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사

시인 김수영에게 4·19는 분기점이었다. 모더니즘으로 출발해 설움·비애 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표현하던 시(詩) 세계가 이때를 전후해 현실 참여쪽으로 완연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술만 마시면 자유당과 이승만을 욕했지만 아직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절과 미완이었지만 김수영에게 4·19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다. 분단 상황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수영 자신이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었고 그의 동생 가운데 한 명이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인 1969년, 강릉발 KAL기가 납북됐을 때도 사건초기에는 여동생의 남편이 주모자로 지목돼 가족이 고초를 겪어야 했다.

황혼 무렵이면 어김없이 발걸음이 명동의 전주집이나 은성 부근을 서성거렸지만 그는 언제나 원고료를 꼬박꼬박 집에 가져간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해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노랭이’였다. 한때는 양계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문단의 지인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던 중 갑자기 덮친 버스에 치였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오전 9시경 숨졌다.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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