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 로자 파크스(오른쪽)와 마틴 루터 킹

 

버스 안에서의 흑백 차별 사라져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의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 버스에 오른 것은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였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하면서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활동에도 적극적인 42세의 로자 파크스(1913~2005)였다.

당시 몽고메리시는 버스에 흑백 좌석을 분리하는 조례를 채택하고 있었다. 앞좌석 네 줄은 백인 전용석이고 뒷자리는 흑인을 위한 좌석이기 때문에 그녀는 백인 전용석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흑인 좌석이 시작되는 줄에는 ‘유색인종’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그런데도 백인 버스기사들은 백인 손님이 많을 경우 팻말을 뒷좌석으로 옮기고 흑인에게 그 뒤로 가도록 요구했다. 그것은 시 조례가 아니고 관행이었다.

그 날도 앞줄의 백인 전용석이 다 차고 2~3명의 백인이 서 있게 되자 백인 기사가 팻말을 뒤로 옮기면서 흑인들에게 뒷자리로 갈 것을 요구했다. 4명의 흑인 승객 중 3명은 자리를 양보했지만 파크스는 일어서지 않았다. 미 인종차별사의 한 획을 그은 ‘버스 보이콧 운동’이 발화하는 순간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사실 그녀는 시의 조례를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질서를 교란한 혐의로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파크스는 화가 났지만 일단 보석금을 내고 이튿날 석방되었다.

NAACP의 몽고메리 지부장 에드거 닉슨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동지들과 함께 버스 흑백분리 조례에 도전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연방 법정으로까지 사건을 끌고가 시 조례의 위헌성을 다툰다는 목표를 세웠다. 첫 단계로 로자 파크스의 재판이 열리는 12월 5일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흑인 승객을 정중하게 대할 것’, ‘흑인이 많이 타는 노선에는 흑인 운전기사를 배치할 것’ 등 요구조건은 온건했다.

 

흑인들 매일 95%의 참여율 보여

사실 로자 파크스는 남부 지역의 버스 흑백분리 정책에 도전한 첫 번째 흑인은 아니었다. 1944년 텍사스주의 포트후드에서도, 9개월 전 몽고메리시에서도 파크스와 같은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거나 법원에 간 흑인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몽고메리의 흑인 운동가들이 파크스를 민권운동의 전면에 내세워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은 파크스가 운동을 추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혼여성이고 안정된 직장이 있고 성품까지 온화해 누가 보더라도 흠잡을 데 없는 모범 시민이었다. 당시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시끄럽고 폭력적이고 직업도 없고 무책임하다는 것이었다.

몽고메리시의 12만 명 주민 중 흑인은 5만 명이었다. 시내버스 승객의 70%가 흑인이었으나 운전기사는 전부 백인이었다. 12월 5일, 90% 이상의 흑인이 버스 보이콧에 참여한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파크스는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재판 비용을 물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파크스는 항소했다.

그날 밤 흑인운동가들은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속하기로 하고 ‘몽고메리지위향상협회(MIA)’를 발족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킹은 1954년 보스턴대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1955년 9월 몽고메리로 갓 부임해온 26세의 풋내기 목사였다.

버스 보이콧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흑인이 운영하는 택시회사들은 버스 요금만을 받고 흑인을 태워주거나 카풀을 조직해 흑인을 목적지로 이동시켰다. 흑인들도 웬만하면 걷는 것으로 운동에 동참했다. 전국의 흑인 교회에서도 보이콧을 지지하는 성금과 신발을 보내 격려했다.

 

연방지법 “버스에서의 분리를 지속하려는 태도는 위헌”

흑인들이 매일 95%의 참여율을 보이고 이 때문에 버스 수입이 65%나 급감하자 보이콧 운동을 저지하려는 백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흑인 지도자들을 분열시키려 하고,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에도 흑인들을 체포하거나 엄벌에 처했다. 직장에서 쫓겨난 흑인도 있었으며 불에 탄 흑인 교회도 있었다. 킹 목사와 닉슨 지부장의 집에서는 폭발물이 터졌다. 그래도 킹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버스 보이콧 운동은 활화산처럼 몽고메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항소심을 맡은 몽고메리 지법이 파크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몽고메리시는 킹 목사 등 ‘몽고메리지위향상협회’ 간부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흑인들의 카풀 운동은 불법이고 무허가 영업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반노동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킹 목사 등 ‘몽고메리지위향상협회’ 간부들을 제소한 것이다. 킹은 1956년 3월 22일의 판결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바로 항소했다.

그 무렵 킹과는 별개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6년 2월 1일 브라우더 등 4명의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의 인종차별이 잘못되었다며 몽고메리시의 게일 시장을 연방재판소에 제소해 시작된 재판이었다. ‘브라우더 대 게일’로 불린 이 사건에 대해 연방지법은 6월 4일 “버스에서의 분리를 지속하려는 시 당국의 태도는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게일 시장은 연방대법원에 상고했고 선고는 11월 13일로 예정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킹의 항소심 재판 선고가 있는 날이었다. 킹은 유죄 선고를 받아 기분이 언짢았다. 이런 그에게 조금 전 연방대법원이 ‘브라우더 대 게일’ 사건에 대해 “버스에서의 인종차별을 규정한 앨라배마 주법 및 지방 조례를 위헌으로 판결한 연방지법 판사의 판결을 지지한다”고 선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연방대법원의 명령은 1956년 12월 20일 몽고메리시에 접수되었다. 이로써 버스 안에서의 흑백 차별은 사라지고 버스 보이콧 운동은 운동을 시작한 지 382일 만인 12월 21일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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