 음악적 성과다.

▲그리고 暗
이런 산업적·음악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SM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수만 1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1인 경영 시스템’ ‘황제 경영’이었다. 해외진출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연예인이나 연습생과 10년에 이르는 장기 전속 계약을 체결한 ‘노예 계약’으로도 논란을 빚었다. 이수만의 성격과 관련해 연예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특징은 자기 사람은 철저히 챙기지만 분쟁이 생겨 그 사람과 헤어질 때는 가차없이 응징한다는 것이다. SM은 소속 가수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몇 차례 떠들썩한 전쟁을 벌여 왔다. 얻을 게 거의 없어 보이는 다툼에서도 이수만의 SM은 전력을 다해 응징했다. 재계약 과정에서 탈퇴 멤버와 싸울 때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다. 한때 분쟁 끝에 나간 가수를 TV에 등장시키려면 방송국 PD들이 사표 쓸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라이크기획 논란
이수만 ‘황제 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것이 이수만이 1997년 설립한 개인회사 ‘라이크기획’이다. 이 회사는 SM 소속 아티스트의 음반과 SM이 제작한 음반의 자문 및 프로듀싱 업무를 하는 하청 업체였는데 베일에 가린 채 SM으로부터 매년 수십에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외주기획료를 받아왔다. SM이 돈을 많이 벌든, 적자가 나든 상관없이 매출 일부를 용역비로 받았다. 이수만은 배당과 연봉은 받지 않았지만 라이크기획은 이수만의 실질적인 급여 통장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보니 라이크기획은 이수만을 비판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만능카드, 일종의 ‘치트키’가 되었다.
SM을 상대로 총대를 멘 것은 주주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였다. 얼라인의 이창환 대표는 K팝의 미래 가치와 음반 판매량, 매출 등에 비해 SM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다고 판단해 2021년 9월 SM 지분 0.91%를 취득했다. 그리고는 “SM 주주에게 분배되어야 할 수익이 개인회사(라이크기획)를 통해 창업자 이수만에게 흘러들어간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소액주주들도 매출의 6%를 가져가는 라이크기획의 문제 해결 없이 SM의 영업이익 증가 및 주가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라이크기획과 계약을 종료하라고 독촉했다. 그러나 SM은 구체적 답변을 회피했다. 얼라인은 소액주주와 합심해 주주총회에서 한 목소리를 냈다. SM은 주주 달래기에 나섰지만 결국엔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어 2022년 12월 라이크기획과 계약을 종료하고, 이수만은 2023년 2월 경쟁사인 하이브에 자신의 주식 지분 14.8%를 매각함으로써 이수만 시대의 종언을 촉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