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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6개주를 가다③] 코네티컷주의 하트퍼드, 마크 트웨인의 집, 스토우 부인의 집과 정원

↑ 하트퍼드 시내와 코네티컷강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하트퍼드는 코네티컷 식민지의 모체

본격적인 뉴잉글랜드 여행의 첫 기착지는 최남단 코네티컷주다. 이곳은 남쪽에 위치한 대서양 해안에 면해 있다. 너댓 개의 비교적 큰 강이 흐르고, 남북으로 발달된 크고 작은 비옥한 계곡들도 여럿이다. 면적은 미국 50개 주 중 3번째로 작고 인구는 357만명이다. 남쪽으로 대서양의 롱아일랜드 해협, 서쪽으로 뉴욕, 북쪽으로 매사추세츠주, 동쪽으로 로드 아일랜드주와 접하고 있다.

코네티컷은 뉴잉글랜드에서도 가장 퓨리턴적인 식민지였다. 누구에게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개인주의 성향, 외형적 화려함을 기피하는 청교도 신앙, 개별 정착지가 중심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겹쳐 농업 이외에 다른 산업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후 보수적인 농경생활과 상공업을 기피하는 농업지향적 생활양식은 코네티컷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에게 농업은 경제적 이익 추구의 수단이기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검소하고 정직한 삶, 즉 청교도로서의 삶을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철저한 농업경제 체제하에서 코네티컷은 넓고 비옥한 땅과 근면하고 성실한 청교도 농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발전했다. 1664년에는 뉴헤이븐 식민지를 합병, 청교도 신앙의 불꽃을 비교적 오랫동안 지켜나갔다.

하트퍼드 위치

 

인구 12만여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주도답게 당당한 위엄 갖춰

코네티컷 식민지의 모체가 되는 정착촌이 처음 들어서고 장차 주도가 된 곳은 하트퍼드다. 뉴욕에서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올라가는 95번 주간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코네티컷 15번 도로와 66번 도로로 바꿔타면 나온다. 뉴욕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인구 12만여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주도답게 당당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세계적 보험회사 본사들이 몰려 있어서 ‘세계 보험산업의 수도’라는 별명을 가졌다. 금융 도시의 명성에 어울리게 도심은 깨끗하고 정갈했다. 남북전쟁 후 한 때는 미국에서 가장 부자 도시로 이름을 날렸으나 요즘은 저소득층 주민이 많다고 한다. 400년 전 퓨리턴들이 정착한 덕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미술 박물관인 워즈워스 아테네움(Wadsworth Atheneum)과 부쉬넬 공원을 품고 있고,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하트퍼드 공립 고등학교(Hartford Public High School)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미술 박물관인 ‘워즈워스 아테네움’

 

코네티컷강이 도시를 동서로 나누며 흐르고 있고, 다보탑 모양의 탑을 머리에 인 황금빛 돔을 왕관처럼 쓰고 있는 웅장한 주청사가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유서 깊은 건물과 고층빌딩들이 오보록이 밀집되어 있어 반나절이면 도심을 다 둘러볼 수 있다.

다보탑 모양의 탑을 머리에 인 황금빛 돔을 왕관처럼 쓰고 있는 웅장한 주청사가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다른 식민지처럼 신앙생활 통제·강요하지 않아

하트퍼드의 초기 연고권을 주장한 곳은 영국과 치열한 식민지 경쟁을 벌인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하트퍼드에 1633년 ‘희망의 요새(Fort Good Hope)’라는 소규모 교역 거점을 건설했으나 관리는 느슨했다. 이런 틈새를 타서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일부 주민들이 이주해 ‘희망의 요새’ 바로 북쪽에 ‘윈저(Winsor)’라는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 이듬해 영국에서 건너온 일단의 상인들은 ‘희망의 요새’ 남쪽에 ‘웨더스필드(Wethersfield)’라는 새 정착촌을 건설했다.

1634년에서 1636년에 걸쳐 매사추세츠의 뉴타운(현재의 보스턴 케임브리지) 교회 교인들도 매사추세츠의 신앙문제와 토지문제에 불만을 품고 코네티컷 강변으로 집단 이주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지나친 엘리트 중심주의 정치, 교회 정회원 자격을 자유인 신분자에게만 부여하는 사회적 불평등성, 신앙 양심의 자유에 대한 편협성 등에 대한 반발, 보스턴 주변 지역의 농경지와 목초지 부족으로 인한 청교도적 신앙생활의 곤란 등이 겹쳐 국왕의 식민지 개설 특허장 없이 집단 이주를 감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다른 식민지처럼 통제되고 강요되는 관행이 없고 각 정착촌마다 스스로의 판단과 필요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무엇보다 계곡으로 갈라진 지형적 특성 때문에 매사추세츠처럼 정치·종교의 통제와 권력의 집중이 쉽지 않아서 주민들은 부유한 계층도 극빈층도 없이 경제적으로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다. 정착촌들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청교도 신앙을 견지하고 또 실천하고자 하는 열정뿐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집

미국 최고 문호로 손꼽히는 마크 트웨인(1835~1910) 하우스가 하트퍼드에 있다는 것은 뜻밖이다. 남부 미시시피강의 작가로 알고 있던 마크 트웨인의 집을 이곳 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망외 소득이었다.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의 집은 인쇄기 사업에서 파산한 트웨인이 1891년 처분한 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한때는 빈 집으로 버려지기도 했다. 그러자 마크 트웨인의 문학을 사랑하던 하트퍼드의 유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재단을 설립했다. 집을 인수하고 옛 모습을 복원시켜 현재의 박물관으로 탄생시켰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 겸 박물관은 개별 관람은 허용하지 않는다. 30분마다 가이드 투어를 통해 설명을 들어가며 1시간 가량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거의 80세 쯤 되어보이는 할머니였는데도 열정적이고 유머가 있었다. 무엇보다 발음이 정확해 나같은 사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는 1962년 국가역사유적으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하우스 옆에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방문자센터에는 마크 트웨인에 대한 자료가 잘 갖추어져 있다. 그에 관한 영화도 상영하고 세미나 공간도 갖춰놓았다.

 

독특한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보랏빛 붉은 색의 3층 건물

마크 트웨인은 1835년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변의 한니발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결혼 후 버펄로로 이사했다가 1871년 하트퍼드로 옮겨와 1874년 이곳에 집을 짓고 1891년까지 살면서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대표작을 집필했다. 당시 하트퍼드는 유수의 출판사들이 몰려 있고, 미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그러나 그가 투자한 인쇄기 사업이 파산하고 빚더미에 앉게 되어 1891년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1900년 다시 코네티컷으로 돌아와 레딩에서 살다가 1910년 세상을 떴다.

그의 집은 독특한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보랏빛 붉은 색의 3층 건물이었다. 작은 구릉 위에 지어진 집은 주변 자연과 어울려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단순한 한국 건축물과 달리 집 한칸 한칸을 다양한 도형으로 잇대어 달아낸 듯 짓는 서양의 건축물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저절로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가게 한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

 

하나의 건물에 1, 2, 3층 지붕과 정사각형, 직사각형, 반원형, 부채꼴, 팔각형의 바닥이 공존하게 하고 박공지붕, 원추형지붕, 팔각지붕 등 다양한 형태의 지붕으로 눈길을 끌어들여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수십 가지의 파사드를 제공한다. 거기에 볼록 오목 지붕의 다락방, 베란다, 창문, 굴뚝 등으로 장식을 추가해 호기심을 최대한 유발하는 빅토리아식 건축은 평생에 걸친 어른들의 레고 작품이다.

내부에는 그가 좋아한 인도와 일본식의 인테리어를 도입하고 목재 가구는 정교하게 조각했다. 2층 서재는 인도 스타일의 벽난로와 섬세한 조각 판넬, 일본식 벽지로 장식한 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어졌으나 그는 주로 3층 당구대 옆 책상에서 하루 40개피의 담배를 피워가며 글을 썼다고 한다. 애연가답게 “담배 피우기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천 번도 넘게 담배를 끊어보았다”는 말을 남겼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 실내 모습

 

통속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가장 미국적인 대문호로 추앙받아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톰소여의 모험’ 요약본 영어책을 읽도록 해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항상 청소년 독서목록 톱 순위에 있어 마크 트웨인은 나에게도 꽤 익숙한 문학가다. 그런데 나는 어린아이들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비슷비슷하게 구성한 작품만을 쓴 마크 트웨인을 그저 그런 통속 작가로 생각해 왔는데, 이곳에 와서보니 가장 미국적인 대문호로 추앙 받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필명은 새뮤얼 클레멘스다. “모든 미국 문학은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책 한 권에서 나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이 미국 문학에서 트웨인이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잘 대변한다. 트웨인은 영국 문학의 아류로 치부되고 미사여구와 감상적 경향이 강하던 당시 미국 문학의 풍토에서 힘이 있고 사실적이고 구어체적인 미국 영어를 본격 사용함으로써 미국적 목소리에 새 방향을 제시했다.

미시시피 강가에서 자란 그의 꿈은 증기선 선장이 되어 강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한때 증기선의 항해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12세에 갑자기 닥친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신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글을 접했다. 그의 지식 대부분은 식자공 시절에 습득한 것이다. 그는 그 시절 미시시피 강변에서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글을 읽었다. 그 결과 특유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감각으로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비평할 수 있게 되어 미국인들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일깨워주었고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톰 소여의 모험’ 초판

 

인도에 매료되어 우리나라의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 처럼 흰 옷을 즐겨 입었다. 흰 머리와 흰 수염이 잘 어울렸다. 사업에서 파산했을 때는 세계여행을 하며 호주, 인도, 스리랑카, 모잠비크, 남아프리카를 거쳐 영국까지 갔다. 이 여행에서 인도를 비롯한 동양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후 그의 방은 인도, 일본 등의 인테리어가 가미되고 복장까지 인도풍이 된다.

미시시피 강변은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에 속했다. 그래서 트웨인은 그의 집에 있는 흑인 노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노예제도의 비도덕성을 깨닫고 나서는 ‘노예제도를 하나님의 뜻과 질서’라고 가르치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자기 집의 노예를 풀어주었다. 훗날 그 흑인이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고용해서 자기를 돕도록 하고 그 가족까지 모두 자기 저택에 살도록 했다. 마크 트웨인은 어린 시절 미시시피 강변의 친구들과 이 흑인노예를 소재로 삼아 사실적 내용을 소설로 기록했다.

 

▲스토우 부인의 집과 정원

마크 트웨인 하우스 옆에는 넓은 잔디광장을 공유하고 있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의 저자 스토우 부인의 집이 있다. 흑인노예의 참혹한 삶을 다루는 소설로 센세이션을 일으켜 링컨의 노예해방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이 유명한 여인은 아름다운 정원사이기도 하여 참으로 멋진 집을 가꾸어 놓았다.

해리어트 비쳐 스토우 부인

 

스토우 부인으로만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해리어트 비쳐 스토우(1811-1896년)다. 작가, 사회개혁가, 화가, 정원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스토우 부인은 매사추세츠주 리치필드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열 한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832년 신학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오하오주의 신시내티로 이사하고 거기서 신학대학 교수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1850년 남편이 매사추세츠주 브룬스윅의 보든(Bowdoin)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1853년까지 브룬스윅에 살면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발표했다. 그 후 남편이 앤도버로 학교를 옮겨 그곳에서 1864년까지 살았다. 남편의 은퇴 후 부부는 하트퍼드로 이사해서 꿈의 집을 지었지만 다시 팔고 1873년 하트퍼드의 포레스트 스트리트에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예쁜 집을 지어 죽을 때 까지 23년간 살았다.

 

고딕 양식의 예쁜 집에 꽃과 나무가 매혹적인 정원

스토우 부인의 집 정원은 꽃과 나무가 매혹적이다.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앙큼한 집과 잘 어울려 계속 내 카메라 셔터를 유혹했다. 19세기 뉴잉글랜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정원 가꾸기는 모든 가정의 주요 관심사였다. 정원은 집주인의 고상한 정신과 품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풍이었다. 아이들은 정원 가꾸기를 통해 예절과 노동 윤리와 근로정신을 배웠다. 잘 가꾼 정원은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스토우 부인 하우스

 

스토우 부인이 직접 심은 것으로 보이는 백년이 넘는 산딸나무와 목련이 아름다운 고옥을 둘러싸며 터널을 이루고 있다. 철마다 새로운 꽃을 심는 둥근 정원, 키친 허브 정원, 독특한 블루 가든, ‘정글’이라고 부르던 야생화 정원, 고상하고 이국적인 식물로 장식하는 하이 빅토리아 가든, 스토우 장미 정원등이 집을 감싸 안으며 둘러 있는 풍경에 매혹되어 나는 계속 집을 뱅뱅 돌며 감탄사를 토해내느라 바빴다.

스토우 부인 하우스에 있는 ‘캐서린 세이모어 데이 하우스’. 1884년 지어지고 1971년 미국의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는데도 행정업무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 잔인하고 비정한 노예제도 실상 폭로

스토우는 30권 이상의 책을 썼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뿐이다. 이 책은 스토우 부인을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르게 했다. 1851년부터 약 1년간 주간신문에 연재되었던 이야기가 1852년 두 권의 책으로 발간되자 첫 주에만 만권이 팔렸다. 첫 해에 미국에서 30만 부가 팔리고 영국에서는 1년 만에 150만 부가 팔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스토우는 신시내티에 살 때 도망 노예를 고용하면서 노예들의 실상을 직접 들었다. 이웃 켄터키에서는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했다. 당시 신시내티는 노예제가 합법적이던 켄터키주와 오하이오강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여서 노예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초판본

 

스토우 부부는 그들이 고용한 도망 노예가 다시 잡혀갈 위험에 처하자 캐나다로 도망가게 했다. 1849년 18개월된 아들이 콜레라로 죽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팔려가는 흑인 노예들의 아픔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목사였다. 11명의 자녀 중 아들 7명도 모두 목사가 되었다. 맏딸은 여성 교육의 개척자였고, 막내딸은 여성 참정권 운동을 했다. 이러한 개혁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덕에 노예해방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소설을 썼다.

16~19세기, 무려 1200만 명의 노예가 배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왔다.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노예제도에 반대한 사람들이 많아서 민주주의 다수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소수의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스토우와 트웨인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스토우 부인은 잔인하고 비정한 노예제도의 실상을 소설로 폭로함으로써 미국인의 양심을 눈뜨게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이 하나님의 저작이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1862년 11월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당신이 이 엄청난 전쟁을 촉발시킨 책을 쓴 바로 그 조그마한 여인이로군요”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862년 백악관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스토우 부인을 접견하는 상황을 묘사한 조각작품. 하트퍼드의 리버사이드 공원에 있다.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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