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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⑥] 로마(3) : 미켈란젤로, 로마 대약탈, 스위스 근위대, 로마 4대 성당

by 김지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전형적인 모범으로 신이 세상에 내려준 자”

 

조르조 바사리가 르네상스 시기를 기록한 ‘미술가 열전’에 미켈란젤로에 대한 이런 찬사가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전형적인 모범으로 신이 세상에 내려준 자이다.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의 행동으로부터 삶의 방법을 배우고, 그의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훌륭한 장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자화상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동쪽으로 약 100㎞ 정도 떨어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퇴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 이 지역의 지금 이름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다. 미켈란젤로는 어머니가 6살 때 병사해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유모의 남편이 석수여서 어려서부터 조각과 친숙하고 그림에도 재주가 있어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13살 때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1449~1494)의 공방에 아들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15살 때인 1490년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발탁되어 메디치 가문이 설립한 예술 아카데미를 드나들었다. 로렌초는 메디치 궁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자기 아들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했다. 아들 중에는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될 조반니도 있었다.

당시 로렌초는 플라톤 학파를 부활하기 위해 예술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플라톤에 심취한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수시로 초대해 토론을 하고 만찬을 즐겼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를 따라 모임에 참석,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철학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토론했다. 틈틈이 메디치 궁 정원에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들을 감상하면서 조각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실력을 연마했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가 1492년에 죽고 그의 무능한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가 실권을 잡아 피렌체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21살이던 1496년 6월 로마로 갔다. 그리고 ‘피에타’(174㎝×195㎝·1498~1499) 조각상을 완성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로 우뚝 서게 한 출세작이 되었다.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을 통칭한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조각이라는 예술의 모든 가능성과 힘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는 하나 더 있다. 현재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인데 마리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 피에타가 아니라 몸을 세운 입상 조각이다. 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70대 초반에 시작했으나 작업을 자주 중단하다가 1564년 89세로 숨져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숨진 뒤 당시 예술품 수집가이던 마르키스 론다니니에게 넘어갔다가 이후 밀라노로 팔려가 지금은 ‘론다니니 피에타’로 불린다.

 

그 자신이 조각을 예술 중심의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림 그리는 것 내키지 않아

로마에서 피에타 제작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피렌체에서 ‘다비드상’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로 돌아가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9세인 1504년 높이가 4m나 되는 대형 조각상 ‘다비드상’을 완성했다. ‘다비드상’은 도나텔로, 베로키오 등 다수 조각가들이 청동과 대리석으로 제작한 것도 많으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최고로 친다.

받침을 포함해 5.5m 높이의 다비드상을 5~7m 거리에서 보면 균형이 잘 잡힌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보면 오른팔이 신체에 비해 길고 돌을 쥐고 있는 손도 유난히 크다. 하체는 상체에 비해 크고 머리도 가분수다. 이렇게 어긋나는 비율은 미켈란젤로가 아래에서 조각상을 쳐다볼 것을 감안한 원근법을 계산해 조각상의 각 부위를 실제보다 크거나 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비드상은 300년 넘게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자리를 지키다 1873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광장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복제품. 피렌체에 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완성할 무렵 교황 율리오 2세가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도나토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대대적인 증개축을 명하고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궁의 몇개 방에 대형 벽화를 그리게 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문맹자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알기 쉽게 가르쳐줄 목적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했다.

미켈란젤로는 곤혹스러웠다. ‘피에타’ ‘다비드’같은 걸작 덕분에 조각가로는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화가로서의 경력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자신이 조각을 예술 중심의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림 그리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러다보니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 임무를 맡긴 것은 미켈란젤로에 대한 교황의 두터운 신임을 시기한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잘못 그려 망신당하기를 바라서 꾸민 책략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1508년 5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대형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수 몇 명이 도움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감을 준비하는 조수 한 명만을 남겨두고 혼자 작업했다. 라파엘로가 제자들을 고용해 벽화 작업을 진행한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1512년까지 4년 동안 홀로 작업했다. 4년간 눕거나 머리를 쳐든 자세로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다. 미켈란젤로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천재의 90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숭고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힘들게 작업하는 데도 율리오 2세가 빨리 그릴 것을 재촉하자 교황에 대한 반발심을 그림에 표현했다. 예언자 중 한 명인 스가랴의 얼굴을 자기를 몰아붙이는 교황의 얼굴로 그리고는 그 뒤쪽에서 천사가 손가락질로 조소하는 모습을 그려넣은 것이다.

초대형 천장화(14×39m)는 1512년 10월 완성되었다. 내용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한 ‘천지창조’였다. ‘빛과 어둠의 창조’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노아의 제물’ ‘대홍수’ ‘술 취한 노아’까지 9개의 그림으로 구성해 100명의 인물을 등장시켰다.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 그림이 ‘최후의 심판’이고 천장 그림이 ‘천지창조’다.

 

기존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최후의 심판’에 찬사와 비난 쏟아져

‘천지창조’를 완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1533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로 ‘최후의 심판’을 의뢰했다. 벽화 작업은 클레멘스 7세가 다음해 세상을 떠나 중단되었으나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1534~1549)가 또다시 벽화를 주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 바로 윗벽에 있는 페루지노의 프레스코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또다시 이 거대한 벽화를 홀로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배경 삼아 1534년부터 1541년까지 7년간 성당의 제단 뒤 벽에 천국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지옥의 공포를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종교화가 아니라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그림을 지향했다. 벽화에 그려진 천사들이 모두 날개도 없이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고 예수를 비롯 신성해야 할 38명의 성자들 모두 나체로 그린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는 긴 턱수염을 기른 전통적인 이미지의 예수가 아니라 늠름한 체격의 젊은이였다. 예수 옆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발아래 쪽에는 2명의 성자가 그려져 있다. 그중 오른쪽은 예수의 12제자 중 한명으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인데 미켈란젤로는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이처럼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난 ‘최후의 심판’(13.7×12.2m)이 공개되자 사람들 사이에 놀라움과 찬사 그리고 비난이 가득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바티칸의 완고한 일파에게서 비판을 받았었다. 특히 교황의 의전실장이 가장 심하게 비난했다. 그가 그림 속 벌거벗은 인물들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자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에 떨어진 미노스로 그려놓아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최후의 심판’을 없애버리자는 과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서 ‘반종교개혁’이라는 가톨릭 내부의 정화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은 1563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다음해에 외설적이란 이유로 ‘수정’하라는 형벌을 받았다. 교황청은 미켈란젤로가 1564년 사망한 뒤 그의 제자를 시켜서 나체의 중요한 부분을 가리개로 덧칠하게 했다. 17~18세기에도 여러 화가들이 나체들 앞을 허리띠로 가리는 수정 작업을 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프레스코화다. 프레스코화는 오랜 시간 노출되면 먼지가 쌓이고 겉에 칠한 유약 때문에 시커멓게 변색하거나 회벽이 갈라져 보수와 보존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 프레스코화의 복원 공사가 1980년부터 1994년까지 14년에 걸쳐 이뤄졌다. 일본의 한 TV사가 자금을 지원해 촛불의 그을음과 관광객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 등으로 찌든 때를 첨단 기술로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 두 작품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고색창연한 옛 유물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지나치게 밝아진 화면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아흔 가까운 나이에도 일손을 놓지 않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탕을 그리스도교 교회로 개조하는 대규모 사업과 씨름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숨졌다.

  

■로마 대약탈과 스위스 근위대

 

바티칸 시국에도 군인이 있다. 다만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군인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외인부대로 유명한 스위스 출신의 근위대다. 교황청이 이들을 처음 고용한 것은 교황 율리오 2세 때로, 1505년 스위스연방에 200여 명의 용병을 상비군으로 파견해 주도록 요청한 게 시초다.

당시 유럽의 용병은 돈만 밝히는 난봉꾼으로 유명했다. 기강이 해이하고 배신을 잘하고 횡포만 부렸다. 전투가 벌어지면 내빼기에 바빴다. 하지만 척박한 산악지방에서 강인하게 살아 온 스위스 용병은 달랐다. 스위스 용병 150명은 1505년 가을 고향을 떠나 700여㎞의 행군 끝에 1506년 1월 교황청에 도착했다. 용병들은 점차 교황청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스위스 근위대가 바티칸 시국 주위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

 

그로부터 5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바티칸을 지키게 된 결정적 계기는 1527년 일어난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침공과 약탈이다. ‘로마제국의 후신’을 자처한 신성로마제국이 로마를 침공한 이유는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간의 해묵은 원한과 알력, 그리고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립 때문이었다. 로마 약탈의 전초전은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과 1525년 파비아 전투다. 두 번 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간의 대결 구도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본인의 저서 <20세기 이야기>(답다 출판)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의 남부 지방에서 시작할 때만 해도 300여 개의 영주 국가들로 이뤄진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알자스·북스위스 등지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중추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대공위 시대(1254~1273)의 혼란기를 틈타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길러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첫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바로 루돌프 1세다.

그는 황제로 재위(1273~1291)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본령으로 삼고 주로 정략결혼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정책은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통이 되었다.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재위 1452~1493)는 145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까지 겸해 스위스에서 북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우뚝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합스부르크가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인 황제는 막시밀리안 1세(1493~1519)였다. 그는 전쟁이 아닌 순전히 혼인 정책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혀나갔고 과실은 손자 카를 5세(재위 1519∼1556)에게 넘겨졌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둘러싼 유명한 시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하게 만들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을 하라.” 피 흘리는 전쟁 대신 결혼으로 영토를 접수하고 승리의 영광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77년 부르고뉴 공국(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프랑스 일부)의 상속녀와 결혼해 부르고뉴까지 손에 넣었다. 아들 필리프 1세를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에게 1504년 장가보내 스페인과도 인연을 맺었다. 혜안인지 행운인지는 몰라도 후아나 공주의 형제들이 잇따라 죽고 후아나도 정신이 오락가락해 스페인은 졸지에 그녀의 아들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스페인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의 차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손녀의 혼인 관계로 얻은 헝가리와 보헤미아(체코)까지 손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 카를 5세는 독일영방 외에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체코, 헝가리까지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로마 대약탈, 도시 파괴를 넘어 로마 문명의 자취까지 쓸어버려

카를 5세(재위 1519~1556)는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할아버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노렸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 다음으로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는 자리였다. 19살의 카를 5세가 선거로 뽑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넘보고 있을 때 20대 중반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도 도전장을 냈다. 초반에는 프랑수아 1세가 유리해 보였으나 최종 승리는 무차별적으로 뇌물을 뿌린 카를 5세가 차지했다.

카를 5세.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1550년대 작품

 

프랑수아 1세는 와신상담 끝에 이탈리아를 다음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령,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피렌체 등 작은 도시국가들로 쪼개져 있어 결집된 힘이 없었다. 그런데 카를 5세 역시 이탈리아에 눈독을 들여 두 강자 간의 싸움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일어난 게 1525년 2월 이탈리아 북부에서 격돌한 파비아 전투였다. 결과는 화승총을 세계최초로 사용한 신성로마제국의 승리였다.

프랑수와 1세는 포로로 잡혀 1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거액의 몸값과 이탈리아 영토 포기를 약속하고 1526년 풀려났다. 자유의 몸이 되자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해야겠다는 의지가 되살아났다. 먼저 영국의 헨리 8세,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과 동맹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1527년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에게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공격하도록 했다.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파죽지세로 로마 근교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1527년 5월 6일 로마를 지키는 교황 군대와 공성전을 전개했다. ‘로마’와 ‘로마’의 격돌이었다. 그런데 개전 초기, 성벽 아래서 황제군을 지휘하던 부르봉 공작이 교황군의 화승총에 맞아 전사했다. 황제군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결국에는 성벽을 넘어 교황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그날 저녁 로마 시내를 점령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지하통로로 연결된 산 탄젤로 성으로 피신했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피신한 산 탄젤로 성

 

황제군은 로마 전역을 짓밟고 유린했다. 그날 하루에만 8000여 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황제군은 8일간 로마를 약탈하고 학살하고 강간했다. 이른바 ‘로마 대약탈’ 결과 4만 5000여 명이 죽고 수많은 민가와 교회가 파괴되었다. 고대 로마시대의 건축물과 고문서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다. 5세기 초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보다 더 잔혹했다.

특히 독일 용병들의 약탈이 잔인했다. 이유는 크게 4가지였다. 첫째,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은 상당수의 신교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던 독일농민전쟁(1524~1525) 직후여서 신교도가 주축인 용병들은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둘째, 용병대장인 부르봉 공작이 일찍 전사해 용병들의 약탈을 통제하지 못했다. 셋째, 카를 5세가 약속한 용병 급료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만이 쌓이고 보상심리가 작용했다. 넷째, 용병들 사이에 부유한 도시인 로마를 약탈하고자 하는 욕구가 컸다.

약탈 순간을 현장에서 목격한 만토바 공국의 대사는 “돌조차 연민의 정을 일으킬 정도”라며 참상을 전하고 베네치아 대사는 “로마의 지금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지옥에도 없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목격자는 “지옥이라도 로마가 지금 처한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시를 기록했다. 이 잔혹한 사건을 후대는 ‘로마 대약탈’로 기록하고 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용병의 경호를 받아 산 탄젤로 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에는 항복해 포로로 갇혀지내다가 거액의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스위스 용병의 비극적 활약상, ‘로마 대약탈’ 후에도 계속 이어져

충성심이 남달랐다던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을 지키기 위해 황제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500여 명의 용병 중 대부분은 전사하고 42명만 살아남았다. 이후 교황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스위스 용병들을 각별하게 챙겼다. 용병을 교황청 근위대로 격상시키고 근위대는 스위스군 전역자로만 뽑는 전통을 만들었다.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군복에 메디치가의 상징 색상인 노랑과 파랑색을 입힌 것은 교황의 뿌리인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우대한다는 애정의 표시였다.

도시의 파괴를 넘어 로마문명의 자취까지 쓸어버린 ‘로마 대약탈’은 역사에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용병단의 주축이 신교도였다는 점 때문에 반종교개혁의 공감대가 퍼지고 종교 간 증오감이 커졌다. 교황은 메디치 가의 대공녀를 프랑스로 시집보내 프랑스와의 관계를 다지며 훗날을 도모했다. 프랑스 역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1562년의 ‘위그노(신교도) 대학살’도 메디치 가 출신인 2명의 프랑스 왕비가 주도했다.

교황의 패전은 영국의 종교까지 바꿔 놓았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헨리 8세 국왕이 시녀 앤 블린과 결혼하고 싶어 왕비 캐서린과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교황에게 청원을 넣으면서 시작되었다. 캐서린 왕비는 스페인 공주 출신으로 헨리 8세의 형수였으나 헨리 8세는 형이 죽은 후 스페인과의 관계를 의식해 형수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카를 5세가 이모인 캐서린 왕비가 내쳐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교황이 이혼을 불허하자 헨리 8세는 이에 반발해 1534년 수장령을 내렸다. ‘영국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라는 수장령에 따라 영국의 국교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뀌었다.

스위스 용병의 비극적인 활약상은 ‘로마 대약탈’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798년 나폴레옹이 로마를 침략할 때 교황 비오 6세(재위 1775~1799)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대부분 전사한 바 있고,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파리의 튀를리 궁전을 지키다가 786명이 전사한 적도 있다. 당시 프랑스의 시민혁명군은 프랑스군 수비대가 모두 도망하고 스위스 용병들만 남게 되자 이민족인 용병들에게 퇴각할 기회를 주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계약기간이 남았다고 시민혁명군의 제의를 거절한 뒤 왕과 왕비를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때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인 1821년,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하고 독일의 루카스 아호른이 거대한 암석을 쪼개 조각한 것이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자의 사자상’(10×6m)이다. 루체른은 당시 스위스 용병대장인 칼 폴 장군의 출생지다. ‘빈자의 사자상’은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숫사자가 부러진 창에 어깨가 찔려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는 모습이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빈자의 사자상’을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했다. 스위스는 19세기 중엽, 법률로 스위스인의 외국군 입대를 금지했지만 교황청 근위대만큼은 예외로 인정해 지금도 바티칸 시국을 지키는 것은 스위스 근위대뿐이다.

독일의 루카스 아호른이 거대한 암석을 쪼개 조각한 ‘빈자의 사자상’(10×6m), 스위스 루체른에 있다.

   

■로마의 ‘4대 성당’

 

로마에는 성당이 1000여 개나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성당이 성 베드로 대성당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유서깊은 성당도 수두룩하다. 편의상 꼽는 ‘4대 성당’ 혹은 ‘7대 성당’이다.

‘4대 성당’은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성 밖의 성 바오로 성당)이다. ‘7대 성당’으로 확장하면 ‘4대 성당’에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당(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 성 로렌초 대성당, 성 세바스티아누스 대성당을 포함한다. 이중 몇몇 성당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관심과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라테라노 대성당 =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로마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기독교사의 중요한 종교회의와 조약 체결이 이곳에서 많이 이뤄졌다. 성당 입구에는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머리’라고 적혀 있다. 라테라노 명칭은 로마 제국 초기, 가문의 저택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게 기증한 라테라누스 가문에서 유래한다.

라테라노 성당

 

황제는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뒤 교황에게 이 저택을 바쳤다. 저택은 곧 교황이 거주하는 궁전으로 바뀌었고 궁전 곁에는 130m 길이의 대성당이 세워져 324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위 314~335)가 ‘하느님의 집’으로 봉헌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봉헌보다도 10여 년 이상 빨랐다. 896년 지진으로 붕괴되어 905년 개축했다. 12세기 중엽 당시 교황이 성당을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에게 봉헌하면서 성당의 이름이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약 1000년 동안 교황의 거처로 사용되다가 1309년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정착하면서 황폐해졌다. 교황이 없는 사이 두 차례나 화재가 일어나 크게 파손되었다. 이 때문에 1377년 교황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왔으나 라테라노 대성당에 거주하지 않고 바티칸 궁을 새로 지어 교황의 거처로 삼았다. 그래도 로마 주교좌의 위상은 라테라노 대성당이 그대로 유지했다.

이후 대성당을 전면 재건할 필요가 생기자 몇몇 교황이 적극적으로 나서 1730년대에 대성당을 완성했다. 다만 대성당의 정면부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면서 옛 대성당의 바실리카풍 외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성당 안에는 로마의 공식 주교인 교황의 ‘좌(카테드라)’가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교황이 새로 선출되면 이곳에서 첫 미사를 드린다. 성당 내부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두개골이 모셔져 있고 성당 꼭대기에는 예수와 제자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 맞은편에는 스칼라 산타라는 성 계단이 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할 때 빌라도 총독에게 나아가면서 밟았다는 ‘빌라도의 계단’이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것을 16세기 말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는데 실제 예루살렘의 계단인지 여부는 논란 중이다. 그래도 ‘빌라도의 계단’ 참배객들은 예수의 고난을 떠올리며 28개의 나무로 덧씌운 돌계단을 무릎으로 오른다.

스칼라 산타 계단

 

성당의 광장 한 복판에는 BC(기원전) 15세기 때 만들어진 47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4세기 경 이집트에서 가져와 로마의 대전차경기장에 세워놓았던 것을 1587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로마에 있는 13개 오벨리스크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오벨리스크가 있는 광장에는 라테라노 건물이 있는데 현재 바티칸시국이 있게 한 1929년의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 =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 즉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은 로마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에 352년 세워졌다.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성당으로는 최초였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동정녀 마리아가 공식적으로 예수의 어머니로 선포된 것을 기념해 교황 식스토 3세(432~440) 때 크고 아름답게 확장되었다. 이후 초기 원형을 유지하다가 10세기부터 18세기까지 계속된 증개축 과정에서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건축 양식이 혼재되었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당 파사드(전면)는 1743년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했다. 성당 내부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 벽화, 부조들이 있고 천장은 금빛으로 장식되어 화려하다. 천장을 금 도금의 격자형으로 디자인한 것은 1489년으로 여기에 사용된 금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유럽인들이 가져와 교황청에 헌납한 것이다. 중앙 제단 아래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 사용된 말구유로 알려진 성유물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을 설계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성당 밖에도 여러 건축물이 있다. 1377년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은 높이가 75m나 되어 로마에 있는 종탑 중에서 가장 높다. 성당 앞에는 1614년 세워진 성모 석주가 있는데 가톨릭 국가들에 세워진 수많은 성모 석주의 모델이 되었다

 

▲성 바오로 대성당 =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사도 바울(바오로)의 무덤 자리에 세운 성당이다. 이탈리아 명칭으로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성당이다. ‘푸오리 레 무라’는 고대 로마의 성벽 밖이라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성 밖의 성 바오로 성당’이다.

성 바오로 대성당

 

서기 64~67년 경 성 바오로가 지금의 트레 폰타네 지역에서 순교하자 그를 따르던 기독교인들이 성 베드로 유해와 함께 비밀리에 바오로 유해를 수습해 성 밖에 매장했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참수될 때 돌기둥 위에서 잘려 떨어진 머리가 세 번 튀었는데 그 곳곳마다 샘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곳의 지명이 ‘세 개의 샘’이라는 뜻의 ‘트레 폰타네’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 반포로 기독교를 공인하자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성당 건설을 제안하고 콘스탄티누스가 이를 받아들여 착공되었다. 324년 11월 18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집전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축성도 같은날 이뤄졌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재위 364-375) 때 확장했는데도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재위 379~395) 때 또다시 대폭 확장했다. 이후 성당은 이민족의 약탈과 지진 등으로 수차례 피해를 당했으나 그때마다 보수공사를 철저히 해 원형은 유지되었다. 그렇게 1435년 동안 초창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1823년 7월 15일 일어난 대화재로 결국은 파괴되었다. 성당에 보관되었던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품도 이때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전소 이전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둔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로마의 산 마르티노 아이 몬티 성당의 벽화(17세기)와 동판화가인 피라네지의 에칭(18세기 말)에서 전소 이전의 모습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의 복원이 어느정도 가능했다. 재건 공사는 1840년 축성식을 거행하면서 마무리되었다.

‘4대 성당’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교황 율리오 2세가 16세기 초,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밀어버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의 신축을 감행해 현재는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 라테라노 대성당과 성모 마리아 대성당 또한 후대로 내려오면서 기존 건물이 증개축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등 각종 건축 양식이 추가되는 통에 원형을 가늠하기 어렵다. 성 바오로 대성당 역시 바실리카풍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던 재건 이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신고전주의 양식이 반영되어 다소 차갑다는 평을 듣고 있다.

 

▲성 십자가 대성당 =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

‘4대 성당’으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성당이 있다. 약칭으로 ‘성 십자가 대성당’인데 정식 명칭은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이다. 7대 성당으로 분류한다. 이름이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인 것은 다량의 성유물을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성당은 성유물에 관한 한 독보적이다.

성 십자가 대성당

 

초기 성당들은 성유물에 대한 애착이 컸다. 당연히 예수와 직접 관련있는 유물을 최고로 쳤다. 사도들과 순교성인들의 유골과 유품도 치열한 확보 경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절취와 강탈도 다반사였다. 어떤 유해와 유품은 도저히 분리해선 안되는 데도 쪼개고 떼어갔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때 설립한 두 성당이다. 베드로의 유해를 분리해 몸체 유골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두개골은 라테라노 대성당에 모시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엘레나는 신앙심이 깊었다. 엘레나는 아들이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자 325년 경 칠십 노구에 대규모 발굴단을 이끌고 성지 예루살렘을 직접 찾아가 엄청난 분량의 성유물을 가져왔다. 이 성유물을 한데 모시기 위해 설립한 성당이 ‘성 십자가 대성당’이다.

성당에 모신 목록을 보면 엄청나다.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 조각, 가시관에서 뜯어낸 가시, 십자가형에 사용한 못, 예수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로마 병사의 창, 그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봤던 성 도마의 손가락 등이다. 예수의 피땀을 닦은 베로니카의 수건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 중이다. 성당 바닥은 예수살렘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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