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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⑫] 피렌체(2) : 베키오 다리,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페르세우스 청동상, 벤베누토 첼리니, 사비니 여인의 강탈, 우피치 미술관, 산드로 보티첼리

↑ 베키오 궁전과 시뇨리아 광장 (출처 위키피디아)

 

by 김지지

 

■피렌체 시내, 아르노 강 끼고 중세풍 건물들이 눈부시게 펼쳐져

 

▲미켈란젤로 광장과 산 미니아토 성당

피렌체 도시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언덕에 자리잡은 미켈란젤로 광장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복제본이 있는 그곳에서 피렌체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부드러운 곡선의 아르노 강을 끼고 적갈색 지붕의 중세풍 건물들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건물들 사이로 피렌체의 상징들인 베키오 다리, 두오모, 베키오 궁전, 산타 크로체 성당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는 두 건물은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와 베키오 궁전(팔라초 베키오, 현 시청사)이다.

미켈란젤로 광장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피렌체 시내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아르노 강 좌안의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이다. 성당 정면의 높직한 대리석 층계참에 오르면 그림 같은 피렌체 도심의 전경이 펼쳐진다. 산 미니아토는 피렌체가 아직 중세의 잠에 빠져 있던 1018년에 세워졌다. 피렌체 성당들이 시대의 유행에 따라 르네상스식으로 단장할 때도 로마네스크의 본 모습을 잃지 않아 의연한 고풍이 그대로 살아있다. 물론 베키오 궁전의 종탑과 두오모의 쿠폴라(첨탑)에 올라가도 피렌체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미켈란젤로 광장(왼쪽)과 산 미니아토 성당

 

▲베키오 다리

피렌체를 상징하는 강은 시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이다. 이 강은 상업으로 피렌체를 번성케 해주었으나 한때는 홍수로 인한 범람으로 도시를 파괴해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이다. 강에는 10개의 다리가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32m 길이의 베키오 다리다. 이탈리아어로는 ‘낡은 다리’라는 뜻의 ‘폰타 베키오’이다.

베키오 다리 (출처 위키피디아)

 

베키오 다리가 처음 세워진 것은 고대 로마시대 때였다. 이후 대홍수로 몇 차례 유실된 끝에 1345년 현재의 대리석 다리가 세워졌다. 이 다리 위에 정육점, 가죽가공점 등의 점포가 자리잡은 것은 1440년대였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1565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1519~1574)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1511~1574)에게 점포 위에 2층 통로를 만들도록 했다. 아르노 강 건너편에 있는 피티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후 베키오 궁전을 오갈 때 상인·시민들과 뒤섞이기 싫어서 점포 위에 전용통로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폭동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통로이기도 했다.

베키오 궁전~시 정부청사(현재의 우피치 미술관)~베키오 다리 2층~피티 궁전까지 연결된 이 800m의 회랑(사원이나 궁전건축에서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은 이후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바사리 통로’로 불린다.

바사리 통로(복도) 그림

 

1590년대에는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가 다리 위 상점에서 풍기는 도축장의 고기와 가죽 냄새가 싫다며 그들을 쫓아내고 고급 상점인 금은세공 상인들을 입주시켰다. 이후 베키오 다리는 고급 쇼핑거리로 변했다. 다리 중간쯤에 세워진 벤베누티 첼리니의 청동 흉상은 라파엘로 로마넬리의 1901년 작품이다. 첼리니는 16세기 유럽에서 유명한 금은세공 장인이었다. 베키오 다리는 과거 단테와 연인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후 피렌체의 젊은 연인들 사이에는 운명적인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하고, 그 증표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강물에 버리는 것이 유행했다.

베키오 다리는 이처럼 오랫동안 피렌체인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2차대전 중 파괴될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1944년 8월 독일군이 연합군에 쫓겨 후퇴할 때 아르노 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했지만 “베키오 다리만은 폭파하지 말라”는 독일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폭파를 피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피렌체 시는 독일군 사령관에게 명예 피렌체 시민증을 수여하는 것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는 피렌체의 역사가 한 눈에 녹아 있다. 광장에서 눈에 잘 띄는 것은 피렌체 공화국을 토스카나 공국으로 전환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이다. 뒤에 소개할 잠볼로냐의 작품이다.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미켈란젤로가 29살이던 1504년에 완성한 ‘다비드상’이다. 이후 작품 손상에 대한 우려가 있어 1873년 인근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복제품을 설치했다. 결국 피렌체에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있는 다비드상까지 포함해 모두 3개가 있는 셈이다.

다비드상 바로 옆에 바초 반디넬리(1493~1560)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조각상이 있다. 그러나 눈길을 주는 이가 별로 없다. 사악한 괴수 카쿠스를 제압한 영웅 헤라클레스를 재현한 것이지만 ‘멜론 자루’라는 비웃음을 살 정도로 온몸의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지나치게 찡그린 표정에 반해 자세는 뻣뻣해서, 절제 있고도 우아한 다비드와 비교하면 더욱 어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조각은 현명한 다비드와 강인한 헤라클레스를 한 쌍으로 두고자 메디치 가문에서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던 것인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떠나는 바람에 반디넬리 손에 넘어갔다. 문제는 반디넬리가 메디치 가문의 신임을 받고 수완도 있어 거대 조각품 주문을 독점하다시피 받아냈으나 정작 그 모두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고 완성작마저 탁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필이면 신이 내린 천재 미켈란젤로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으니 능력부족에다 운까지 따르지 않은 것이다.

‘다비드상'(왼쪽)과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조각상

 

‘다비드상’과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조각상 뒤에는 베키오 궁전(팔라초 베키오)이 늘씬한 꽃봉오리 모양의 종탑과 함께 우뚝 서 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로 13세기 말 착공한 뒤 이후 몇 차례의 재건축을 거쳐 코시모 1세 시절 바사리의 설계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 시계탑 역할을 하고 있는 종탑의 높이는 94m다. 베키오 궁전은 과거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정부청사였으나 현재는 일부만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할 뿐 대부분의 공간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먼저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회랑으로 되어 있는 중정(中庭·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이 나온다. 2층은 궁전 박물관이다.

궁전 오른쪽 입구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규모 홀이 나온다. 일명 ‘500인의 방’이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옛날 피렌체 공화국의 대표 500명이 모여 회의를 했던 곳이다. 52×23m의 대형 공간이다. 이곳의 마주보는 동서 벽면에는 피렌체가 치른 역대 전투 장면을 소재로 한 초대형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 작품이다. 로마시대 영웅을 그린 프레스코화도 있다. 이 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금으로 장식된 격자형 천장이다. 코시모 1세의 업적을 미화한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베키오 궁전 ‘500인의 방’

 

시뇨리아 광장 옆에는 ‘로자 데이 란치’라는 이름의 옥외 조각 갤러리가 있다. 3개의 대형 아치로 만들어진 회랑형 건물에는 15개의 모조 조각상이 생생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조각상이다. 이중 대표적인 조각상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조각한,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의 청동상과 잠볼로냐의 조각상 ‘사비니 여인의 강탈’이다.

로자 데이 란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다비드상’은 다비드(다윗)가 발가벗은 몸으로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밟고 서 있다. 손등, 팔, 목덜미 등에 팽팽하게 부푼 핏줄과 힘줄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고 시민이 주인인 공화정을 다시 채택한 피렌체 시위원회가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다비드를 정한 후 조각된 것으로 1504년 미켈란젤로가 완성했다.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하기 전, 2명의 조각가가 작업하다 포기했다. 대리석의 두께가 너비나 높이에 맞지않아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리석이 40년간 방치되다가 결국 미켈란젤로에 의해 완성되었다.

오늘날에는 완벽한 인간을 묘사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당시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하체에 비해 상체가 훨씬 크고 두껍고, 머리와 손이 인체 비례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크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5~7m 떨어진 곳에서는 비례감이 있게 보이도록 한 미켈란젤로의 계산이었다.

다비드상은 베키오 궁전 앞에 350여 년간 놓여있다가 작품 손상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그동안 몇 차례 피해를 당했다. 1527년 강풍에 왼손이 부서졌다 복원되고 1991년 정신장애자가 왼쪽 엄지발가락을 망치로 파손한 적이 있다.

 

▲‘페르세우스 청동상’과 벤베누토 첼리니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청동상은 신화 속 인물인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의뢰를 받아 1554년 제작했다. 진본은 피렌체의 바르젤로 국립미술관에 있다. 청동상에서 페르세우스는 코시모 1세를 상징한다. 따라서 코시모 1세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메두사처럼 목이 날라간다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있다.

메두사의 목을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청동상

 

신화 속 페르세우스를 설명하려면 먼저 그의 외할아버지 아크리시우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크리시우스는 미케네 문명을 꽃피운 3대 도시 중 하나인 아르고스의 왕이었다. 그런데 아크리시우스는 장차 태어날 외손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예언이 걱정되어 딸 다나에가 외간 남자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청동방 안에 가두었다.

하지만 다나에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제우스는 황금 빗물로 변신해 다나에가 갇힌 청동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다나에는 이 청동 빗물을 맞고 임신해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그러자 아크리시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이들은 에게해의 작은 섬까지 흘러갔다가 한 어부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런데 이곳의 왕이 다나에를 겁탈하려 해 페르세우스가 어머니를 보호했다. 왕은 눈엣가시인 페르세우스를 제거한 후 다나에를 차지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 오도록 했다.

문제는 당시 메두사를 보는 자들마다 다 돌로 변한다는 것이다. 빼어난 미모의 메두사에게 이런 저주를 내린 것은 아테나 여신이었다. 아테나는 메두사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자신의 신전에서 정을 통한 것을 알고 이런 저주를 내렸다. 따라서 메두사를 보는 자들마다 다 돌로 변하므로 메두사를 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제우스의 자식인 덕분에 여러 신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페르세우스는 결국 메두사의 목을 치는데 성공했다.

 

첼리니, 평생 좌충우돌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이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청동상을 제작한 벤베누토 첼리니는 1500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반항아로 성장했다. 16살 때 패싸움에 휘말려 시에나로 도망을 쳐 그곳에서 금세공을 배웠다. 1523년 피렌체에서 또다시 싸움을 일으켜 사형선고를 받자 로마로 달아나 귀족과 교황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벤베누토 첼리니 자화상 (출처 위키피디아)

 

교황 클레멘트 7세가 특히 첼리니를 총애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 첼리니가 참전해 용맹하게 싸우고 전투에서 패했을 때는 자신과 함께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하는 충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첼리니에게 교회의 보물을 금괴로 녹여 보관하게 했다. 그러자 교황 주변 인물이 첼리니가 보물을 빼돌리고 위조화폐를 찍었다고 모함했다. 결국 후임 바오로 3세가 첼리니를 감옥에 가두었다.

다행히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특별 요청으로 풀려나자 왕을 위해 프랑스에서 3년 여의 작업 끝에 1543년 ‘소금 그릇’이라는 명작을 제작했다. 금덩이를 쪼아서 만들고 유리·에메랄드·에나멜로 장식했다. 밑변 32㎝, 높이 25㎝ 짜리로 제작한 ‘소금 그릇’은 오늘날 현존하는 유럽의 금세공품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이후 첼리니는 1545년 피렌체로 돌아가 코시모 1세의 청동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리고 9년만인 1554년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청동상을 완성했다.

벤베누토 첼리니 작 ‘소금 그릇’(밑변 32㎝, 높이 25㎝, 1543년)

 

첼리니 자서전, 과장 심하지만 놀랄 만큼 솔직 담대한 기록

오늘날 첼리니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페르세우스 청동상’과 ‘소금 그릇’ 때문만은 아니다. 뜨거운 예술혼으로 평생을 좌충우돌하고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자신의 모든 삶을 미완성 자서전에 솔직하고 생생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예에 치명적인 사실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솔직 대담하게 드러냈다. 심지어 자신의 적과 경쟁자를 살인한 사실과 여인들과의 낯 뜨거운 이야기들도 숨김없이 기록했다.

장인인데도 특이하게 자신의 경험을 비서에게 구술해 씌어진 이 자서전은 문학적인 가식 없이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다. 자서전은 첼리니가 죽고 150년도 더 지난 1728년 이탈리아에서 출판되었다. 과장이 심하고 자기자랑이 많기는 하지만 놀랄 만큼 솔직하고 진솔한 기록이라는 게 중평이다. 당시 미술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불꽃같은 삶을 산 첼리니의 이 자서전은 뒷날 괴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첼리니야말로 이태리 르네상스 정신의 실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해 첼리니의 자서전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유럽 각국 언어로도 번역되어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첼리니 이름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너대니얼 호손의 ‘라파치니의 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스카니오’, 허먼 멜빌의 ‘백경’ 등 각종 소설에도 등장한다.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지고 롤렉스사의 최고급 시계 브랜드 ‘첼리니 컬렉션’에도 이름이 살아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 조각상

로자 데이 란치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조각은 ‘사비니 여인의 강탈’이다. 조각가 이름은 조반니 다 볼로냐(1529~1608)이지만 잠볼로냐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는 플랑드르(북프랑스와 남벨기에) 지방에서 태어나 20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조각가로 활동했다. 30대 중반에는 볼로냐의 광장 분수에 설치된 ‘넵튠 분수’(1563~1566) 청동상을 만들어 존재감을 과시했다.

피렌체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받아 피렌체에 여러 조각상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걸작이 1583년 제작한 4.1m 높이의 ‘사비니 여인의 강탈’이다.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된 코시모 1세의 청동 기마상(1593년)도 그의 작품이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인구가 적은 것이 고민이었다. 해결책은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인데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로물루스는 이웃 부족인 사비니족의 여인들을 강탈하기로 하고 사비니족을 바다의 축제에 초대하면서 여성들을 데리고 오라고 당부했다. 축제가 열린 곳은 훗날 로마 최대·최초의 대전차 경기장이 될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들어서는 곳이었다.

잠볼로냐 작 ‘사비니 여인의 강탈’

 

로마 군인들은 축제에 참가한 사비니족 남자들을 만취하게 하고 그 틈을 타 여인들을 강탈했다. 로물루스도 사비니 여인을 납치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사비니의 남자들은 몇 년 후 사비니족 여인들을 되찾기 위해 로마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로마인의 자식을 낳아 그들과 살고 있는 사비니의 여인들은 어느 한쪽 편을 들 수 없어 양군 사이의 전장으로 뛰어들어 화해를 호소했다. 이후 사비니와 로마는 화해하고 동맹을 맺었다. 사비니족은 기원전 460년 경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사비니 여인의 강탈’은 16세기부터 서양 미술사에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의 강탈’ 조각상이다. 한 덩어리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이 ‘사비니 여인의 강탈’은 사비니족 여인을 강탈하려고 여인을 위로 들어올린 로마 병사, 겁에 질린 채 절규하는 사비니 여인, 약탈자를 막지 못하고 옆에 쭈구리고 앉아 체념한 듯한 표정의 노인을 통해 당시의 비극적 현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 순간은 특히 회화에 자주 등장했다. 대표 작품은 17세기 니콜라스 푸생, 피터 루벤스,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등이 그린 ‘사비니 여인의 강탈’이다. 20세기의 피카소 역시 ‘사비니 여인의 강탈’을 그렸다. 사비니 여인 강탈 후 양군의 전쟁을 막기 위해 사비니 여인들이 화해를 외치는 장면은 자크 루이스 다비드 작 ‘사비니 여인의 중재’(1799년)에 잘 묘사되었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 작 ‘사비니 여인의 중재’(385×522㎝, 1799년)

 

▲아카데미아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1784년 토스카나 주를 다스리던 피에트로 레오폴드 대공이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하면서 세워졌다. 이 미술관의 자랑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진품이다.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인 ‘깨어나는 노예’ ‘아틀란티스’ ‘젊은 노예’ ‘성 마테오’ 등도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진품

 

이처럼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주를 이루지만 잠 볼로냐의 조각 ‘사비니 여인의 납치’ 진품도 있다. 또한 회화실에는 보티첼리와 제자들이 제작한 ‘성모자와 성인들’, 기를란디요의 ‘성모자와 성 프란체스카’ ‘막달라 마리아’ 등 13~16세기 거장의 작품들도 다수 전시되어 있다.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은 베키오 궁전 바로 옆에 있다. 조각에서의 고전이 고대 아테네라면 회화의 고전은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곳이다. 중세 말까지 비잔틴 미술의 방언에 불과하던 이탈리아 미술이 단숨에 주류로 등극해 서유럽 미술을 선도하게 된 것도 우피치 미술관 덕분이다. 세계 최고의 르네상스 미술관 답게 수 천점이나 되는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와 조각과 고문서들로 가득하다.

우피치 미술관 외부

 

미술관의 최초 명칭은 우피치 궁전이었다.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가 행정과 사법 업무를 담당할 공간으로 조르조 바사리에게 주문해 지었다. 업무 공간으로 지어져서 붙여진 이름이 우피치(Uffizi)인데 영어로는 오피스(Office)라는 뜻이다. 건물은 코시모 1세 때인 1560년 착공해 코시모 1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1세 때인 1581년 완공되었다. 이탈리아 옛 건물들처럼 맨 아래층은 길처럼 다닐 수 있게 트여 있고 그 위에 3개 층이 올라가 있다. 크게는 두 채의 궁전과 이를 잇는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시모 1세는 우피치 건물 1층을 자신의 집무실로 썼고, 2층은 당시의 이름난 예술가들을 불러 그들이 창작할 수 있도록 작업실로 내어주었다. 3층에는 메디치 가문에서 수집한 귀중품과 예술품들을 전시했다. 코시모 1세 이후 메디치 가문의 군주들은 계속해서 예술품 수집에 열정을 보였다.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는 베키오 궁전과 메디치 가의 옛 저택에 있던 예술품들을 우피치로 옮겨 왔다.

이후 1737년 메디치 가의 마지막 상속녀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들을 피렌체 시에 양도하면서 1765년 우피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메디치 가의 소장품을 시에 양도하면서 “모든 작품들은 피렌체를 떠나지 않도록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덕분에 르네상스 예술품들은 지금까지 우피치 미술관에 온전히 보관되고 있다. 다만 주요 조각들은 1800년 피렌체의 바르젤로 국립미술관과 국립 고고학미술관으로 이전되면서 우피치는 르네상스 회화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우피치 미술관 내부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와 조각과 고문서들로 가득

우피치 미술관은 어디서부터 보아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피렌체 출신 화가 조토(1267?~1337)의 작품부터 보는 것이 좋다. 시기적으로 조토가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는 때 활동했던 예술가이고 ‘마지막 중세 화가’ 혹은 ‘최초 르네상스 화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소장 그림 중 대표작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봄)’와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방울새의 성모’,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프란체스카의 ‘우르비노 부처의 초상’, 파르미지아니노의 ‘목이 긴 성모’ 등이다. 레오나르도 최초의 작품이자 스승 베로키오와 공동으로 그린 ‘세례받는 그리스도’를 비롯해 ‘수태고지’와 미완성작 ‘동방박사의 경배’도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2점의 교황 초상화도 같은 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 율리오 2세와 클레멘스 7세(그림은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 시절 모습) 교황이다.

미술관은 동관과 서관 두개의 건물이 짧은 복도로 이어져 있고 3개 층에 걸쳐 100여 개의 전시실이 있다. 첫 번째 방은 르네상스 회화의 새 시대를 연 조토와 그의 스승 치마부에 그리고 시에나의 거장 두초의 대형 제단화로 시작한다. 좌우에 천사들이 서 있고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대형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세 그림의 구도는 비슷해 모두 ‘장엄’이라는 뜻의 ‘마에스타’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다 감상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부족하다. 미술관 바깥 회랑의 벽감(벽면에 뚫려진 움푹하게 후퇴한 부분)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페트라르카,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 피렌체가 낳은 위인들 26명의 상이 늘어서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 ‘프리마베라(봄)’, ‘비너스의 탄생’ 

우피치 미술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연 피렌체 출신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그림이다.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프리마베라(봄)’ ‘비너스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등 보티첼리의 유명 그림들이 이곳에 있다. 특히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은 관람객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그림이다.

보티첼리는 피렌체에서 가죽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금 세공사 훈련을 받다가 수사이자 화가인 프라 필리포 리피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유명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활동했다. 이곳에서 만난 인물이 7살 연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두 사람은 잠시나마 함께 술집을 차릴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다.

보티첼리는 20대 중반 공방에서 독립한 뒤 피렌체 공화국의 사실상 통치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다. 그는 로렌초의 업적과 메디치 가에 대한 극도의 존경을 그림에 우의적으로 담아냈다. ‘동방박사의 경배’(111×134㎝, 1475년)도 그중 하나다. ‘동방박사의 경배’에는 20여 명이 등장하는데 로렌초를 포함해 메디치 가 사람들이 많다. 보티첼리는 자신의 모습도 그림에 그려넣었다. 그림 가장 오른쪽에 서서 노란 옷을 입고 그림의 감상자와 눈을 맞춘 인물이 보티첼리다. 보티첼리는 ‘비너스와 마르스’(69.2×173.4㎝, 1483년)에서도 로렌초를 노골적으로 부각시켰다.

보티첼리 작 ‘동방박사의 경배’(111×134㎝, 1475년). 그림에서 가장 오른쪽에 노란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보티첼리다. 오른쪽 사진은 확대한 보티첼리 얼굴이다.

 

자신의 대표작 ‘프리마베라’(봄, 203×315㎝, 1480년대 초반)에는 왼쪽부터 전령의 신 헤르메스, 비너스를 수행하는 삼미신(三美神), 비너스와 사랑의 활을 쏘는 큐피드, 꽃의 여신 플로라와 클로리스, 서풍의 신 제피로스 등 이교 신화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서양미술사의 어떤 그림보다 해석이 구구하다. 그림 속 꽃만도 170여 종이나 된다.

보티첼리 작 ‘프리마베라’(203×315㎝, 1480년대 초반)

보티첼리는 36살이던 1481년 로마로 갔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예배당이 1481년 바티칸 궁 내에 완성되자 내부 벽화를 그릴 화가로 페루지노, 기를란디요 등과 함께 보티첼리를 낙점했기 때문이다. 보티첼리는 로마에서 프레스코화 몇 점을 그린 후 1482년 피렌체로 돌아가 또 다른 대표작 ‘팔라스와 켄타우로스’(204×147㎝, 1482년)를 완성했다.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관람객이 가장 보고 싶어해

‘비너스의 탄생’(180×280㎝, 1485년경)은 ‘프리마베라’와 함께 보티첼리의 대표작이다. 보티첼리는 아름다운 피조물을 통해 신의 위대함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화를 주제로 벌거벗은 10등신의 아름다운 여인상을 과감하게 그렸다. 비너스는 영어식 표현이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 로마신화에는 베누스로 표기한다.

보티첼리는 그림에서 비너스의 결정적인 부분을 가림으로써 정숙함을 과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고대 그리스의 ‘베누스 푸디카(정숙한 비너스라는 뜻)’ 스타일을 부활시켰다. ‘비너스의 탄생’은 고대 로마 이후 처음으로 실물 크기에 가까운 여성 누드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보티첼리 작 ‘비너스의 탄생’(180×280㎝, 1485년경)

 

14세기에 태동한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하지만 15세기 내내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주제는 여전히 신약과 구약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티첼리가 비너스를 실물 크기의 누드로 그린 것은 기독교적 주제로부터의 이탈과 아름다운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몸을 미술사에 제시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후 사라졌던 매혹적인 여성의 몸이 복권한 것이다.

그러나 보티첼리는 관능적인 비너스 그림 때문에 교회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교회에 반해 시민을 선동하는 죄를 저지른다는 비판도 받았다. ‘비너스의 탄생’은 주제의 혁신과 르네상스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으로는 중세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가장 중요한 원근법에 의한 공간감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너스의 탄생’ 그림 속 주인공은 보티첼리가 연모한 여인

‘비너스의 탄생’ 그림 속 주인공은 신화 속의 비너스이지만, 보티첼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그린 주인공은 8살 연하의 시모네타 베스푸치(1453~1476년)라는 여인이었다. 시모네타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부유하고 유력한 집안에서 태어나 18살에 베스푸치 집안의 마르코 베스푸치와 결혼하기 위해 피렌체로 왔다. 당시 베스푸치 집안은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과 가까운 유력 집안이었다.

피에로 디 코시모 작 ‘시모네타 베스푸치’(57×42㎝, 15세기 경)

 

시모네타는 매너가 좋고 상냥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미모에다 문학적 감각과 해박한 지식까지 갖춘 팔방미인이었다. 시모네타는 결혼 후 젊고 촉망받는 남성들을 매혹하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이런 시모네타를 피렌체의 예술가들과 인문주의자들이 한 목소리로 찬미했다.

보티첼리도 메디치 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곳을 찾아온 시모네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시모네타는 23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요절했다. 그러자 아름다운 여인이 요절했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은 화가들과 문인들이 그녀의 이미지를 작품으로 남겼다. 오늘날 피렌체에 가면 그녀를 닮은 여인들이 미술관에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티첼리 역시 시모네타를 미적 근원으로 삼아 ‘프리마베라’ ‘비너스의 탄생’ ‘마르스와 비너스’ 등 자신의 그림에 등장시켰다. 보티첼리는 죽기 전, “시모네타의 발 끝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말년에는 과격한 신정(神政) 펼치는 사보나롤라에 빠져

보티첼리의 그림에 일대 변화가 찾아온 것은 1490년대였다. 결정적 계기는 1495년 메디치 가의 추방과 그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한 사보나롤라 수도사의 과격한 신정(神政)이었다. 사보나롤라가 메디치 가의 사치를 비판하며 피렌체에 닥칠 징벌과 종말을 경고할 때 사보나롤라의 열렬한 추종자로 돌변한 다른 시민들처럼 보티첼리 역시 사보나롤라에 경도되어 자신의 작품에서 이교도적 주제들을 없애버리고 신비주의적 경향에 빠졌다. 이후 보티첼리의 작품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불안감과 긴장감이 두드러졌다.

사보나롤라는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다가 시민들이 등을 돌려 1498년 5월 23일 화형에 처해졌다. 보티첼리는 충격을 받아 종교적 우울증에 빠져 번뇌의 나날을 보냈다. 화풍도 ‘환희’에서 ‘비애’로 180도 바꾸었다. 신화 소재의 아름다운 꿈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꽃피게 한 그의 회화 작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린 비기독교적 주제의 작품들은 스스로 불구덩이에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린 전형적인 종교화 ‘신비한 탄생’(75×109㎝, 1500년)에는 그의 이런 내적 번뇌가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직접 날짜를 적고 서명한 유일한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는 그리스어로 된 3줄의 명문이 적혀있다. “나 산드로는 1500년 말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 그림을 그린다. 이 혼란기의 초반은 요한묵시록 제11장의 두 번째 재앙에 따라 악마가 3년 반 동안 해방되어 날뛴다. 이후 악마는 제12장의 말씀대로 묶일 것이고, 이 그림에서처럼 (제압된 악마를)보게 될 것이다.”

보티첼리가 말년에 그린 ‘신비한 탄생’(108×75㎝, 1500년). 보티첼리가 유일하게 날자를 적고 서명한 그림이다.

 

보티첼리는 말년에 질병에 시달렸다. 똑바로 설 수도 없어 목발을 짚고 다녔다. 재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무일푼 신세로 지내다가 1510년 5월 17일, 6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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