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살펴본 청록파 세 시인(박두진·박목월·조지훈)의 시풍(詩風)과 삶

↑ 박목월·박두진·조지훈(왼쪽부터)

 

by 김지지

 

■‘청록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조지훈·박목월·박두신 세 시인의 시풍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아

1939년 초 시인 정지용이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위촉된다. ‘문장’은 그해 2월 1일 창간한 월간 문학지로 이태준을 소설, 이병기를 시조 추천위원으로 위촉해놓고 있었다. 정지용은 그해 4월 조지훈(1920~1968)의 ‘고풍의상’을 시작으로 6월에는 박두진(1916~1998)의 ‘향현’과 ‘묘지송’, 9월에는 박목월(1915~1978)의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이다’ 등 신예작가 3명의 시를 2~3개월 간격으로 추천했다. 훗날 ‘청록파’로 불릴 3인의 신예 시인은 이렇게 자신들의 문재를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정지용과 문장 창간호

 

그러나 청록파는 곧 시작된 일제의 조선어와 조선 문화 말살정책으로 몇 편의 시를 추가로 발표한 것 말고는 우리말로 된 시를 더 이상 발표하지 못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40년 8월, ‘문장’이 1941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어 발표 지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말 문학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끊어지는 암흑의 동면기로 접어들었다. 시인들은 골방에서 몰래 우리말로 시를 썼고 그 시들은 감춰졌다.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그 시절 부친의 모습이 생생하다며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제가 대여섯 살 때로 경주 황오리에 살고 있을 때였죠. 아버지께서 밤늦게까지 시를 쓰시고 새벽이 되면 시를 쓴 종이를 들고나가 마루 밑의 나뭇단 밑에 감춰놓고는 밖으로 나가시곤 했습니다. 밤에 들어오시면 다시 마루밑으로 들어가 지난밤에 시를 썼던 종이를 꺼내 가지고 다시 책상 위에서 시를 쓰셨습니다.”

박목월(오른쪽)과 아들 박동규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해방 후 이들 세 시인의 시에 주목한 것은 을유문화사의 조풍연 대표였다. 그의 눈에 세 시인의 시풍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아 보였다. 1946년 3월 당시 을유문화사에 근무하는 박두진이 경주의 박목월에게 “급히 상경해 달라”는 전보를 쳤다. 두 시인은 곧바로 조지훈의 집을 찾아가 공동시집 발간을 모색했다.

조지훈과 박목월은 구면이었다.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시를 주고받으며 정감을 나누던 사이였다. 1942년 조지훈이 경주의 박목월을 찾아갔을 때 박목월은 경주역에서 ‘조지훈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흔들며 맞았고, 두 사람은 경주 인근의 옥산서원에서 여러 날을 함께 묵으며 가슴을 텄다. 헤어진 후 조지훈이 경주의 감흥을 시로 쓴 ‘완화삼’을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붙여 편지로 보냈고 박목월은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이라는 부제가 붙은, 교과서에 실려 유명해진 ‘나그네’로 화답했다.

 

청록집(1946년, 을유문화사), ‘한국 서정시의 본향’, ‘순수 자연시의 발원’으로 평가받아

세 시인의 첫 만남이 있고 3개월이 지난 1946년 6월 6일 한 권의 시집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 서정시의 본향’, ‘순수 자연시의 발원’으로 평가받는 ‘청록집’이었다. 시집은 당시 유행하던 좌우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오직 바르게 문학을 하자는 시정신에 입각해 꾸며졌다.

청록집 표지

 

시집 제목 ‘청록집’은 박목월의 원고 중 하나인 ‘청노루’에서 땄다. 대표 저자로는 박두진의 이름을 올리고 작품은 박목월 편, 조지훈 편, 박두진 편의 순서로 배열했다. 작품 수는 박목월이 15편으로 가장 많았으며 조지훈과 박두진이 각각 12편을 실었다. 우리말을 말살하려던 일제 말기에 숨어서 쓴 이 청록집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암흑기의 시문학사는 명맥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청록집은 당시에는 흔치 않은 재판(1949)을 찍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청록집 출판기념회(1946.9.25)에 모인 박목월·조지훈·박두진(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과 동료 문인들

 

세 시인의 시풍을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시 세계 외적인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았다.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하고, 일제 말기의 암흑기와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현실에서 초연한 태도로 자연을 소재로 시를 썼으며, 자연을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아닌 대상 그 자체의 의미로 파악한 최초의 시인들이라는 점이 그랬다. 해방 후 세 시인 모두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것도 닮은 점이었다.

시풍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박목월은 향토적 서정을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노래하고, 조지훈은 전통문화를 소재로 민족 정서를 형상화했으며, 박두진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 조화라는 개성 있는 시풍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세 시인, 해방공간에서 과감하게 현실에 뛰어들어

그 후 청록집에는 “민족 말살 정책으로 모든 예술 활동이 억압받는 와중에 우리말 시를 고집하며 우리 고유의 심성을 담아낸 기념비적 시집”, “해방공간의 좌우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서정시의 본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순수 서정시”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 “행동하지 않고 침묵”했다고 비판한다.

남북 간 이념이 격심하게 대립하던 해방공간에서 세 시인은 과감하게 현실에 뛰어들었다. 해방 후의 문단은 친일 잔재의 냉엄한 현실보다도 양분된 이데올로기 청산이 과제였다. 세 시인은 ‘청록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던 1946년 4월에 결성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도 함께 이름을 올려 연대를 과시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해방 직후 좌익계 문인들이 발 빠르게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선 민족문학 진영의 전위 세력이었다. 소설가 김동리가 초대 회장으로 활약하고 청록파의 세 시인, 정지용, 서정주, 유치환, 최태응, 조연현 등도 회원으로 활동했다. ‘청록집’ 발간 후 세 시인의 문학적 재결합 시도는 없었다.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한 것이 주요 이유였다. 그래도 그들은 ‘영원한 청록파’로 기억되고 있다.

왼쪽부터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청록파 세 시인의 시풍과 삶

 

▲조지훈(趙芝薰), 전통문화를 소재로 민족 정서를 형상화해

조지훈(1920~1968)은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이나 ‘풀 내음 속에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훈(芝薰)’을 아호이자 필명으로 썼다. 그는 지사적 풍모를 지닌 민족시인이면서도 국문학, 민속학, 한국사 등 각 분야의 전통문학을 두루 섭렵한 국학 연구가였다. 일제강점기, 자유당 정부, 박정희의 독재정치 때마다 불의에 저항하는 지조의 삶을 살았으며 그 격랑 속에서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에게는 멋과 풍류, 기품이 서려 있었고 번뜩이는 재능과 막힘없는 교양, 추상같은 기개가 넘쳐흘렀다.

조지훈

 

그의 올곧은 선비 정신은 가계에서 비롯되었다. 의병장을 지내다 한일합방 때 자결한 증조부, 고향 주민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다 6·25 때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부,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납북은 그대로 그의 삶에 투영되었다. 조지훈은 시대적 변화와 요청에 따라 시세계를 바꾸면서도 선비 정신만은 일관되게 실천했다.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대표적 지성이자 한국 근대정신사의 거목

그는 10대 초부터 시인을 꿈꿨다. 1931년 마을 소년들의 문집 ‘꽃답’을 엮어내고 1935년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다. 1937년 상경해 문예잡지 ‘시원’사에 머물다 1939년 4월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했다. 1939년 4월 ‘고풍의상’, 11월 ‘승무’, 1940년 2월 ‘봉황수’가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당신의 시적 방황은 참담하구료”라고 평했다. ‘고풍의상’과 ‘승무’ 등은 한학적 교양과 불교적 가치관에 뛰어난 언어 기교를 보탠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1941년 3월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불교계의 거봉인 방한암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가 기획한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고 이후 월정사와 고향에서 지내며 꾸준히 시를 썼다.

조치훈 첫 시집 ‘풀잎단장’

 

해방 후에는 1946년 2월 경기여고 교사로 부임해 교가(김순애 작곡)를 작사했다. 1946년 9월 서울여의전 교수, 1947년 4월 동국대 강사를 거쳐 1948년 10월 고려대 교수로 부임해 고려대 교가(윤이상 작곡)를 작사하고 1952년 첫 시집 ‘풀잎단장’을 출판했다. ‘사상계’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자유당 독재를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4·19혁명 때는 한국교수협의회 시국선언문을 집필하는 등 개혁을 외치는 지식인·교수 그룹에 앞장섰으며 ‘혁명’, ‘잠언’ 등의 시를 발표했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대표적 지성이었고 한국 근대정신사의 거목이었다.

 

▲박목월(朴木月), 향토적 서정을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노래

박목월(1915~1978)은 경남 고성에서 났지만 경주에서 성장했다. 대구 계성중을 졸업하고 경주금융조합에 재직하던 1939년 9월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 전 18살 때 동시로 등단했다.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는 박목월 동시에 손대업이 곡을 붙여 탄생했다.

영종이라는 본명 대신 목월을 쓴 이유에 대해 “어느 날 밤 나무에 걸린 달이 너무 고와 목월(木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지용은 박목월을 ‘문장’에 추천하면서 “북쪽에는 소월, 남쪽에는 목월이 있다”며 극찬했다. 박목월은 대구 계성학교 교사(1945년)를 거쳐 이화여고 국어교사(1949년)로 활동하며 1954년 첫 개인 시집 ‘산도화’를 출간하고 1961년 한양대 교수로 부임했다.

박목월

 

박목월의 시에는 민요 가락의 향토색 짙은 서정, 소시민의 생활 속 소박함과 담담함, 토속적 시어에서 묻어나는 영혼이 느껴진다. 청록파 세 시인의 시 세계가 자연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박목월의 시에는 특히 전통적인 민요조의 세계가 제대로 살아 있다. 그래서 박목월에게는 “자연을 소재로 향토적 서정을 개성 있는 민요조에 담아내고 자연과의 교감을 맑은 운율로 노래한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향토적 서정을 개성 있는 민요조에 담아낸 노래한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박목월의 시가 현실을 외면했다며 “사회적 진공상태”라고 폄하하는 비판이 없지는 않지만 박목월이야 말로 일제 말기의 민족 말살정책 하에서도 시 창작을 통해 국어와 민족혼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해방 후 순수문학 쪽의 중심인물로 남쪽 문단의 대표적인 위치를 지켜온 시인이다. 박목월의 시는 해방 후 좌우 갈등을 겪으면서 자연시에서 인생시로 변모했다. 사회적으로는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굴곡진 역사, 가정적으로는 동생의 죽음 등이 영향을 미쳤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존재의 본질을 ‘무’라고 인식하고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한계성을 절감하며 주로 신앙시를 썼다.

박목월 첫 시집 ‘산도화’

 

박목월은 ‘저 푸른 물결 외치는/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로 시작하는 가곡 ‘떠나가는 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3년 휴전 무렵 유부남이던 박목월은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도를 찾아갔다. 어느 날 여인의 아버지가 제주도로 찾아와 여인을 데려가는 이별의 순간, 두 사람은 제주부두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처연히 돌아섰다.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을 본 제주도 시인이자 제주제일중 교사 양중해는 집으로 돌아와 두 정인의 부두에서의 이별을 시로 옮겼고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해 탄생한 것이 가곡 ‘떠나가는 배’다.

 

▲박두진(朴斗鎭),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 조화 추구

박두진(1916~1998)은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34년 서울로 올라왔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내면에서는 언젠가 반드시 공부를 하겠다는 열망이 꿈틀거렸다. 측량사무소, 경성부청, 금융조합 등을 전전하던 박두진이 교회 문을 두드린 것은 19살 때였다. 이후 신앙은 일제강점기의 절망과 열 살 때부터 고민하던 실존 등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었다. 문학에 눈을 뜬 것도 그 무렵이었다. 습작 초기에는 주로 민요조에 도취하고 민족의 애수를 노래했다. 그런 그에게 ‘문장’지의 출현은 충격이자 경이였다.

박두진

 

1939년 6월 ‘향현’과 ‘묘지송’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문장’에 실린 것을 포함해 1940년 1월까지 ‘낙엽송’, ‘의’, ‘들국화’ 등 모두 5편이 세 번에 걸쳐서 추천되었다. 박두진은 훗날 데뷔 때의 감정을 이렇게 밝혔다. “가슴이 벅차 메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고 기도밖에는 더 나를 누를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그러나 기쁨과 감동도 잠시뿐 ‘문장’은 1941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고 그의 시는 지면을 찾지 못했다. 박두진은 ‘문장’ 폐간 후 아무 곳에도 발표하지 못한 20편의 시를 쓰며 조용히 해방을 기다렸다. 1946년 ‘청록집’ 발간에 이어 1949년 5월 첫 시집 ‘해’를 출판했다. 박두진이 생전에 회고했듯이 “일제의 강압 검열 하에서 받는 온갖 제약을 타개하기 위한 시의 유일한 혈로는 정치나 사회 세계가 아닌 자연”이었다. 이런 박두진을 가리켜 정지용은 “삼림에서 풍기는 식물성을 가진 신자연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청록파 중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저항 정신을 표출한 시인

광복 후에는 투철한 현실 인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많이 발표했고 관심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아갔다. 1960년대 이후에는 주로 기독교적 이상과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들을 썼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테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주의 생명과 질서에까지 자신의 시 세계를 확장했다.

박두진 첫 시집 해

 

그는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는데도 1955년 연세대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역시 고비 때마다 사회문제에 발언해온 대쪽 같은 지식인이었다. 청록파 시인 중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저항 정신을 표출했다. 4·19혁명 때는 선두에 서서 중앙청까지 행진했고 5·16 쿠데타 때는 이를 공격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해 곤욕을 치렀다. 담시 ‘오적’ 재판 땐 법정에서 김지하를 옹호했으며 노년에는 “오늘 우리 문학의 병은 사상적 도피 현상과 비평 의식의 결여, 무내용한 언어유희와 말초”라고 질타했다. 1998년 9월 16일 마지막 그의 죽음으로 ‘청록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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