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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⑦] 밀라노(1) : 스칼라극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밀라노 두오모

by 김지지

 

■밀라노,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탈리아 제2의 도시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에 위치한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다. 로마는 정치 수도이고 밀라노는 미국의 뉴욕처럼 경제 수도 역할을 한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밀라노는 고대 이래 로마와 알프스 이북 지역 간 교역 루트의 연결점이었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하는 전초지였다.

2500년 전 알프스를 넘어온 켈트족이 세웠으니 역사는 로마 못지 않다. 밀라노가 유럽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밀라노에서 만나 기독교를 공인하기로 합의한 서기 313년이다.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힌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서부 영역을 다스렸고, 그의 매형인 리키니우스는 동부 지역을 다스렸다.

밀라노는 유럽문화사의 거점 노릇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대표적 부흥기는 비스콘티 시대(1277~1447)다. 비스콘티 가문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오토네가 1277년 경쟁 가문인 델라토레 가문을 누르고 밀라노의 지배권을 장악한 게 시작이다. 그의 후손들은 북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토스카나, 움브리아 등 중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중 최고 전성기는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1351~1402)의 통치기였다. 그 시절 밀라노는 해상무역에 치중하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시칠리아 왕국을 빼면 이탈리아 본토에서 최강이었다. 롬바르디아 전 지역, 토스카나 대부분, 교황 국가 안에 있는 수많은 도시들까지 밀라노 공국의 지배를 받았다. 잔 갈레아초는 오늘날 호사스러운 교회 중 최고로 인정받는 밀라노 두오모(대성당)를 착공하고 수도원 중 가장 아름답다는 파비아 수도원을 지어 후세에 귀중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세계적 패션과 디자인 도시로도 유명

가문의 맥은 1447년 끊겼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1392~1447년)가 딸 비앙카만 남기고 죽어 대가 끊겼기 때문이다. 대신 비앙카가 결혼한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가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면서 외손쪽으로 대가 이어졌다. 스포르차는 비스콘티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고 공작에 올라 1450년 새로운 스포르차 가문의 전설을 썼다. 그는 무인이었지만 밀라노를 문화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문예를 장려했다. 상업을 촉진시키고 견직물 산업을 도입해 경제적으로 밀라노를 발전시켰다.

스포르차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얼굴이 시커멓다고 해서 일 모로 즉 ‘아프리카 북부의 무어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프란체스코의 넷째 아들 루도비코 스포르차(1451~1508)다. 그는 야심에 찬 인물로 도량이 넓고 체구가 당당했다. 철학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예술가들을 밀라노로 초빙했다. 그중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수도원의 벽면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루도비코를 위해 전쟁무기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기계 발명에도 몰두했다. 루도비코가 밀라노를 통치하는 동안 밀라노는 피렌체 다음으로 르네상스의 꽃을 활짝 피웠다.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한 밀라노가 섬유산업이 발달한 것은 중세 이후였다. 19세기 들어서는 금속·기계 등 중공업이 번창했다. 오늘날 흘끗 보아도 밀라노가 세련된 명품 도시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유럽연합 안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밀라노는 오늘날 세계적인 패션과 디자인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곳에선 누구나 멋쟁이가 되고 예술가가 된다. 복장에 대한 정성이 대단해 한여름에도 정장을 한다. 옷맵시도 뛰어나다. 베네통의 현란한 색상부터 자연스러운 색상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스타일도 척척 소화해내는 멋쟁이다. 거리의 상점들이 뽐내고 있는 온갖 브랜드들이 밀라노가 세계 상류계급의 수도라는 걸 일깨워준다. 물건의 질과 디자인도 좋지만 그것을 진열해놓는 디스플레이 기술도 예술이다. 이곳에서는 1년에도 몇 차례씩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밀라노 컬렉션, 가구박람회, 디자인전시회가 열린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유행의 근원지’ ‘세계 디자인의 눈’, ‘스타일의 수도’ 등이다.

 

광화문 광장 자리의 아름드리 가로수 없앤 거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밀라노에는 전체적으로 도시의 때깔이 좋다. 가로수든 공원이든 나무도 무성하다. 나무가 많은 도시를 볼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지금은 광화문 광장에 차가운 대리석만 깔려 있지만 전에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차도 중간에 아름드리 가로수가 많았다. 그런데 오세훈 당시 시장이 광화문 광장을 만든다며 그 가로수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그 많던 흙과 거목들이 사라졌다. 세종문화회관 옆에 있던 세종로공원에도 작은 숲을 이룰 정도로 나무가 많았는데 그 나무도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돌로 된 보도블럭으로 대체했다.

세종로 중앙분리대 가로수(왼쪽). 오른쪽 보도에도 가로수가 무성하다.

 

나는 31년째 광화문에 있는 직장을 다니면서 가끔 그 공원 안을 산책하거나 벤치에 않아 도심 속 여유를 즐기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무가 주는 그늘이 사라지고 내리쬐는 햇빛뿐이다. 도시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어야 하거늘 수십년 이상 스스로 잘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을 모두 어디론가 보내버리니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화가 난다.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 그때 이후 난 지인들에게 오세훈 전 시장을 부정적으로 얘기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박원순 시장까지 오세훈의 길을 따라가는 것 같아 울화가 치민다. 서울 성공회성당 앞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별관을 철거한 자리에 자그마치 340억 원이나 들여서 지상에는 ‘세종대로 시민광장’을 만들고 지하 1~3층에는 서울 건축의 발전 과정과 미래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곳이라도 더 녹지나 공원을 만들어 쉼터를 만들 생각은 않고 모두들 왜 그리 업적 지상주의에 빠져 콘크리트와 돌에 집착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스칼라 극장, 아무나 넘볼 수 없는 무대

 

밀라노에서 첫 일정은 스칼라 광장이다. 광장 중심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이 있고 그 아래에 4명의 제자 동상이 다빈치 동상을 둘러싸고 있다. 그 유명한 스칼라 극장도 광장 바로 옆에 있다. 나는 그동안 10권짜리 <20세기 이야기>를 집필하면서 오페라 관련 글을 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스칼라 극장(라스칼라)이 늘 궁금했다. 그러니 밀라노에서 스칼라 극장을 둘러보는 것이 내겐 당연한 수순이었고 큰 기대였다.

스칼라 극장

 

오늘날 스칼라 극장은 런던의 코벤트가든, 파리의 바스티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등과 함께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외형은 수수하거나 허름하다. 심지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스칼라 극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건물만 보면 관공서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스칼라 극장을 밖에서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실망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대부분 그 화려함과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빨간 카페트, 객석을 장식한 화려한 금빛 문양, 365개의 샹들리에, 2800석의 객석 등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칼라 극장은 1778년 개관했다. 1776년 2월 26일 일어난 화재로 테아트로 레지오 두칼레 극장이 소실된 후였다. 이 극장은 1717년 12월 문을 연 이래 59년 동안 밀라노 시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화재 후,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새 극장을 짓도록 했다. 건축비는 소실된 테아트로 레지오 두칼레 극장의 개인 박스석을 소유했던 귀족들이 댔다.

새 극장은 낡아 빠진 ‘산타 마리아 알라 스칼라’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지어졌다. 그래서 붙여진 극장 이름이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다. ‘테아트로’는 소실된 극장에서, ‘알라 스칼라’는 헐어버린 성당에서 차용했다. 극장 내부벽은 7층 규모의 원형 객석이다. 1층 객석을 제외하고는 거의 박스석인데 기본적으로 6명이 한 방에 들어가서 보는 구조다.

스칼라 극장 내부 모습

 

극장은 1778년 8월 3일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유럽의 발견’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공식적으로 개관했다. 초기에는 오페라 감상보다는 사교 공간이었다. 박스석이 개인 소유의 살롱이다보니 공연을 관람하며 먹고 마시고 잡담을 나누었다. 때로는 카드놀이도 즐겼다. 그러면서 점차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있는 오페라극장으로 자리잡았다. 세계최고 기량이 증명된 가수와 지휘자, 연출가가 아니고서는 넘볼 수 없는 무대가 되었다.

 

세계적 오페라 극장인데도 외형은 수수하거나 허름

성악가들은 라 스칼라 극장 데뷔를 큰 영광으로 여겼다. 마리아 칼라스, 주세피 디 스테파노, 마리오 델모나코, 엔리코 카루소,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유명 성악가들이 이 극장에서 공연해 명성을 확고히 했다. 조수미도 이곳 무대에 올랐다.

극장은 세계적인 오페라 작품들을 초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아키노 로시니(4개 작품), 가에타노 도니제티(7개), 빈첸초 벨리니(3개) 등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도 4개나 초연되었다. 베르디의 ‘오베르토’(1839년), ‘아이다’(1872년), ‘오텔로’(1887년), ‘팔슈타프’(1893년)다.

20세기 초에는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1904년)과 ‘투란도트’(1926년)를 초연했다. ‘투란도트’를 초연한 1926년 4월 25일에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객석에 앉아 있었는데도 토스카니니는 오페라의 마지막 부분에서 “위대한 푸치니가 작곡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연주를 중단했다. 푸치니가 ‘투란도트’를 작곡하던 중 1924년 숨지자 제자 알피노가 완성한 뒷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토스카니니는 1898년 스칼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발탁되었을 때 오페라 개혁에 칼을 빼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오페라는 오늘날 대중가수들의 팝 콘서트와 같은 형식이었다. 따라서 청중의 복장은 정장이 아니라 편안한 차림이었다. 공연은 가수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지휘자는 가수를 보조하는 위치에 불과했다. 오페라 아리아의 한 곡이 끝났을 때 청중이 앙코르를 요청하면 가수가 다시 나와 응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토스카니니는 이런 관행에 과감히 손을 댔다.

공연이 시작되면 누구라도 객석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고 청중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자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공연 중에는 앙코르를 일절 금지하고 오페라 공연이 발레로 끝나는 관례를 폐지했다. 결국 1903년 3월 11일 스칼라 극장에서 ‘가면무도회’를 지휘할 때 청중과 충돌했다. 당대의 유명 테너 조반니 제나텔로가 절창을 하자 청중은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 앙코르를 요청했다. 토스카니니가 거절하자 청중은 공연을 지속할 수 없도록 날뛰었다. 토스카니니는 지휘봉을 내던지고 극장을 뛰쳐나가 다시는 스칼라 극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극장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15일 영국군의 공습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는 시련을 겪었다. 외벽만 남고 지붕과 갤러리, 박스, 무대의 일부가 내려앉았다. 전쟁이 끝난 후 사실상 다시 짓다시피해서 1946년 5월 11일 재개관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현대적 세련과 전통적 고풍의 완벽한 조화

 

스칼라 광장과 밀라노 두오모 사이에는 대형 쇼핑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있다. 이처럼 화려하고 현대적이면서 고풍스러운 대형 쇼핑몰이 1860년대에 들어섰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곳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로마 판테온의 천장 느낌을 주는 아케이드 모양의 천장이다. 영어로 갤러리아는 유리 지붕으로 된 넓은 통로나 안뜰 또는 상점가를 뜻하는데 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원조다.

갈레리아 안에는 베르사체, 루이비통, 프라다, 브릭스, 구찌 등 온갖 명품점들로 가득 차있다. 유서 깊은 카페, 서점, 음식점, 상점도 있다. 바닥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주축이 된 도시들을 기념하는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다. 그중 붉은 십자가의 모자이크가 밀라노를 상징한다. 모자이크 중 황소는 토리노, 백합은 피렌체, 늑대는 로마를 상징한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내부

 

우리는 갈레리아의 명품 가게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눈요기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명품이든 뭐든 살 생각이 애시당초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숙희씨는 명품에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원래 근검절약하는 사람이라 명품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데다 내가 벌어오는 봉급으로는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명품에는 관심이 없지만 내 수입이 많다면 명품을 마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한숙희씨는 29년을 나와 살면서 명품의 명자도 꺼낸 일이 없다. 이런 한숙희씨 모습이 늘 이해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명품 한 두 개 산다고 가정 경제가 흔들리겠느냐는 내 호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숙희씨가 표면적으로 명품에 관심이 없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귀국 후 만난 회사 후배가 나의 이런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다. “명품 가방을 하나 사 주었다면 형수님도 분명 좋아했을 겁니다”라고.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으나 후배는 “여자를 몰라도 정말 모른다”며 나를 탓한다.

그러던 차에 고종석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쓴 글을 읽게 되었는데 꼭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는 언젠가 부부동반으로 밀라노를 다녀왔는데 그때의 감상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밀라노가 허영의 전시장인 만큼, 아내와 나는 허영의 소비자가 되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가난했으니 그 소비는 시선의 소비, 상상력의 소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허영여행은 지구 패션 1번지라는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에서 시작됐다. 아내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비겁한 것 같긴 하다) 우리는 그 허영의 거리에 오래 머물렀다. 그 이전에든 그 이후에든, 그 거리를 촘촘히 수놓은 브랜드 제품을 지닐 기회가 아내에게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아리다. 여느 여자들처럼 아내도 먹는 것보다 입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더 그렇다. 비록 젊음은 사라졌으나, 그녀에게 세월은 꽤 남아있을 테니, 언젠가 그 허영을 유물론적으로 실천할 수도 있을 게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밀라노, 한국일보 2007.8.22)

   

■밀라노 두오모, 웅장·섬세·화려의 극치

 

갈레리아를 빠져 나오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이 있는 두오모 광장이 나온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은 그 옆에 있다. 밀라노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나센테 대성당’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두오모는 대성당을 의미하기 때문에 흔히 밀라노 두오모라고 한다.

밀라노 두오모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먼저 높이에 압도당한다. 그 다음 화려함, 섬세함, 웅장함에 감동을 받는다. 규모를 기준하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이탈리아에서 크다. 엄밀히 말하면 성 베드로 성당이 독립국가인 바티칸에 있기 때문에 밀라노 두오모가 이탈리아 최대라 할 수 있다.

밀라노 두오모는 이탈리아 고딕 건축 중 최대 규모다. 고딕에 관한 한 별로 내 놓을 만한 예술 작품이 없는 이탈리아에서 밀라노 두오모만이 거의 유일하게 화려함과 규모면에서 프랑스의 고딕 건축물에 밀리지 않는다. 건설 기간에서는 세계 최장이다. 1386년 착공해 1965년 최종 완공했으니 600년이 걸린 셈이다. 시대를 아우르는 인간의 끈기를 이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축물이 또 있을까 싶다.

밀라노 두오모 내부

 

두오모 성당 자리에는 원래 밀라노의 수호성인인 성 암브로시오 예배당이 있었다. 5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 옆에는 9세기에 같은 양식의 또 다른 성당이 지어져 두 건물이 있었다. 그러다가 1075년 화재로 두 성당 모두 전소되었다. 그러자 당시 밀라노 대주교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할 성당 건립을 계획했다. 그의 사촌인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1351~1402)는 유럽 각국의 건축가를 초청해 자문을 구했다. 건축가들은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서 보편적이었던 후기 고딕 양식의 새 성당을 세우기로 했다. 규모가 워낙 방대해 3채 건물을 철거해 부지를 마련한 후 1386년 5월 착공했다.

성당은 1420년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1571년 새로 부임한 밀라노 대주교와 새 건축가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외관을 개축하기로 했다. 르네상스 양식은 나중에 다시 고딕 양식으로 바뀐다. 이처럼 건축가와 대주교가 바뀌면 건축 양식이 바뀌는 일이 잦았다. 두오모의 마지막 세부 장식은 20세기에 완성되었다. 1965년 1월 6일 출입구에 설치한 청동 장식문이 문을 엶으로써 600년간 이어진 대역사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성당 건축에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유리화가, 공예가 등 전 유럽에서 초청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밀라노의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들도 성당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건설 기간에서는 세계 최장… 600년(1386~1965년) 걸려

두오모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수백 개의 정교한 뾰족 석탑들이 성당의 외벽을 뒤덮고 있다. 성당 전면에는 5개의 출입문이 있다. 가장 큰 중앙문의 부조는 19세기에 루도비코 폴리아키가 제작했다. 이후 1965년까지 나머지 문의 부조가 순차적으로 제작되었다. 1805년 5월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왕에 즉위하는 대관식을 열었다. 두오모 입구 오른쪽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오토네 비스콘티의 묘소다. 밀라노 대주교이자 비스콘티 시대의 창업자로 오늘날 밀라노 도시 미관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이 비스콘티 가문은 1277년부터 1447년까지 밀라노를 통치했다. 그 조금 옆에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313년)을 기념한 명판이 있다.

밀라노 두오모 꼭대기 위에 빽빽히 솟아있는 첨탑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숲처럼 보이는 거대 기둥의 높이와 굵기가 방문자를 또다시 놀라게 한다. 성당 내부는 52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부는 길이 158.6m 폭 93m, 높이 65.6m로 축구장의 1.5배 크기다. 벽은 얇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는데 신비스러운 색상이 빛과 함께 교회 내부를 비추고 있다. 대성당 내부에서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작품은 마르코 다그라테가 1562년 제작한 성 바르톨로메오(바돌로메) 조각상이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 선교 중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형벌을 당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다. 조각상은 근육과 핏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성당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00여 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밀라노 시내, 두오모 광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건물 등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인 조각상은 총 3159개나 된다. 성당에 조각된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 조각상 중에서 2245개는 기괴스러울 정도로 빽빽히 솟아오른 135개의 첨탑과 처마에 설치되어 있다.

첨탑 하나하나의 꼭대기에는 조각상이 서서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 벽과 기둥 중간에도 석상이 지키고 있다. 같은 모양의 석상은 단 한개도 없다. 가장 높은 첨탑(108.5m) 위에는 1762년에 세운 4.16m 규모의 황금빛 성모상(마돈니나)이 있다. 성모상은 구리로 제작한 조각에 3900개의 금박 조각을 입혔다. 두오모 지하에 들어가면 널찍한 고대 로마 유적지 한편에 4세기의 팔각 세례당 자리가 뚜렷하다. 387년 성 암브로시오가 성 아고스티노를 세례한 역사적 자리다.

두오모 황금빛 성모상(마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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