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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②] 나폴리, 아말피, 카라라, 친퀘테레

by 김지지

 

■나폴리, 전성기 때는 유럽 제2의 도시

 

카프리 섬을 뒤로 한 채 우리 일행을 태운 페리호가 향한 곳은 나폴리였다. 나폴리는 오늘날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중심도시이자 캄파니아 지방의 주도로, 로마와 밀라노에 이은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 왕국의 전성기였던 17세기에는 파리 다음 가는 유럽 제2의 도시였고 1860년대 이탈리아가 통일될 당시에는 로마보다 더 번창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주류 입장에서 나폴리는 1860년대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까지는 시칠리아와 더불어 무관심의 땅이었다. 700년 이상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의 승자들이 번갈아가면서 지배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탈리아 주류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카프리 섬을 떠난 페리호가 1시간 정도 지나 나폴리 항에 근접했을 때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13세기 말에 지어진 거대한 누오보 성이다. ‘새로운 성’이라는 의미의 누오보 성은, 프랑스 앙주 가의 샤를 1세가 1266년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후 그의 명령에 따라 지어졌다. 당시 나폴리는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였다.

누오보성

 

나폴리 항 인근의 산타루치아 항에는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델로보 성(일명 달걀성)이 있다. 12세기에 노르만 족이 나폴리의 해안을 방어하는 요새로 세웠다가 창고와 감옥으로 사용했다. 나폴리는 한때는 ‘남부 이탈리아의 디바’라고 칭송받을 만큼 여행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요즘에는 인프라가 낙후되고 경제적으로 뒤떨어져 대낮에도 노상강도가 설친다고 한다. 그래서 외지인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치안이 확보된 거리만 골라서 걸어다니라는 조언을 듣는다.

델로보성

 

한때는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렸으나 지금의 모습은 세계적인 미항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과거에는 유럽 도처에서 군인들이 몰려와 유럽 최악의 성병 발원지로도 악명이 높았다. 2차대전 때도 연합군이 성병으로 고생했다. 그래서 갖게된 오명 중 하나가 ‘유럽의 창녀’이다.

 

세계적 박물관과 미술관이 자랑

그렇다고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로마, 밀라노와 함께 여전히 이탈리아 3대 오페라 극장이 있을만큼 성악이 건재하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1737년 개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 극장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오페라 가수들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보다 산 카를로에서의 초연을 최대 영광으로 여겼다.

산 카를로 극장

 

나폴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이 있다. 박물관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의 조각, 부조, 프레스코, 모자이크 등 엄청난 유물을 자랑한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출토품 다수를 소장하고 있는 곳도 나폴리 박물관이다. 3개 층에 걸쳐 160개 방에 전시된 카포디몬테 미술관의 르네상스 시기 작품들도 세계적 수준이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비견된다.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박물관 소장품들 중에는 파르네세 가문의 콜렉션에서 나온 보물들이 많다. 파르마 공국을 다스리던 파르네세 가문은 바오로 3세 교황과 엘리사베타 페르네세 스페인 왕비를 배출한 이탈리아의 명문가로 오랜 시절 최고급 예술품을 수집했다. 그러다가 가문의 후손인 카를로스 3세가 1730년대에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된 것을 계기로 예술품들을 나폴리로 옮겨와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보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물관 1층에는 조각이 많다. 파르네세 컬렉션을 비롯해 헤르쿨라네움, 폼페이 그리고 캄파니아 주 여러 도시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소유주의 이름에서 딴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다. BC 4세기 시키온 출신의 리시포스가 만든 ‘헤라클레스의 휴식’이라는 청동상을 216년 모각한 것이다. 1500년대 중반 로마의 카라칼라 대욕장에서 발견되었다. 로도스 섬에 원작이 있는 ‘파르네세의 황소 군상’ 모작도 걸작이다. ‘파르네세의 아틀라스’도 유명한데 150년 경 그리스 원작을 모사한 것이다.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

 

박물관의 메자닌 층에는 고대 모자이크 작품이 주를 이룬다. 특히 폼페이 유적지에서 떼어낸 모자이크가 많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BC(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초대형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다. ‘비밀의 방’에는 폼페이에서 출토된 선정적인 그림과 조각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3세 간에 벌어진 이수스 전쟁(BC 100년 경)을 묘사한 프레스코화(582×313㎝). 나폴리 국립 고고학박물관 소장

 

나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자 이탈리아 피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폴리 피자는 바삭거리지 않고 쫀득한 피자 도우와 풍미가 좋은 치즈가 일품이다. 지중해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답게 대형 크루즈선이 수시로 기항한다. 21세기 들어서는 중국의 유럽 진출 총본부로 활용되고 있다. 곳곳에 중국인이 넘쳐나면서 중국인들 특유의 추태가 다반사로 벌어지지만 그래도 나폴리 사람들은 “중국인 덕분에 일자리와 돈이 넘친다. 거리에 침을 뱉고 와인을 병째로 마시지만 나폴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며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나폴리·시칠리아 역사

 

나폴리의 역사는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5~6세기 경 그리스 정복자들이 도시를 세운 뒤 신도시라는 의미의 ‘네아폴리스’라고 부른 것이 나폴리 역사의 시작이다. BC 4세기 초 고대 로마제국에 편입되긴 했으나 스페인, 아프리카, 프랑스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늘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제국에 속해 있다가 AD(기원후) 8세기 말 나폴리공국으로 독립했으나 11세기 초 노르만 족 출신의 바이킹 후예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면서 나폴리와 시칠리아 섬은 또다시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르만인들은 그 무렵 남부 이탈리아에서 각축하는 교황 세력, 신성로마제국, 비잔틴제국, 롬바르디 세력, 아랍인들을 상대로 100여 년간의 전투와 정복사업을 펼친 끝에 1130년 마침내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나폴리 포함)를 통합한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시칠리아 북쪽의 팔레르모를 수도로 삼았다.

사실 노르만 세력은 그로부터 70여년 전인 1066년 잉글랜드에도 상륙,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족 군대를 전멸시키고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된 바 있다. 노르만 족은 시칠리아 왕국에 다양한 종교·인종·문화를 융합해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폈다. 덕분에 시칠리아 왕국은 11~13세기 지중해를 포함한 유럽 전체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시칠리아 왕국의 여성지배자 콘스탄체가 1194년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와 결혼함으로써 시칠리아 왕국은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콘스탄체는 노르만 계열 시칠리아 왕조의 마지막 후계자로 기록되었다.

시칠리아 왕국은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가의 황제 겸 시칠리아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시칠리아 국왕명은 페데리코 2세) 치세 때 정치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250년 그가 죽으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프랑스 남부 앙주 공국이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 남부 이탈리아를 포함한 시칠리아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앙주 세력은 착취만 할 줄 알았지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특히 카를로 1세(프랑스어로 샤를 1세, 재위 1266~1285)는 과중한 세금을 매겨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11~13세기 유럽 전체에서 가장 번영한 국가

1282년 3월 30일 부활절에 왕국의 수도인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군인이 시칠리아 여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교회의 마지막 종소리(만종·晩鐘)를 신호로 봉기가 일어났다고 해서 역사에 ‘만종 사건’으로 기록된 그날의 거사는 주민들이 밤새 프랑스 점령군과 그 가족을 살해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튿날 아침 동틀 무렵, 프랑스군과 협력자 가족의 시체 2,000~4000여구가 나뒹굴었다.

반란 주민들은 봉기 한 달 여만에 시칠리아 섬 전체를 장악하고 카를로 1세를 쫓아냈다. 그러고는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자유민임을 선언한 뒤 베네치아나 피사처럼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의 지위를 부여해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 출신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카를로 1세의 복귀를 명령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 주민들은 카를로 1세의 보복이 두려워 독일 호엔슈타우펜 가의 방계 가문이자 현재의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에 기반을 둔 아라곤 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아라곤이 함대와 병력을 보냄으로써 ‘13세기판 세계대전’으로도 불린 시칠리아 독립전쟁(1282~1302)의 막이 올랐다. 세계대전으로 불린 이유는 로마 교황, 프랑스 앙주 왕가, 시칠리아, 아라곤,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 신성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이 끼어들어 국제전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전쟁은 관련 국가들이 ‘앙주 가는 시칠리아 섬을 아라곤 왕국에 양도하고 남부 이탈리아만 통치한다’는 내용의 평화조약을 1302년 맺으면서 막을 내렸다.

앙주 가는 남부 이탈리아를 다스리면서 이 지역을 나폴리 왕국으로 불렀다. 그러면서 시칠리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자신들을 ‘시칠리아 왕’으로 칭했다. 그런데 당시 아라곤 세력도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칭해 ‘양(兩)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말이 생겼다. 시칠리아 독립전쟁은 이렇게 발발 20년 만에 아라곤의 시칠리아 통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서구세계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동력을 잃었다. 이슬람과의 전쟁에 투입될 주요 국가들이 반목했기 때문이다.

최대 피해자는 교황청이었다. 권위가 흔들려 ‘아비뇽의 유수’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분열과 환멸이 더욱 커져 종국에는 종교개혁이라는 대사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아라곤 왕 겸 시칠리아 국왕 알폰소 5세(1396~1458)가 1442년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두 개의 왕국을 통합한 후 스스로 ‘양(兩) 시칠리아 국왕’으로 칭했다. 알폰소 5세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서는 알폰소 1세로 불린다. 알폰소 5세는 르네상스 시기의 다른 군주들처럼 예술가들과 문인들을 후원했다. 그의 재위기간에 나폴리 왕국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르네상스 문화가 꽃을 피웠다.

나폴리 전경

 

1861년 새로 등장한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돼

‘양 시칠리아 왕국’은 알폰소 왕이 1458년에 죽으면서 또 다시 두 개 왕국으로 분리되었으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1452~1516)가 1501년 두 왕국을 통합한 뒤 그 무렵 자신이 구축한 스페인 제국에 지배권을 두면서 스페인의 장기 통치지역이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과 결혼하고 1492년 그라나다를 점령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을 스페인에서 몰아내고 스페인 통합 왕조를 구축한 인물이다. 페르난도 2세는 왕명이 여럿인데 이사벨 1세가 사망한 1504년까지는 ‘카스티야의 군주 페르난도 5세’로, 1504년부터는 ‘나폴리의 군주 페르디난도 3세’로 불렸다.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죽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1500~1558·스페인어로는 카를로스 1세)가 아라곤 왕국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를 모두 물려받음으로써 스페인 제국의 첫 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 왕조의 지배를 계속 받다가 18세기 초 시칠리아 지배권은 이탈리아의 사보이 공국(현재의 프랑스 앙시 부근)으로, 나폴리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으로 잠시 넘어갔다.

오스트리아와 사보이는 1720년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를 맞바꿨다. 즉 사보이는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에, 오스트리아는 사르디니아를 사보이 공국에 넘긴 것이다. 이로써 오스트리아가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통합․지배했으나 지배권은 머지않아 스페인으로 다시 넘어갔다. 그러다가 1799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이탈리아를 침공,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당시 스페인계 왕인 페르디난드는 시칠리아로 달아났다가 1800년 영국 넬슨 제독의 도움을 받아 나폴리로 돌아와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

시칠리아는 한동안 영국의 보호를 받다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가자 페르디난드 왕이 1816년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을 통합해 ‘양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새 왕국명을 사용하고 그 자신은 양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이후 이 왕국은 1860년 가리발디가 이끄는 민병대와 사르디니아 왕국의 협공을 받아 해체되어 사르데냐 왕국으로 병합되었다가 1861년 새로 등장한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1130년부터 1860년까지 700년 이상 한번도 자신들을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시칠리아와 나폴리 사람들은 갑자기 이탈리아 국민으로 탈바꿈했다. 그들이 이탈리아 국민으로 산 것은 최근 150여 년에 불과하다.

 

■아말피 해안도로는 ‘꿈의 드라이브 코스’

 

소렌토에서 57㎞ 정도 떨어진 동쪽의 살레르노 쪽으로 가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도로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유명 관광지 아말피 해안도로(163번 국도)다. 1,000여 개의 절벽을 깎아 만든,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지나다보면 도로 위로는 숲과 아름다운 저택들이, 도로 아래로는 코발트색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199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199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50곳 중 한 곳’으로 선정했던 ‘꿈의 드라이브 코스’다.

아말피 해안도로

 

해안도로는 폭이 좁고 곡선도로가 많고 황홀한 풍경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천 번의 굽이 길’로 불린다. 자동차로 달리면 교통사정에 따라 1~2시간 정도 걸린다. 해안도로는 완공하기까지 47년이나 걸렸다. 좁다란 왕복 2차선 도로 중 일부 구간은 900년 전 만들었다.

해안가로 내려가면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과 지중해로 흘러드는 티레니아해의 쪽빛 물결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을 따라 늘어선 집들이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최고의 경관을 연출한다. 그래서 누구나 승용차로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을 꿈꾸지만 성수기 때의 승용차 운전은 불편한 점도 있다. 길이 좁고 구불구불한 곡예길이어서 운전에 신경쓰다보면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그 멋진 해안가 풍경을 마음껏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림같은 지중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중간중간에 있긴 하나 협소한데다 차량이 많이 몰리면 마음대로 주차할 수 없다. 결국 현실적인 대안은 버스(SITA Bus)를 타는 것이다. 버스는 1~2시간마다 운행되므로 중간에 내려서 둘러보고, 수영하고, 커피나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버스를 타면 된다. 길이 좁아 양방향 운전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도 기사들은 곡예 하듯 잘도 달린다.

아말피 해안도로 주변 마을 위치

 

소렌토를 벗어나 해안도로에 진입한 후 처음 만나는 작은 마을이 포지타노다. 마을로 들어서면 바다 앞 계곡 절벽을 따라 들어선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여행자를 반긴다. 빼곡히 들어선 집들의 벽은 주황, 노랑, 파란색으로 멋을 냈다. 절벽을 따라 시원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와 음식점도 많다.

포지타노를 지나 다음 만나는 마을은 아말피다. 이곳은 소렌토와 살레르노 중간 지점에 위치한 물리니 계곡의 좁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다. 코발트 블루빛의 파란 바다 위에 하얀 요트가 점점이 떠 있는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인구라야 5,0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어촌마을이지만 아름다운 해안, 최고 절경의 해안도로, 1년 내내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 등으로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최고의 휴양지로 널리 알려졌다.

 

아말피 해안 2차대전 후 세계적 관광지로 유명해져

4세기에 형성된 아말피는 지금은 작은 마을이지만 과거 9~12세기에는 베네치아, 제노바와 함께 지중해를 호령하던 해상왕국이었다. 그러다가 12세기 시칠리아와 피사에 잇따라 정복되고 십자군전쟁 때 동방으로 향하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의 해상로가 발전하면서 아프리카와 스페인 쪽으로 향해있는 아말피는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마을 안쪽 어귀에는 당시의 활발한 대외무역을 증명하듯 여러 양식이 혼합된 웅장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특히 9세기에 지어진 성 안드레아 대성당은 여느 이탈리아 두오모와는 달리 화려한 문양, 아치형 창문, 무어리시 스타일의 기둥을 자랑한다. 성 안드레아는 베드로 성인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부들의 수호성인이자 아말피의 수호성인이다. 대성당은 여러 번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날에는 로마네스크, 비잔틴, 고딕, 바로크 양식을 모두 품고 있는 독특한 건축물 모양을 하고 있다.

아말피는 13세기 중동 상인이 종이 제조법을 전파한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종이가 만들어진 마을이다. 아말피산 수제 종이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품질을 인정받아 지금도 바티칸 교황청에서 서신을 보낼 때 사용한다고 한다. 1343년 대지진으로 도시와 전 주민이 바닷속으로 빠져버린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아말피 마을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아말피 해안이 유명해진 데는 미국의 영향이 컸다. 2차대전 중 나폴리가 미국의 군항으로 이용되면서 나폴리는 물론 소렌토 같은 주변 도시들까지 미군과 미군 가족들의 주요 휴양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노의 포도’ 소설가이자 여행 에세이스트인 존 스타인벡이 당시는 무명이던 포지타노를 중심으로 이 지역을 소개한 것도 아말피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재클린 케네디도 가족의 여름 휴가지로 이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아말피 해안은 급속하게 세계의 관광지로 알려졌다.

우리에게는 2013년 제작된 대한항공의 CF 후 유명해졌다. CF 중 ‘내가 사랑한 유럽 톱 10’이라는 게 있는데 그중 ‘달리고 싶은 유럽’에서 아말피는 오픈카 일주로 1위로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베니스 곤돌라는 4위, 스위스 알프스 산악열차는 8위였다.

 

■카라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리석 산지

 

오늘의 일정은 로마에서 북쪽으로 5시간 남짓 버스로 이동하는 북서부의 해안가 도시 라스페치아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라스페치아 지방의 5개 해안 마을 ‘친퀘테레’다. 라스페치아는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20개 주 가운데 하나인 리구리아 주에 속한다.

버스가 라스페치아에 도착하기 30분 전 쯤, 고속도로 오른쪽 멀리 만년설 같은 것이 보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Carrara)’라며 “대리석을 까라라”로 기억하라고 알려줘 웃음을 샀다.

여행에서 돌아와 ‘카라라’를 검색해보니 그곳은 이탈리아 북서부 토스카나 주에 속한 작은 도시였다. 앞의 바닷가 쪽으로는 지중해 해변이 펼쳐있고, 뒤의 산 쪽으로는 고대 로마시절부터 유명한 양질의 대리석 산지가 있다. 해발이 1850m나 되는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멀리서 보면 산 전체가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얗다. 카라라는 세계최대 대리석 산지답게 2000년 전부터 대리석을 채석했는데도 앞으로 2000년 정도 더 채취할 양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청회색 대리석도 산출되지만 눈처럼 흰 백색의 대리석이 특히 유명하다.

카라라  대리석 단지

 

카라라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이곳에서 채석한 대리석으로 각종 명작을 조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부터였다. 미켈란젤로는 카라라에서 다량의 대리석을 확보해 인근 바닷가로 가지고 가서 선박을 통해 로마로 운송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나 ‘피에타’와 같은 조각들이 모두 카라라에서 채석한 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카라라 덕분에 조각도시로 발전한 곳은 카라라에서 남쪽으로 약 17㎞ 떨어진 해안가 소도시 피에트라 산타이다. 카라라에서 생산된 백옥 같은 대리석을 유통·가공하는 곳도 피에트라 산타다. 이곳에는 카라라에서 채석한 좋은 석재가 많아 옛날부터 전 세계의 조각가들이 즐겨 찾았다. 그 덕에 오늘날은 ‘조각가의 성지’로 명성이 높다. 르네상스 시절의 미켈란젤로는 물론 근현대 거장인 호안 미로, 헨리 무어, 안토니오 카노바, 데미안 허스트 등도 이곳에서 작업했다. 미술대학도 있어 조각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이 세계 도처에서 찾아온다.

 

■친퀘테레, 고립된 채 살아온 해안가 ‘다섯 개 마을’

 

친퀘테테를 둘러본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다시 3시간 정도 떨어진 밀라노로 간다. 결국 로마를 떠나 하룻동안 장장 8시간 정도 차를 타야 하는 강행군이다. 친퀘테레로 가는 고속도로는 우리로 치면 서해안고속도로에 해당한다. 고속도로에서 본 차창 밖의 집들은 주로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운전기사는 이탈리아에서는 2시간 운전에 30분 휴식이 법적으로 의무라며 한 휴게소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고속도로에서는 우리와 달리 휴게소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속도로도 차량이 적어 도떼기 시장 같은 우리 휴게소와 비교하면 깔끔하고 단촐했다. 서쪽 고속도로에는 구릉지만 있고 큰 산이 없어서인지 터널을 처음 만난 것도 로마를 출발해 2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전히 차창 밖 세상은 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연초록의 연속이어서 눈이 호사했다.

친퀘테레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 상단 앞쪽 리구리아 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라스페치아에 도착한 것은 로마를 출발해 5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우리는 친퀘테레로 이동하기 위해 라스페치아역에서 30분~1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는 열차를 탔다. 열차는 해안가 절벽 안을 뚫은 철도를 지나갔는데 문득 스위스 융프라우행 산악 열차가 생각났다. 우리는 친퀘테레 5개 해안 마을 중 2개 마을만 들렀다. 이탈리아어로 ‘친퀘(Cinque)’는 ‘다섯’이고, ‘테레(Terre)’는 ‘땅’이다. 따라서 친퀘테레는 ‘다섯 개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들은 도로를 닦기 힘든 해안 절벽의 좁은 틈에 형성되어 있다. 외부와 연결하는 차길이나 마차길이 없어 주민들은 오랫동안 고립된 채 주로 바닷길을 이용했다. 마을끼리는 좁은 해안길을 아슬아슬하게 걷거나 가파른 숲을 통과하는 식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다보니 외지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이름조차 생경한 외딴 곳이었다. 그러던중 1870년대에 이르러 제노바~라스페치아 구간 해안가에 철도가 놓이면서 외부와 연결이 순조로워졌다.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세계문화유산(1997년)과 이탈리아 국립공원(1999년)으로 지정되면서였다. 유네스코가 이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이 아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차곡차곡 돌담을 쌓아올려 테라스를 만든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친퀘테레 마나롤라 마을

 

파스텔톤의 집, 좁은 골목길, 동화같은 포구, 소담스런 레스토랑이 특징

친퀘테레의 5개 해변마을은 한결같이 파스텔톤의 집, 좁은 골목 길, 동화같은 포구, 소담스런 레스토랑이 특징이다. 해안가 절벽에 난 좁은 길 아래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길 위 산비탈은 포도와 올리브 밭이 어우러져 있다. 친퀘테레는 남쪽에서 북쪽 마을 순으로 리오마조레, 마나롤라, 코르니글리아, 베르나차, 몬테로소 알 마레 등 5개 마을의 통칭이다. 마을과 마을로 이동하려면 기차를 타거나 ‘하늘색 길’로 불리는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배를 타야 한다. 해안선의 총 길이는 15㎞다.

마을과 마을 간의 거리는 1~4㎞에 불과하지만 두 마을을 잇는 트레킹 코스는 내륙 쪽으로 우회할 경우 5~7㎞로 늘어난다. 친퀘테레에서는 5개 마을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구입하면 원하는 기간 편리하게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다.

친퀘테레 지도. 위키트래블 제공

 

5개 마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리오마조레는 친퀘테레의 관문 역할을 한다. 이 마을은 기차역에서 내려 긴 보행터널을 통과해야 나타난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똑같은 색이 하나도 없는 수백 채의 집이 나타나는데 문득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이 떠오른다. 친퀘테레의 모든 집이 각기 다른 색을 갖게된 이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어부들이 술에 취하면 자신의 집을 헷갈려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색으로 칠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다.

리오마조레 마을에서 마나롤라 마을까지의 거리는 열차로 2분도 채 안될 만큼 짧았다. 두 마을은 아름다운 경치와 걷기 쉬운 곳으로 알려진 ‘연인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마나롤라 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 내려가니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세 가지 풍경이 한 번에 펼쳐진다. 요동치는 옥빛 바다, 늘어선 해안 절벽, 그리고 절벽 위에 세워진 파스텔 톤의 집들이다.

마나롤라는 절벽 위나 바위 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파스텔 톤의 이국적인 집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이 마을은 12세기 경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절벽 위에 집을 지었다. 지금은 절벽 꼭대기에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별도 해변은 없지만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큰 바위 아래쪽이 마치 수영장처럼 되어 있어 편안하게 바다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세 번째 마을 코르니글리아는 친퀘테레에서 유일하게 해변이 아닌, 높은 언덕 위 산비탈에 들어서 있어 다른 해변마을과는 모양새가 다르다. 기차역에서 마을까지 가려면 360여 개 계단을 올라가거나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네 번째 마을 베르나차의 자랑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건물들과 예쁜 성당이 있고 작은 방파제 안쪽으로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에는 로마시대부터 사용해온 항구가 지금도 있다. 다른 마을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있어 바다로 접근하기 쉬워서인지 예로부터 이 마을은 부근을 지나가는 무역선들을 해적질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다섯 번째 마을인 몬테로소와 이곳에만 설치된 망루는 자신의 마을을 노략질하려는 해적선을 빨리 발견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자신들이 표적으로 삼으려는 무역선을 발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마을 순례의 종착점인 몬테로소 알 마레는 친퀘테레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숙소도 다양해서 여행자가 많이 머문다. 맑디맑은 지중해와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관광객들이 찾아와 일광욕이나 해수욕을 즐긴다. 베르나차에서 몬테로소까지는 경사가 가팔라 트레킹에는 난코스다. 시간도 2시간 가까이 걸려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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