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美 제시 오언스, 올림픽 역사상 육상 부문 최초 4관왕

대학생 때 미 육상계 최고 유망주로 떠올라

제시 오언스(1913~1980)는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해방 노예의 손자로 태어나 남부의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서 성장했다. 9살 때 가족이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로 이사한 것은 이런 인종차별이 싫어서였다. 오언스는 그곳에서 달리기의 구세주를 만났다. 초등학교 때 만난 백인 체육 교사 찰스 라일리였다.

오언스는 그의 지도를 받아 일취월장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100야드(91.4m) 경기에서 전국 고교 기록에 근접하는 기록을 세우고 고교 졸업 무렵에는 9초4라는 세계기록과 타이기록을 세웠다. 그러자 28개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오하이오주립대에 입학했다.

오언스에게 1935년 5월 2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전국 유명 10개 대학의 ‘빅 텐’ 대회에서 불과 45분 만에 멀리뛰기, 220야드, 220야드 허들 3종목에서 3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100야드에서 세계 타이기록 1개를 수립해 미 육상계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때 세운 멀리뛰기 기록은 그 후 25년간 깨지지 않았다. 이후 오언스는 ‘검은 탄환’으로 불리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준비했다.

오언스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m 10초3(8.3), 멀리뛰기 8m 6cm(8.4), 200m 20초7(8.5)로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도 성이 차지 않아 8월 9일 400m 계주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올림픽 역사상 육상 부문 최초의 4관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1984년 칼 루이스가 LA 올림픽에서 4관왕에 오를 때까지 48년간 깨지지 않았다. 우승도 우승이지만 예선과 결승을 포함한 4종목 12회 레이스에서 올림픽신기록 9개, 세계신기록 및 타이기록 4개를 수립해 오언스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가를 입증해 보였다.

 

히틀러가 오언스의 악수를 피했다는 것은 헛소문

오언스는 세계적으로 반인종주의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부상했다. 히틀러가 오언스와의 악수를 피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소문의 사연은 이랬다. 대회 첫날인 8월 2일, 히틀러는 독일의 육상 금메달리스트를 비롯한 몇몇 우승자를 VIP석으로 초대해 악수를 나눈 뒤 다른 스케줄 때문에 스타디움을 떠났다. 그날 미국의 흑인 선수 코넬리우스 존스도 높이뛰기 정상에 올랐으나 늦게 경기를 펼쳐 이미 자리를 떠난 히틀러의 축하를 받지 못했다. 그러자 미 언론은 “히틀러가 흑인인 존스와 악수하기 싫어 자리를 떴다”는 기사를 전송했다. 히틀러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는 올림픽위원회의 지적을 받고서 8월 3일부터는 더 이상 금메달리스트들을 불러 악수를 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오언스와의 악수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또다시 돌았다. 훗날 오언스가 자서전에서 “자신이 VIP석 앞을 지날 때 히틀러가 일어나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자신도 히틀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고 밝혔음에도 소문은 계속 사실인 양 돌아다녔다. 오언스는 “미국 언론이 히틀러를 비난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얘기”라며 소문을 일축했다. 오언스는 베를린에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올림픽 폐막 후 영웅을 맞은 것은 여전한 인종차별

문제는 그의 조국 미국이었다. 올림픽 폐막 후 영웅을 맞은 것은 여전한 인종차별이었다. 축하 퍼레이드를 마치고 호텔 환영식장에 올라갈 때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개선한 영웅에게 백악관에 초청하기는커녕 축하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미 육상연맹도 매년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주는 설리번상을 1935, 1936년 연속 오언스가 아닌 다른 선수에게 수여했다. 영웅은 학비가 없어 학업도 일시 중단해야 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후 운동 교사로 근무하던 어느 날 한 백인에게서 제안이 들어왔다. 흑인들 간의 야구 리그를 시작할 예정인데 경기 전 경주용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하면 거액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오언스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말은 물론 개, 오토바이 등과도 달리기 경주를 하며 돈을 벌었다.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으나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후회했다. “나는 나 자신을 새로운 노예로 팔아먹게 되었다. 이미 나는 자랑스러운 올림픽의 영웅이 아니라 짐승과 경쟁을 해서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곡마단의 어릿광대, 아니 난쟁이가 되고 만 것이다.” 오언스는 ‘제시 오언스 세탁소’에도 이름을 빌려주어 한동안 큰돈을 벌기도 했으나 업자가 파산하고 잠적해 5년 동안 꼬박 빚을 갚기도 했다.

다행히 육상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올림픽 팀의 자문위원으로 추대되고 미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책도 4권 출판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 중 1개는 2013년 역대 올림픽 기념물 최고가인 146만 7,000달러(약 15억 5,000만 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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