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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⑧] 밀라노(2) :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베로나, 아레나 경기장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지에 수도원에 그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by 김지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

 

밀라노에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그림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이다. 레오나르도가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최후의 만찬’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495년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12명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예수는 이 만찬을 마친 뒤 겟세마네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곧바로 끌려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곳은 밀라노에 소재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부속 식당이다. 이 수도원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한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했다. 당시 이탈리아 수도원에는 어딜가도 ‘최후의 만찬’ 그림이 흔했다. 수도사들이 식사 중에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성찬의 의미를 묵상하라는 의도였다. 따라서 주제 면에서는 레오나르도 작품이라고 해서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원근법을 완벽하게 구현해 양식적 측면에서는 혁신적이었다.

레오나르도는 460×880㎝나 되는 대형 그림의 네 귀퉁이가 실제 식당의 천장과 벽 모서리가 맞닿아 있는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림 속의 방을 식당과 연결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다보니 식당에 들어선 수도사들은 예수와 12명 제자들이 벽 저쪽 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진짜로 식사하고 머리 위 그림 속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실제 식당 공간을 비추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오늘날 ‘최후의 만찬’은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레오나르도가 재료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그림이 금방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프레스코화 기법을 쓰지 않고, 템페라 물감과 기름을 혼합 사용해 얼마지나지 않아 벽화 바닥이 들뜨고 곰팡이가 생기는 등 상태가 나빠진 것이다. 프레스코화는 젖어 있는 회벽에 안료를 칠하면 벽이 마르면서 그림이 벽의 일부가 되어 단단하게 달라붙는 방식이다. 벽이 아닌 다른 곳, 예를 들면 목판 등에 그림을 그릴 때는 템페라 기법을 사용했다. 템페라는 안료에 계란 노른자를 섞어 끈적거리게 만들어서 그림이 목판에 붙게 만드는 기법이다. 프레스코 보다는 세밀한 표현에 유리하다.

 

‘최후의 만찬’ 원근법을 완벽하게 구현

레오나르도는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림의 장소가 수도원의 식당 벽이라는 사실이었다. 반대편에는 부엌이 있었다. 식당과 부엌에서 나오는 습기 때문에 그림은 마를 새가 없었다. 결국 그림은 벽에 제대로 달라붙지 못한 채 안료가 쉽게 벗겨졌다. ‘최후의 만찬’은 1497년 완성된 후 얼마지나지 않아 훼손되기 시작하더니 몇십 년 만에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복원 시도가 되풀이 되었지만 복원 작업은 오히려 그림을 더 빨리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레오나르도 본인도 벽화 위에 새 안료를 바르면서 훼손을 막아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림이 망가진 데에는 외부적 요인들도 있었다. 179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벽화가 있는 수도원을 마구간으로 사용한 것도, 1943년 2차대전 중 폭격으로 식당이 무너진 것도 작품 손상을 가속화했다.

다행인 것은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후, 레오나르도의 후배 화가가 베껴 그린 그림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을 기준 삼아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2년간 마지막 복원이 이뤄졌다. 그래도 “복원 화가들이 80%, 다빈치가 20%를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는 피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밀라노 시는 작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입장객 수와 관람시간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그림 중 원근법을 잘 드러낸 그림은 ‘최후의 만찬’ 말고도 또 있다.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 예수의 외할머니인 성 안나가 등장하는 ‘성 안나와 성 모자’(168×130㎝·1510년경)다.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레오나르도는 과학자, 발명가, 해부학자, 군사전문가, 건축가, 음악가 등 다방면에 두루 뛰어난 만능형 천재였다. 회화, 철학, 시, 작곡, 연주, 악기제작, 요리, 육상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능통했다. 심지어는 귀족이나 부자가 귀빈을 초청해 자신의 고상한 취미를 과시하려고 할 때도 레오나르도가 나서 파티와 만찬회를 주관했다. 와인 애호가답게 직접 포도를 경작해 와인을 제조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수시로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평소 갖고 다니던 노트에 글과 스케치로 기록한 메모광이었다. 노트에는 기중기, 태엽 자동차, 스스로 움직이는 로봇, 글라이더, 물 위를 걷는 신발, 깊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배 등 온갖 설계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기록·낙서 등이 7000페이지가 넘는다. 인체를 탐구하기 위해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도 끊임없이 그렸는데  그가 해부한 사람의 시체만 30구가 넘었다.

 

문제는 레오나르도가 주문받은 일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공증인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어로 다빈치의 ‘da’는 ‘of’나 ‘from’의 뜻이므로 ‘빈치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러하듯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 대부분은 가운데 ‘다(da)’를 붙이고 있다. 다만 귀족들은 출신지를 표시할 때 ‘데(de)’나 ‘디(di)’를 사용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 같은 식이다. 큰 도시는 ‘da’를 뺀 채 그냥 ‘○○ 사람’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예를들어 화가 로소 피오렌티노는 피렌체 출신이고, 이탈리아 전 대통령 조르지오 나폴리타노는 나폴리 사람이다. 레오나르도는 14살이던 1466년 당시 피렌체의 유명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5~1488)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수업을 받았다. 당시 그곳에는 장차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가 될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도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베로키오는 회화, 조각, 판화, 수공예, 모자이크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아 제자들과 함께 수공업 장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방에서 만들었다. 조각, 부조, 흉상은 물론 야외분수장식도 제작하고 성당 신부의 사제복 단추 고리, 술잔과 꽃병, 촛대 등도 만들었다. 회화 작품은 많지 않았지만 유명 작품도 있었다. 1470년 작 ‘그리스도의 세례’(177×151㎝)다. 인체 지식과 자연 공간을 이용한 배경 연구가 어떤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실 이 그림은 14세의 애송이였던 레오나르도가 스승인 베로키오를 도와 그림 왼쪽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는 천사를 그리자 이를 보고 제자의 천재적인 솜씨에 감탄한 베로키오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그 뒤로 그림을 멀리했다는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레오나르도는 20세에 화가 길드에 가입했으나 26세가 될 때까지 베로키오의 공방에 속해 있으면서 철학, 문학 등의 고전에서부터 원근법, 수학, 시각이론 등 제도권에서 배우지 못한 지식을 차근차근 쌓았다. 그 시절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누가 보아도 최고였다. 문제는 이 팔방미인이 주문받은 일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1478년 처음 그림을 주문받았을 때도 밑그림만 그리고 그만 두었다. 1481년 주문 받은 ‘동방 박사의 경배’(243×246㎝) 역시 완성하지 못했다. 이 미완성작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 1471~1475년,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레오나르도 다빈치
‘왜(페르케)’를 해명하는데 평생 시간과 노력 기울여

이런 습관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대형 기마상을 만들다가가도 신형 대포를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일을 옆으로 밀쳐버렸고, 대포 작업 또한 시작했는가 싶으면 얼마 안 가 다른 것으로 관심을 바꾸었다. 이처럼 한 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무리한 경우가 드물다보니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손꼽을 정도이고 그나마 대부분은 미완성이다. 나쁘게 말하면 끈기부족이고 좋게 해석하면 천재답게 쉴 새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것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자들은 그가 작품을 끝내지 못하고 다른 작품으로 옮겨간 행동 등을 볼 때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미완성 작품을 많이 남긴 이유를 두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완벽한 아름다움과 깊이를 붓으로 표현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불충분하다고 자각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작품을 제작하는 도중에 이미 완성된 모양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 알아버리면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만능인으로 불리는 것은 지치지 않고 ‘왜(페르케)’를 해명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레오나르도와 보통 사람들 간의 ‘왜(페르케)’에 결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사람들의 창조 행위 역시 ‘왜’를 해명하려는 욕구에서 시작되지만 이런 사람들은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왜’의 해명이 이뤄진 것을 알게 되는 반면, 레오나르도는 창작 과정에서 이미 알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완성 작품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나 조각가는 장인이나 기술자로 여겨졌을 뿐 오늘날처럼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고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하고 과학기술 지식을 모두 갖춘 레오나르도는 기능직에 불과했던 화가의 지위를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최후의 만찬’은 1495년 시작해 1497년 완성

레오나르도는 30살이던 1482년 거창하게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들고 밀라노로 가 새 삶을 시작했다. 1499년까지 이어지는 제1차 밀라노 시대다. 당시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 스포르차(1452~1508) 공작이 도시 미관을 심각하게 해치는 빈민굴을 철거하고 새 주택을 대대적으로 짓겠다고 선언한 뒤 유능한 도시계획가와 토목기사를 대대적으로 모집했는데 레오나르도가 이 소식을 알고 지원서를 낸 것이다.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의 실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소개장과 함께 루도비코에게 제출한 것이 그 유명한 자기소개서이다. 레오나르도는 마치 엔지니어가 자신을 홍보하는 듯한 내용을 자세히 열거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번호를 매겨 주로 그가 개발한 무기와 군용 장비를 설명했다. 이동과 설치가 쉬운 교량, 소음 없이 침투용 땅굴 파는 법, 폭풍우가 몰아치듯 자갈과 연기를 발사하는 이동용 대포와 방탄 전함 건조법 등을 알고 있으며, 믿어지지 않는다면 시연해 보이겠다고 썼다.

그러면서 군사공학자와 무기 발명가로 일하고 싶고 청동 조각도 할 수 있다고 기술한 뒤 마지막 10번에서 누구보다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레오나르도가 회화나 조각도 잘할 수 있다고 10번에서야 짧게 언급한 이유는 군사력이 우선이었을 루도비코의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자기소개서’로 평가받은 이 자기소개서는 16세기 말, 한 조각가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온갖 문서 1119쪽을 한데 모은 방대한 전집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 들어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기소개서

 

유럽의 강국을 꿈꾸던 루도비코에게 레오나르도의 군사적 지식은 매우 매력적이어서 자신의 전속 화가, 군사 기술자, 건축가로 발탁했다. 레오나르도는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간 이후 17년간 밀라노에서 신무기와 건물과 다리를 설계하거나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얻은 첫 번째 일거리는 1483년 밀라노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에 성모 마리아상을 그리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림을 완성해 ‘동굴의 성모’(199×122㎝)로 불렸다. 조각에서는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 모델을 1493년 11월 완성했으나 청동 부족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최후의 만찬’은 1495년 시작해 1497년 완성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은 1498년 ‘최후의 만찬’에 대한 보수의 일부로 다빈치에게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인근에 있는 2500~3600평 규모의 포도밭을 주었다. 다빈치가 와인 애호가이고 직접 포도를 경작해 와인을 제조할 정도로 와인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다빈치가 남긴 편지와 메모에는 와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와인 제조·보관 방법을 연구한 글귀와 스케치도 있다.

그러나 루도비코 공작이 다빈치에게 준 포도밭은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점점 황폐해지고 2차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밀라노 폭격으로 불이 나 소실됐다. 버려진 포도밭은 2007년 복원되기 시작했다. 다빈치의 와인 제조법을 실제로 구현한 양조학자들이 포도밭을 발굴하며 포도나무 뿌리를 찾아 헤맸다. 기적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포도나무 뿌리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유전자 검사를 통해 다빈치가 기른 포도가 청포도의 일종인 ‘말바시아 디 칸디아 아로마티카’라는 게 2009년 확인됐다. 양조학자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이 뿌리와 가장 흡사한 DNA를 가진 청포도 나무를 찾아냈다. 그리고 2015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다빈치의 포도밭이 복원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2018년 8월 복원 이후 처음으로 포도 수확이 이뤄졌다.

오늘날 밀라노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박물관이 있는데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기반으로 해서 그의 유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밑그림 벽화, 500년 만에 존재 밝혀져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의 통치가 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자 그해 밀라노의 17년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갔다. 피렌체에서는 산타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그곳 수도원에 정착했다. 그의 걸작 ‘모나리자’ ‘성 모자와 성 안나’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모나리자’ 역시 평생의 습관이 다시 도진 때문인지 완성하지 못했다.

레오나르도는 1504년 피렌체 시청 대강당의 대형 벽에 ‘앙기아리 전투’(1700×700㎝) 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 맞은편 벽에는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그렸다. ‘앙기아리 전투’는 1494년 피렌체 공국이 앙기아리에서 벌어진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소재로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 벽화의 밑그림까지만 그리고 중단했다.

<앙기아리 전투>. 루벤스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수십년 후 조르조 바사리가 그 벽화 위에 새로운 벽화를 그리라는 메디치 가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벽화 위에 바로 덧칠을 하지 않고 벽화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둔 새로운 벽을 만들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기가 통하도록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밑그림 벽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500년 가까이 지나서였다.

2012년 3월 조사단이 바사리의 벽화 ‘마르시나오 전투’에 작은 구멍을 뚫어 초소형 내시경 등의 최신장비를 동원해 3㎝ 공간 뒤의 벽에서 레오나르도가 쓰던 물감과 동일한 성분의 유약으로 그린 그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그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미완성작을 드러내려면 바사리의 벽화를 포기해야 하는데 프레스코화 특성상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은 아직 안된 상태다.

<마르시아노 전투>. 피렌체 베키오 궁전 소장

 

죽기 전, 프랑스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모나리자’ 헐값으로 넘겨

레오나르도는 1508년 프랑스 치하의 밀라노에 초빙되어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겸 기술자로 머물렀다. 1513년 밀라노에서 로마로 이주했을 때, 마침 그곳에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지휘 아래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화가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증개축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최고 그룹에 속하는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도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역시 뒤늦게 합류했으나 의욕과 의지면에서 세대 간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61살, 미켈란젤로는 38살, 라파엘로는 30살이었다.

뭔가 변화의 계기가 필요하던 차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알게 되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만능적 지식과 솜씨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온다면 거처할 곳은 물론 연금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레오나르도는 1517년 제자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수아 1세가 제공한 프랑스 앙부아즈 교외에 있는 클루성을 거처로 정했다. 이때 챙겨간 작품 중에는 ‘모나리자’(77×53㎝)도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충분한 생활비와 연금을 주고도 그림은 주문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이국땅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했다. 수학 실험과 해부학도 계속 연구하고 파티를 좋아하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도 준비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3년을 지내다가 1519년 5월 2일 67세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에는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모나리자’를 헐값으로 넘겼다. 시신은 생 플로랑탱 교회에 매장되었으나 얼마 후 전란의 와중에 교회가 파괴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프랑수아 1세

 

■베로나, 중세시대 분위기 고스란히 간직한 세계문화유산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동서 양쪽에 포진한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소도시다. 이런 위치 덕분에 오래 전부터 북부 지방의 동서를 횡단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 요지로 기능했다. 도시 한 가운데에는 2000여 년 전 건설된 아레나 원형경기장이 위용을 뽐내고 있고, 미로 같은 골목과 아담한 건축물들은 중세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붉은 대리석의 중세 건물,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저택들, 시대를 달리하는 성당들이 즐비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베로나 원형 경기장과 베로나 시내

 

베로나 중심부에 위치한 브라 광장에는 작은 공원과 분수가 있고 광장 바로 옆에는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아레나 원형경기장이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수십년 정도 앞선 서기 14~54년 사이에 세워졌다. 긴 지름이 75.68m, 짧은 지름이 44.43m의 타원형으로 최대 수용인원은 2만 2000명 정도이다. 현존하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으로는 로마의 콜로세움, 나폴리 근처 카푸아에 있는 원형경기장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

초기에는 검투사들의 경기장이었다가 중세에는 법원 겸 형 집행소,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상경기와 창 경기를 벌이는 축제 장소로 사용되었다. 로마제국 시절, 검투사나 맹수가 흘린 피에서 냄새가 나 로마인들은 모래를 깔았다. 그래서 경기장 이름이 라틴어로 ‘모래’라는 뜻의 ‘아레나’이다.

 

아레나 원형경기장, 여름철에는 오페라 무대로 바뀌어

그런데 요즘은 여름철이 되면 2개월 동안 아레나 원형경기장이 오페라 무대로 바뀐다. 100여 년 전인 1913년 8월 10일부터다. 그해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처음 무대에 오른 작품은 베르디의 ‘아이다’였다. 이후 ‘아이다’는 아레나 극장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주세페 베르디

 

요즘은 아레나 극장의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오페라 애호가들이 몰려든다. 특히 여름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원형경기장에 들어찬 관객들이 하나둘씩 촛불을 밝히면서 공연이 오르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아레나 극장이 대단한 것은 작은 소리도 극장의 구석 자리까지 잘 전달되도록 세밀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야 하는 배우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전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오페라를 공연할 때 마이크 같은 음향 증폭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니 2000여 년 전의 건축 기술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일반적인 오페라 무대보다 3배 이상 규모가 크고 1만 6000명을 수용하는 것도 자랑거리다. 마리아 칼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수많은 유명 성악가들도 이 무대를 거쳐갔다. 특히 미국에서 성공을 장담하지 못해 이탈리아로 건너온 마리아 칼라스는 1947년 8월 2일 아레나 무대에서 성공적인 데뷔 후 세계적인 성악가로 발돋움했다. 우리나라의 소프라노 임세경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15년 ‘아이다’ 역으로 뽑혀 꿈의 무대에 섰다. 베로나 축제는 역사적 유산을 활용한 ‘오페라 마케팅’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아레나 경기장 내부를 무대로 바꿔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다.

 

‘조상 잘 만난 덕’이 아니라 자기네 문화를 다듬고 닦아 자랑할 줄 아는 노력의 결과

아레나 경기장을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은 ‘줄리엣의 집’이다. 물론 이 집은 실제 줄리엣의 집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1595~1596년에 5막으로 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도시가 중세 베로나라는 사실에 착안한 관광 상품이다. 즉 13세기에 지어진 이름 없는 건물을 베로나 시가 1930년대에 고딕풍의 문과 창문, 테라스를 덧붙여 15세기 풍의 이탈리아 귀족의 저택을 재현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집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매년 100~200만 명이나 몰려온다. 한 관광 전문가는 ‘가짜’라기보다는 ‘새로운 콘텐츠’라고 보는 게 옳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베로나의 오늘은 ‘조상 잘 만난 덕’이 아니라 자기네 문화를 다듬고 닦아 자랑할 줄 아는 현명한 노력의 결과라고 했다.

마당에는 1972년 설치한 줄리엣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오른쪽 젖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전해져 그것을 만지는 남성들 때문에 오른쪽 가슴 부분은 늘 반들반들하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연을 써서 이 집의 벽에 붙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건물 벽 전체가 온통 사랑의 사연으로 뒤덮여 있다.

줄리엣의 집

 

베로나의 전용 축구장인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는 우리나라 축구와도 인연이 있다. 1990년 6월 13일 이곳에서 벌어진 90월드컵 축구 E조 예선 첫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벨기에에 2대0으로 완패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8년 후인 2018년 5월 6일에는 베로나를 연고로 하는 엘라스 베로나팀 소속의 이승우 선수가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세리에A(이탈리아 프로축구 리그) 데뷔골을 터뜨린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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