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살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는 일본 오사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2살, 3살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어 천애 고아가 되었다. 7살, 10살 때는 할머니와 누이까지 잃어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마저 백내장으로 눈이 멀어 가와바타는 종일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며 어둡고 우울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이후 무감각한 시선과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냉정함, 허무한 세계관으로 나타나 가와바타 문학을 관통했다.

가와바타는 1920년 도쿄제국대에 입학, 영문학과 일본 문학을 전공하면서 ‘신사조’(1921년), ‘문예춘추’(1923년), ‘문예시대’(1924년) 등의 동인지 창간에 참여하거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6년 사춘기의 청순한 열정을 서정적으로 그린, 반 자전적 소설 ‘이즈의 무희(伊豆의 踊子)’를 발표해 작가적 명성을 얻었고 같은 해 처녀 단편집 ‘감정 장식’을 출간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한동안 서양문학의 영향을 받아 각종 실험주의적 문학을 편력했으나 결국에는 일본의 세계로 돌아와 ‘일본적’이라면 모든 것을 찬미했다.

그의 소설 ‘설국’은 일본적인 것의 정점이자 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설국의 게이샤인 고마코,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드는 미소녀 요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설국’은 특히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유명하다.

 

소설 ‘설국’은 일본적인 것의 정점이자 대표작

 

가와바타는 ‘설국’을 문예춘추 1935년 1월 호에 연재하기 시작해 1947년까지 쓰다 쉬다를 반복하며 ‘문예춘추’ ‘개조’ 등의 5개 문예지에 분재하고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무려 13년에 걸쳐 완성했다. 책으로는 1937년 6월 ‘설국’이라는 제목의 초판본이 출간되었으며 1947년 12월 ‘속 설국’의 출판에 이어 1948년 결정판인 ‘설국’이 출간되었다.

‘설국’은 여러 개의 독립된 단편들을 묶어 하나의 소설로 이룬 연작 형식의 소설이다. 각 장이 독립된 연작 형식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완성된 소설이 되려면 각 장은 앞의 장에 거의 의존해야 하는데도 가와바타는 이와 무관한 방식으로 소설을 완성했다. 그는 줄거리에 의존하기보다는 각 장에 산재된 미적 감수성을 우선했다. 각 장은 장대로 독립성을 띠되 밑바닥에 깔린 모티브로 연결되어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적 작품으로 구축되었다. 그렇다 보니 원고지 500여 매 분량의 중편인데도 이렇다 할 만한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제는 모호하고 인물의 성격도 뚜렷하지 않다. 갈등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뭔가 부족한 듯한 데도 소설이 오랫동안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이유는 가와바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 때문이다. 전편에 걸쳐 펼쳐지는 자연의 정경 묘사는 거의 시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밤하늘의 은하수에 대한 묘사는 그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와바타는 한국 무용가 최승희의 열렬한 팬답게 1951년 최승희를 모델로 한 소설 ‘무희’를 발표했다.

1968년에는 일본인 최초이자 동양인으로는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번역본이 일본어 원문보다 낫다는 평까지 들은 미국 미시간대 일본 문학 교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이 컸다. 가와바타는 수상소감으로 선배 시인 료칸의 절명시를 인용했다. “내 삶의 기념으로서 / 무엇을 남길 건가 / 봄에 피는 꽃 / 산에 우는 뻐꾸기 / 가을은 단풍 잎새”. 이 황량한 수상 소감은 서양인들 마음에 ‘동양의 미학’이라는 짙은 여운을 각인시켜 가와바타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도 활동하면서 국제펜클럽대회를 유치(1957년) 하고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벨상을 수상할 때도 국제펜클럽 부회장이었다.

가와바타는 1972년 4월 16일 오후 6시 후지산이 바라보이는 요코하마 인근 즈시시(市)의 한 맨션에서 홀연히 가스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유서도 없었고 자살 동기도 뚜렷하지 않았다. 입에는 가스관을 물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쓰다만 원고지에는 ‘또’자가 쓰여있었다. 만년필은 뚜껑이 열린 채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문단은 ‘허무의 끝에 도전한 표현으로서의 자살’이라거나 ‘죽음으로 작품을 완결시켰다’는 말로 그의 자살을 정리했다.

그러나 사실을 중시하는 언론은 죽음의 원인을 다르게 보도했다. 가와바타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제자 미시마 유키오가 2년 전 할복자살하고, 1년 전 자민당 후보로 도쿄 지사에 나섰던 하다노 전 경시총감의 선거운동을 돕다가 문인의 정치개입이라는 비난을 받아 심리적인 고통을 겪고, 담낭염에 걸려 건강에 자신을 잃어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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