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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⑭] 피렌체(4) : 산타 크로체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조르조 바사리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왼쪽)과 산타 크로체 성당

 

by 김지지

 

■산타 크로체 성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에는 두오모 말고도 유명한 성당 두 곳이 있다. 산타 크로체 성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다. 두 성당은 운영 주체가 다르고 위치도 서로 반대편에 있어 역사적으로 미묘한 경쟁심을 보이며 다른 길을 걸어왔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프란치스코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는데 도미니코회는 스페인의 성 도미니코(본명 도밍고 데 구스만, 1170~1221))의 가르침을 따르고, 프란치스코회는 이탈리아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가 설립했다. 두 수도회가 피렌체에 성당을 짓고 뿌리를 내린 것은 13세기 초였고, 경쟁적으로 성당을 크게 짓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성 도미니코(왼쪽)와 성 프란치스코

 

대형 성당을 먼저 짓기 시작한 것은 도미니코회였다. 도미니코회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1278년 착공하고 70여 년만인 1350년 무렵 완공했다. 피렌체 중앙역 이름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인 것은 바로 앞에 동명의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에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조토의 ‘십자가형’, 기를란디요의 연작 그림 ‘마리아와 성 세례자 요한의 생애’,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우피치 미술관에도 보티첼리가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이 있다) 등이 있다. 특히 5년 동안만 활동하다 27살에 요절한 천재 화가 마사초(1401~1428)의 ‘성 삼위일체’(1426~1428)는 브루넬레스키가 처음 고안한 수학적 선원근법이 적용되어 실제와 같은 공간감을 준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667×317㎝)

 

그림 속 인물들의 모습은 100년 전 조토의 인물과 비슷하지만 조토의 인물이 뻣뻣이 굳은 석상을 연상시키는 것과 달리 마사초의 인물은 두꺼운 옷에 감싸여 있는데도 옷 안에 살과 피가 있는 몸이 느껴지고 옷의 주름도 자연스럽다. 이는 고대 로마 이후 최초로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그린 획기적인 변화였다. 현존하는 프레스코화 중 최초로 체계적인 투시원근법을 구현해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신(神)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사회로 옮겨간 시대에 원근법은 인간을 인간답게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성삼위일체’는 르네상스 회화 중 원근법을 가장 먼저 선보인 작품이다. 마사초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물과 흡사한 크기로 그렸고, 엄격한 비율과 구성을 통해 마치 고대 조각처럼 조형적으로 살아 있는 듯한 입체감을 주었다. 똑같은 종교 회화이지만, 마사초는 ‘성삼위일체’를 원근법을 활용해서 마치 벽에 거대하고 깊은 구멍을 판 것처럼 그렸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아랫부분에는 그림 제작을 의뢰한 노부부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 맨 아래에는 해골을 그려넣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피렌체 사투리로 새겼다. “나도 한때 당신과 같았다. 당신들은 지금의 내가 될 것이오.” 이 작품이 제작될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창궐하고 있었는데, 마사초는 예수와 해골 이미지를 통해 재앙의 공포도 알렸다고 한다.

마사초는 이 작품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거리를 전방 6m로 정하고, 이 지점에 서서 그림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실제 이 그림을 분석하면 작품에서 6m 떨어진 감상자의 눈높이에서 예수와 사제, 노부부까지 선을 그은 후 각 인물과 배경을 비례에 맞춰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기를란디요의 연작 그림 ‘성 세례자 요한의 생애’(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알베르티, 르네상스 시대 다재다능한 예술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파사드(성당 정면)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가 설계하고 1456년 착공해 1470년 완성한 파사드는 군더더기 없는 형태만으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알베르티의 건축 철학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롭게 섞여 있고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자랑한다. 미묘한 색의 차이가 있는 하얀색의 대리석을 이용해서 각종 무늬와 배치를 통해 통합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그것을 본 미켈란젤로가 “나의 신부”라며 아름다움을 칭송했다고 한다. 이처럼 알베르티의 파사드, 마사초의 3차원 공간감, 우첼로의 획기적인 원근법 등을 한꺼번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볼 수 있어 이 성당은 ‘살아있는 르네상스 미술관’으로 불린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조각상 (우피치 미술관)

 

알베르티는 음악, 수학, 희곡, 그림, 건축을 섭렵해 르네상스 시대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볼로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피렌체의 메디치가에 출입하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사귀었다. 로마 교황청의 문서관으로도 활동했으나 종교보다는 미술·문예·철학에 많은 저작을 남겼다.

1436년 저술한 ‘회화론’에서는 2차원 화면 위에 3차원 공간을 보여 주기 위한 수학적인 설명과 함께 회화와 조각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최초로 건축이론을 정립한 비트루비우스의 책을 참고해 1450년 완성한 ‘건축론’(10권)에서는 새 시대의 건축을 논하고 근세 건축양식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론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현장감각도 있어 이탈리아 전역에 많은 성당을 설계했다.

 

산타 크로체는 프란치스코회,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도미니코회가 운영

도미니코회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짓는 것을 본 프란치스코회는 1226년 지어진 산타 크로체 성당을 1294년 더 큰 규모로 개축하면서 설계자에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보다 더 크게 지어달라고 주문했을 정도로 미묘한 경쟁심을 드러냈다. 공사 기간은 1443년까지 150년이나 걸렸다. 성당 옆에는 피렌체가 자랑하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거대한 석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성당 안에는 널찍한 본당 바닥과 벽면에 이탈리아가 배출한 위인들의 묘소가 즐비하다. 자그마치 276기나 된다.

그중에는 정치철학자 레오나르도 브루니와 니콜로 마키아벨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조각가 도나텔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음악가 조아키노 로시니, 무선전신의 발명자 굴리엘모 마르코니,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등이 있다. 가히 ‘이탈리아의 판테옹(만신전)’이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동묘지’이다.

산타 크로체 성당 지하의 묘소들

 

참고로 유럽 교회의 묘소는 실제 묘를 쓴 경우와 추모조형(가묘)을 꾸민 경우가 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경우, 마키아벨리의 유해는 추모조형의 관 속에 있고 미켈란젤로는 바닥의 관에 묻혀 있다. 단테 역시 추모조형이고 실제 유해는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 말년을 보낸 라벤나에 묻혀 있다.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는 19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다. 그중 유명한 곳이 파치, 페루치, 바론첼리, 바르디 가문의 예배당이다. 파치 예배당은 브루넬레스키가 1430년에 설계한 것으로 돔형이다. 바르디 예배당에는 조토가 프레스코화로 그린 6개의 그림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죽음’이다. 페루치 예배당에는 조토가 그린 사도 요한과 세례자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다만 19세기에 완성한 산타 크로체 성당의 파사드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와 달리 직선이고 뾰족해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볼품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스탕달 신드롬’을 낳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용어는 스탕달이 자신의 책에서 산타 크로체 교회를 나서는 순간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마구 뛰고 생명이 빠져나가 쓰러질 것 같았다고 쓴 데서 유래한다. 이후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현기증, 위경련, 전신마비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일 때 ‘스탕달 신드롬’으로 설명하고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와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중세는 단테의 ‘신곡’을 거쳐 근대로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신곡’을 유럽 근대문학의 효시로 간주하는 이유다. 단테가 ‘신곡’에서 다듬은 토스카나어는 나중에 이탈리아어의 모체가 되었다. 지방의 사투리가 이탈리아의 국가 표준어가 된 것이다. 단테 시대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단테를 세계 3대 시성으로 분류할 만큼 단테는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단테는 피렌체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7살 때, 아버지는 10대 때 숨져 10대 후반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재산은 어느정도 있어 생활이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테는 9살 때이던 1274년 5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한 살 아래인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이 교회는 오늘날 ‘단테의 교회’로 불리는데 정식 명칭은 ‘키에사 디 산타 마르게리타 데이 체르키’이다. 체르키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세워진 성녀 마르게리타 교회라는 뜻이다. 내부는 달랑 방 한 칸 뿐이어서 교회라기보다는 예배당에 가깝다.

세월이 흐른 뒤 단테가 젬마 도나티라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린 곳도 바로 이 교회였고 젬마의 묘도 이곳에 있다. 교회 안에는 베아트리체의 묘도 있어 오늘날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성소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의 묘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베아트리체 가문의 묘는 이 교회에 있지만 베아트리체는 바르디 가문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묘소에 묻혔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까운 좁은 골목에 ‘단테의 집’으로 불리는 단테 박물관이 있다. 사실 이 집을 ‘단테의 집’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단테가 살았던 집은 아니고 단테가 태어났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세운 기념관이다. 피렌체 시가 단테 탄생 600주년이던 1865년에 ‘단테의 집’이라고 유권 해석을 내림으로써 단테의 집으로 확정되었다. 1911년에 3층 건물로 세워졌다.

단테 박물관 건물 벽에 걸려있는 단테의 흉상

 

단테 알리기에리,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

단테가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위에서 베아트리체를 다시 본 것은 9년이 흐른 1283년 5월 1일이었다. 그날, 베아트리체는 길에서 단테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단테는 심장이 요동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이후 사랑의 열병을 앓았으나 당시 관습에 따라 아버지가 정해준 10살의 젬마 도나티와 13살세 때인 1277년 2월 약혼하고 21살 때인 1286년 결혼했다. 베아트리체 역시 다음해인 1287년에 바르디 가문의 은행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결혼 생활 3년 만인 1290년 6월, 24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슬픔에 빠진 단테는 그때까지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쓴 시를 엮어서 ‘새로운 인생’(1295년)이라는 책으로 간행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넋 놓고 사는 창백한 시인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가였으며 군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교황파와 (신성로마제국)황제파로 갈려 서로를 적대시했다. 피렌체도 마찬가지였다. 교황파 겔프당과 황제파 기벨린당은 종종 음모와 무력을 동원해 권력을 뺏고 빼앗기며 각축전을 벌였다. 교황파와 황제파는 몬타페르티 전투(1260년)와 베네벤토 전투(1266년)에서 살육전을 벌였다.

피렌체 아르노 강변에서 단체와 베아트리체의 첫 만남(1883년, 140×199㎝). 흰옷을 입은 여성이 베아트리체다. 영국의 헨리 홀리데이 작

 

추방 생활을 견디게 해준 것은 베아트리체

교황파였던 단테는 1289년의 캄팔디노 전투에 참가해 승전을 경험했다. 그러나 승전 후 교황파 내에서 교황과 귀족계급의 화해를 주장하는 귀족파인 흑파(네리)와 교황으로부터의 자립과 신흥상인계급의 권익을 추구하는 상인파인 백파(비앙키)로 다시 분열되어 긴장이 조성되었다.

단테는 백파를 지지했다. 단테는 35세였던 1300년 피렌체를 대표하는 6명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친교황인 흑파의 견제를 받았다. 그러던 중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의 샤를 드 발루아의 군대가 피렌체로 접근했다. 단테는 1301년 10월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특사로 로마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단테가 로마에 있던 11월 샤를의 군대가 피렌체로 진격했고, 이것을 기회로 흑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흑파는 1302년 1월 단테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덮어씌워 거액의 벌금, 2년 동안의 추방, 공직 자격 영구 박탈을 선고했다.

단테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오다가 이 소식을 듣고 귀향을 포기했다.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 줄곧 타향을 전전했다. 흑파는 단테에게 법정 출두를 요구했지만 단테가 출두하지 않자 단테가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이후 단테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피사, 루카, 파두아, 볼로냐, 로마, 베로나 등의 도시들을 전전했다.

추방 생활을 견디게 해준 것은 베아트리체였다. 단테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아픔과 망명의 아픔을 승화시켜줄 작품을 구상했다.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5년 후인 1307년 집필을 시작했다. 불후의 장편 서사시인 ‘신곡’이었다.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3편으로 되어 있다. 각 편은 각각 33개의 ‘곡’(曲)으로 이뤄져 있고 여기에 지옥편에만 붙은 서곡을 합쳐 모두 100곡이다. 하나의 ‘곡’은 150행 내외로 전체 1만 4233행에 달한다.

 

‘신곡’에서 부패한 교회와 역대 교황을 신랄하게 비판

단테는 ‘신곡’에서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BC 70~BC 19년)와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지옥과 연옥, 천국을 7일 동안 여행했다. ‘신곡’에서 단테는 당시 부패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역대 교황도 단테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성인(聖人)이 된 교황까지도 ‘신곡’의 지옥에 등장시켰다. ‘신곡’에서 단테의 원한을 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였다. 그에 대한 단테의 독설은 ‘신곡’ 전반에 걸쳐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되었다. 그래서 단테를 종교개혁가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피렌체 두오모 안에 있는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의 그림 ‘단테와 신곡’(1465년). 피렌체의 풍경 앞에 서서 ‘신곡’을 들고 작품 속 배경인 천국과 지옥을 가리키는 단테의 모습이다.

 

‘신곡’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은 ‘지옥편’이다. 중세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기쁨보다는 지옥의 형벌을 면하는 게 일차적인 인생 과제였다. 그들은 자신이 연옥에 가서 죗값을 치러야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정 조건하에서 죗값을 면제해주는 면벌부가 인기였다. ‘신곡’의 ‘지옥편’(1314년)이 먼저 간행되자 단테의 명성이 올라갔다. 그러자 전쟁을 목전에 둔 피렌체의 흑파 정부가 내부 결속을 위해 1315년 단테에게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면 사면과 귀환을 허락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단테는 막대한 벌금과 굴욕적인 공개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는 요구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편지를 보내 파란을 일으켰다.

우려했던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흑파가 단테에게 칼끝을 겨눴다.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모조리 압류했다. 피렌체에 남아 있던 단테의 세 아들에게도 사형을 언도했으나 다행히 세 아들은 무사히 피렌체를 빠져나갔다.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1318년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을 마무리했다.

‘신곡’의 원래 제목은 ‘코메디아(comedia·희극)’였다. 단테는 절망으로 시작해 희망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하지만 최초의 단테 전기를 쓴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신곡’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디비나’(신의, 신성한)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제목이 ‘라 디비나 코메디아’ 즉 ‘신적인 희극’으로 바뀌었다. 우리말 ‘신곡(神曲)’은 일본 작가 모리 오가이가 처음 사용한 일본어 표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신곡’의 가장 큰 의미는 현대적인 이탈리아 표준어를 확립한 것

‘신곡’이 갖는 의미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현대적인 이탈리아 표준어를 확립한 것이다. 단테의 활동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는 저마다 방언을 사용했다. 그러나 ‘신곡’이 발간된 후에는 ‘신곡’에서 사용한 피렌체의 말, 즉 토스카나 방언이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

단테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어로 쓴 까닭은, 그래야 지식인 말고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문체를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이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혁명적이었다. 모국어가 라틴어보다 우월하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글 창제와 같은 충격이었다.

단테의 영향력은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단테의 조각배’(1822년)로 명성을 얻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도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며,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그 조각의 일부다. 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1918년)는 ‘지옥’의 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신곡’을 소재로 ‘단테 교향곡’(1856년)을 쓰다가 “어느 누구도 천국의 기쁨을 음악으로 묘사할 수는 없다”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만류로 ‘지옥’과 ‘연옥’까지만 쓰고 ‘천국’을 단념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단테의 조각배’(1822년)

 

단테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1321년 9월 13일 라벤나에서 사망했다. 유골은 라벤나 시내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장되었다. 피렌체는 이후 수백 년 동안 단체의 유해를 모셔오려고 시도했다. 1519년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는 유해를 피렌체에 반환하라고 라벤나에 명령했다. 그러자 라벤나 시당국은 유해를 숨겨버렸다. 유골은 그로부터 350여 년이 지난 1865년 라벤나의 작은 교회에 안치되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1829년, 유골이 돌아올 것에 대비해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단테의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단테가 세상에 태어난지 600주년 되던 1865년에는 라벤나 출신의 엔리코 파치가 단테의 동상을 조각해 피렌체에 기증했다. 현재 산타 크로체 성당 옆에 있는 동상이다. 단테가 피렌체에서 복권된 것은 2008년이다. 피렌체 시의회는 ‘단테를 추방시키고 피렌체로 돌아올 경우 화형시킨다’는 내용의 1302년 판결을 공식 취소하고 단테에게 최고 훈장을 추서했다

라벤나 있는 단테의 진묘(왼쪽)와 가묘(산타 크로체 성당)

 

■조르조 바사리,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미술사 저술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우피치 궁전을 짓고 ‘바사리 통로’를 건축함으로써 르네상스 건축가로 건축사에 이름을 선명히 새겼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피렌체의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미켈란젤로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1529년 로마를 방문해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고대 로마의 유적을 살펴보면서 예술적 영감을 쌓았다.

조르조 바사리 자화상

 

특히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후원 아래 피렌체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피렌체 두오모의 천장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과 베키오 궁전 벽화 ‘마르시아노의 전투’를 그렸다. 이 베키오 궁전 벽화가 세계적인 뉴스가 된 적이 있다. 벽화 뒤에 3㎝의 틈을 두고 또 하나의 벽이 있는데 이 벽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 걸작 ‘앙기아리 전투’가 500년만인 2012년 발견된 것이다. 연구팀은 바사리가 레오나르도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그의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그림 앞에 또 하나의 벽을 세워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사리는 자신의 벽화 속에 ‘찾으면 보일 것(CERCA TROVA)’이라는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는 1494년 피렌체 공국이 앙기아리에서 벌어진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소재로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504년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나 다음해 피렌체를 떠나면서 벽화를 완성하지 못했다.

조르조 바사리의 ‘마르시아노 전투’

 

바사리는 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독창성과 색채 감각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가로서의 위상은 달랐다. 그는 회화, 조각, 목공, 석공 등 다양한 분야를 건축을 통해 종합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이런 그를 위해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는 아낌없는 지원을 펼쳤다. 바사리가 이탈리아 예술의 화려한 꽃을 피우게 한 것도 권력자 코시모 1세의 든든한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언급할 때 항상 거론되는 이름

그럼에도 오늘날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언급할 때 그의 이름이 항상 거론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미술사에서 첫 손에 꼽히는 대작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를 썼기 때문이다. 원래 제목은 ‘토스카나 말로 쓴 치마부에부터 오늘날까지의 가장 훌륭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그리고 조각가의 전기’다. ‘미술가 열전’은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사로 르네상스 예술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시대를 꿰뚫은 유일한 저술이라 르네상스 미술을 공부하는 데 필수적이다.

바사리 통로

 

우리가 13~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인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과 일화들은 대개 이 책에 의존하고 있다. 책에는 치마부에, 피사노, 조토에서 시작해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레오나르도, 티치아노, 산소비노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 명의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이 담겼다. 인물별로 현장답사를 위주로 작품을 살피고 평문을 곁들였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는 죽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미켈란젤로는 생존해 있었고 베로네제, 틴토레토 등을 비롯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장식하는 주역이 될 많은 미술가들이 활동하던 중이었다. 그런점에서 이런 거장들과 가까이 지낸 바사리는 그 시대의 미술사를 쓰기에는 적임자였다. 바사리가 고대의 재생, 부활을 뜻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레나시타’(renascita)는 훗날 ‘르네상스’라는 말의 기원이 되었다. ‘고딕’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책에서다.

바사리는 1550년 2권으로 된 두꺼운 초판을 출간하고 1568년 개정 증보판을 냈다. 오류가 적지 않으나 그럼에도 이 책이 지닌 중요한 기여 중의 하나는 바사리 이전에는 회화, 조각, 건축을 단지 ‘손재주’ 정도로 여겨왔으나 바사리가 이 3종의 기예를 하나로 묶어 인간의 창조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으로 확립시켰다는 데 있다. 바야흐로 회화, 조각, 건축이 중세의 기술이라는 개념과 결별하고 예술가도 그에 합당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바사리는 코시모 1세가 권좌에서 물러나 사망한 몇 달 후인 1574년 6월 27일 숨을 거뒀다.

조르조 바사리의 ‘열전’ 개정증보판(15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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