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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⑯-연재끝]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조토 디 본도네, 산타 클라라, 오르비에토, 페루자

↑  아시시 구시가지. 오른쪽은 수바시오산(424m)에 있는 로카 마조레 요새. 중앙 상단 건물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by 김지지

 

■아시시는 유럽 최고의 기독교 성지이자 순례지

여행 8일째이자 마지막날이다. 오늘의 일정은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의 아시시와 오브리에토다.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중세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는 위 두 곳과 시에나를 꼽는다. 중부의 움브리아주는 완만한 구릉, 어둑어둑한 산지, 구불구불한 길들이 모여 만든 평화로운 풍경이 특징이다.

먼저 향한 곳은 로마에서 북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아시시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주변 역시 옛 이탈리아 거장들의 풍경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그림 같은 자연의 연속이다. 아시시가 가까워지면 눈에 띄는 것이 야트막한 수바시오산(424m)이다. 산 정상에는 중세 시대 봉건 영주가 살았던 성이 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14세기에 세운 로카 마조레 요새가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아시시 전경과 가슴이 탁 트이는 움브리아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시시 구시가지는 그 산의 중턱 기슭에 중세 시대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들판의 아시시역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닿는다. 구시가지 입구에서 내려 아담한 성문을 지나 오르막길로 오르면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길이 이어지고 수백 년 흔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고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들을 걷다 보면 마치 영화 세트장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것 같다.

아시시 구시가지 건물들

 

아시시는 유럽 최고의 기독교 성지이자 순례지로 꼽히는 곳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고 눈을 감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시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총본산 답게 인구가 3만 명에 불과한데도 성당이 100여 개나 된다. 수도원, 예배당 등을 포함하면 도시 전체가 종교 건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영화 세트장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것 같아

아시시를 대표하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와 유품을 안치했다는 점에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된다. 성당은 1228년 착공해 1280년대 쯤 대부분 완성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은 1230년 지하 예배당에 안치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는 오늘날 세계 종교평화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행사가 1986년 10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개최한 ‘평화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이다. 행사에는 기독교 32개 종파와 유대교, 힌두교, 시크교, 불교, 이슬람, 아프리카 애니미즘, 조로아스터교 등 11개 비 기독교 종교의 지도자가 모였다. 1993년에는 보스니아 전쟁 종식을 위해, 2002년에는 미국의 9·11 테러 사태 이후 종교 간 증오를 종식하기 위해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순례자들이 이곳에 모여 기도하고 행진했다. 성당은 1997년 이곳에서 일어난 지진으로도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지진으로 원형천장이 무너지고 13세기 벽화들에 금이 가자 서양인들은 아시시 지진을 그해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와 가장 닮은 성자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2000년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다.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프란치스코 이름은 오늘날 서양 각국에서 달리 불리는 프랑시스, 프랜시스, 프랑수아, 프랑코, 프랑수아즈 등의 뿌리이기도 하다. 현재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에서 땄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외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흥청망청 보냈다. 20살이던 1202년 기사를 꿈꾸며 인근 페루자와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1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석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큰 병을 앓고도 1205년 또다시 자원입대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곳은 전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스폴레토라는 소도시였다. “프란치스코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기사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가고 있습니다.” “주인을 섬기는 일과 종을 섬기는 일 중 어느 것이 옳은 일이냐?” “주인을 섬기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주저 없이 돌아와 기도에 전념했다. 그가 또다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반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던 25살 때였다. “프란치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처음에는 벽돌로 쌓는 성당을 세우라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 암흑기 교회의 생명을 세우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는 예수를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했다.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안에 그려진 ‘성 프라치스코의 일대기’ 28편 그림 중 4번 벽화

 

빈자의 삶 살며 수도생활에 전념

프란치스코는 어느날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껴안고 입을 맞춘 것을 계기로 한동안 나병환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훗날 작성한 유언장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두었다. “그들한테서 느꼈던 쓰라림이 감미로움으로 변했다. 전에는 참기 어려웠던 일이 내 영혼과 육신의 단맛으로 변했다.” 프란치스코는 첫 각성 후 가난한 이들에게 집안의 귀한 물건을 나눠주었다.

참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을 주교에게 끌고 갔다. 일종의 재판에 넘긴 것이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주교와 군중 앞에서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버리고는 “내가 가진 돈과 앞으로 받을 유산, 그리고 옷가지를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드린다”고 말한 후 곧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수도 방식은 한마디로 ‘예수 따라하기’였다. 예수의 눈, 예수의 마음, 예수의 행동을 온전히 좇아가 체화하는 식이었다.

프란치스코는 26살이던 1208년 2월 24일 아시시의 허름한 포르치운쿨라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중 “너희는 주머니에 금도 은도 동도 지니지 말라. 여행 가방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 일꾼이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받아쓰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라는 마태복음(10장 9~10절)의 말씀을 들었다. 오늘날 포르치운쿨라 예배당은 16세기에 지어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에 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예배당. 왼쪽은 멀리서 오른쪽은 가까이서 본 모습이다.

 

프란치스코는 이후 예수의 이 말씀을 평생의 신조로 삼아 빈자의 삶을 살며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돈이나 귀중품을 넣은 허리띠를 두르고 다녔는데 프란치스코는 돈이 아니라 ‘가난’을 넣고 다녔다. 허리띠에는 세 개의 매듭이 있었다. 매듭은 청빈, 순결, 순명을 상징했다. 지금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와 수녀들은 청빈, 정결, 순명을 지향하며 이 허리띠를 맨다.

아시시에서 당시 복장을 한 수도사가 보여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반응하지 않고 뭐라고 하는데 알아듣지 못해 거절의 뜻으로 알고 포기했다. 그런데 걸어가다가 “알아서 기부하고 사진을 찍으라”는 뜻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라틴어로만 읽히는 성서에 반기 들어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작은 형제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들을 상대로 설교했다. 하지만 사제가 아닌 사람이 설교하는 것은 교회법 위반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수도자들을 데리고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직접 찾아가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교황은 회칙과 생활 방식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엄격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쓰러져가는 교회를 떠받치는 프란치스코의 꿈을 꾸고 난 후 수도회를 승인했다.

교황이 프란치스코의 수도회를 승인하는 장면. ‘일대기’ 28편 중 7번 벽화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209년 포르치운쿨라 예배당을 본부로 삼아 창설되었다. 이후 수도사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했다. 수도사들은 “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라”는 수도회 회칙에 따라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돌보는 데 열정을 불살랐다.

프란치스코는 성직자의 종교 독점 체제도 무너뜨렸다. 당시 라틴어는 귀족이나 교육받은 이들의 언어였다. 성직자들은 라틴어로 설교하고 성서는 라틴어로만 읽혔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없어 알지 못하는데도 라틴어로 설교를 듣고 라틴어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해야 했다. 당연히 설교나 기도문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훗날 독일에서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마틴 루터의 생각도 이런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루터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퍼뜨렸다. 루터보다 300년 앞선 시대에 살았던 프란치스코도 같은 생각을 했다. 프란치스코는 라틴어로만 읽히는 성서에 반기를 들었다.

 

1228년 성인의 반열에 오르고 1939년 이탈리아 수호성인으로 선포돼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지방의 방언으로 그 유명한 ‘평화의 기도’라는 찬미가를 지었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저로 하여금 사랑의 씨를 뿌리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무례함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로 시작하는 ‘평화의 기도’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한 번쯤은 귓가를 스쳤을 것이고, 마음 한쪽도 슬며시 적셨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해와 달은 물론 들판의 새나 짐승들과도 얘기를 나눴다. 눈을 감기 2년 전인 1224년 9월 14일 새벽에는 동굴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오상(五傷)이 몸에 나타났다. 오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 즉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으로 찔렀던 옆구리의 상처를 말한다.

새들과 대화하는 성 프란치스코. ‘일대기’ 28편 중 15번 벽화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앞둔 어느날 처형장이자 공동묘지였던 곳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공동묘지이자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에서 숨지고 묻힌 것처럼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저녁 숨을 거두었다. 당시의 전례적 기준에 따르면 일몰 후는 다음 날로 간주하기 때문에 10월 4일이 성 프란치스코 축일로 정해졌다.

성 프란치스코 유해를 안치하고 있는 곳. 성당 지하에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 뒤인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것은 그로부터 711년이 지난 1939년이었다. 유해는 인근의 성 조르조 성당에 묻혔다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1230년 5월 25일 이장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종파와 교파의 벽을 넘어서 존경받는 것은 그가 종교의 공동 목표이자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청빈’과 ‘형제애’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 후 제자들이 슬퍼하는 모습. ‘일대기’ 28편 중 20번 벽화

 

■화가 조토 디 본도네와 ‘성 프란치스코 일대기’ 벽화

프란치스코 성당 내부 벽에는 르네상스 초기 거장들인 치마부에, 조토, 로렌체티, 마르티니 등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들로 가득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실감나게 묘사한 28편의 ‘성 프란치스코 일대기’ 그림이다. 28편은 옷을 벗어 빈자에게 주는 장면,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쓰러져가는 교회를 일으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 교황에게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승인받는 장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 조토의 작품으로 알려진 ‘새에 설교하는 프란치스코’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 내부 벽화. 대표적 그림이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 28편이다.

 

28편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실제 인물과 건물, 옷차림과 풍습 등 당대인들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특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비잔틴과 고딕이라는 엄숙한 중세 양식에 익숙해 있던 당대 사람들의 눈에는 혁명적일 만큼 사실적이었다. 서양에서는 이 ‘성 프란치스코 일대기’를 기점으로 작가 중심의 미술사가 시작된다고 할 정도다.

사실 그 그림은 조토 혼자 그린 게 아니다. 조토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다른 성당의 벽화들 중에서도 조토가 직접 그렸다는 증거가 없는 것이 많다. 그런데도 조토가 그린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은 그만큼 조토가 르네상스 미술사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성당에는 치마부에가 그린 프란치스코 초상화도 있다. 프란치스코를 신비화하지 않으면서 영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는 중세 고딕 미술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때여서 회화 구성은 평면적이고 인간성의 표현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치마부에는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인물을 묘사함으로써 중세 미술에서 탈피해 새로운 미술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이를 안고 성좌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 주위에 4명의 천사와 가장 오른쪽에 성 프란치스코가 있다. 오른쪽 그림은 성 프란치스코를 확대한 것이다. 1278~1280년, 치마부에 그림

 

‘성 프란치스코 일대기’, 당대 사람들의 눈에 혁명적일 만큼 사실적

프란치스코 일대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사찰에 그려져 있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극적인 장면을 그린 ‘팔상도’가 떠오른다. 전생의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살다가 흰 코끼리를 타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모습을 담은 ‘도솔래의상’, 마야 부인이 친정으로 가던 도중 산기가 있어 룸비니 동산으로 가서 부처를 낳는 ‘비람강생상’, 사람들에게 법을 전한 후 제행무상과 용맹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 등이다.

석가모니 팔상도 그림 중 하나. 전생의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살다가 흰 코끼리를 타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모습을 담은 ‘도솔래의상’이다. 통도사 영상전 팔상탱화 중 하나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는 피렌체 근교에서 태어났다. 피렌체의 유명 화가 치마부에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 뒤 피렌체를 근거지 삼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것은 1306년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후였다.

조토 디 본도네 초상(1450년, 43×210㎝). 파울로 우첼로 그림

 

이 예배당은 파도바의 거부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집안의 예배를 위해 1303~1305년 지은 성당으로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다. 예배당이 있던 자리가 예전에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어서 아레나 예배당으로도 불린다. 예배당은 길이 13m, 폭 8.5m의 소규모 건물이다. 내부에는 높이 13m의 아치형 천장과 출입구와 창만 있는 단순한 구조다. 제단에는 조반니 피사노가 만든 대리석 석모자상이 놓여 있고 그 뒤에 엔리코 스크로베니 무덤이 있다.

조토는 스크로베니의 의뢰를 받아 30대 후반인 1305~1306년에 예배당의 모든 벽과 천장에 38개 장면의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스크로베니가 성당을 짓고 조토에게 그림을 주문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였다. 어찌나 지독했던지 단테가 ‘신곡’에서 스크로베니가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고 있다고 쓸 정도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예배당을 짓고 조토에게 그림을 요청했다.

 

미술사가들은 조토의 그림 ‘애도’를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으로 꼽아

조토는 예배당의 천장과 벽면에 자신이 그린 38개 장면의 프레스코화로 채웠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오늘날 서양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조토의 작품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조토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벽과 천장에 그린 38개 장면의 프레스코화

 

38개 장면은 마리아의 부모인 요하힘과 안나의 일생, 마리아의 일생, 예수의 어린 시절, 예수의 선교와 기적, 예수의 수난, 예수의 죽음과 부활 등의 그림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놓고 비통해하는 순간을 묘사한 ‘애도’(200×185㎝)이다. 미술사가들은 ‘애도’를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 그림으로 꼽는다. 예배당의 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 역시 조토의 정수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38개 장면 중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놓고 비통해하는 순간을 묘사한 ‘애도’(200×185㎝)이다.

 

이들 그림들은 현대인의 눈에는 고졸하고 담백해 보이지만 당대인들에게 그림 속 세계는 충격을 줄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그전 비잔틴 회화에서 무게감 없이 얄팍한 인체로 정면만을 향해 둥둥 떠있는 것 같았던 인물들이 확실한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벽 속의 인물들이 살아서 걸어나올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오늘날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해 관람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부 얻어

조토는 이후 20년간 유럽 곳곳을 다니며 교황과 고위 성직자, 왕과 귀족들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부를 얻었다. 말년에는 피렌체에서 제자들과 함께 부유층의 회당 장식을 주로 맡아 그렸다. 1334년 7월에는 피렌체의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종탑 건축에 착수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3년 뒤 사망했다.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도 조토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이 많다. 이 성당 안에 있는 19개의 작은 예배당 중 바르디 예배당에는 조토가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6개의 그림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성 프란치스코 죽음의 애도와 장례식’이다. 산타 크로체 성당 내 페루치 예배당에도 조토가 그린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고, 바론첼리 예배당에도 조토가 제작한 성모의 대관이 설치되어 있다.

조토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의 장례’.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내 바르디 예배당 소장

 

조토가 활동한 13세기말~14세기초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폭풍과 긴장의 시기였다. 성직자들이 신의 영광과 하늘왕국의 건설에만 열을 올려서 이탈리아 회화는 고딕과 비잔틴 양식을 중심으로 한 중세적 관습이 지배했다. 중세의 종교화 속에는 도식적 형상만 있었지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나 자연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풍경을 종교화에 도입한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했다. 인물 표정은 경직되고 무표정했다.

그러나 조토는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인체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분노 등 내적 감정도 그대로 표현했다. 이는 그전까지 사실의 기록을 위한 단순한 도구였던 회화가 그림 관람자에게 작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성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풍경과 건물 등 배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도 이전의 비잔틴 회화에서는 없던 조토의 혁신적인 화법이었다.

 

조토의 등장 후 작가의 생애와 작품이 미술사에서 큰 비중 차지해

조토가 그린 자연풍경은 중세의 평면적이고 도식적이던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원근법의 출발점이었다. 물론 완전한 르네상스적인 원근법이나 구도는 보이지 않았지만 적나라한 인간의 감정을 회화에 도입한 그의 그림들은 확실히 중세 것과는 달랐다. 그래서 오늘날 조토는 비잔틴 전통에서 탈피해 과학에 근거한 르네상스 미술이라는 새 장을 연 대표적 화가로 평가받는다.

조토 이전의 미술사는 보통 시대나 양식으로 분류한다. 고대, 중세, 고딕, 로마네스크와 같은 분류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토 이후에는 작가 개인의 생애와 작품이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 한 사람의 위력이 역사의 연구 방법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단테의 ‘신곡’이 최초로 인간성을 표현한 문학이었다면 조토의 회화는 최초의 자연주의 회화로 평가받는다.

조토의 명성은 살아있을 때는 물론 후대에도 대단했다. 단테는 ‘신곡’ 연옥편에서 “치마부에가 회화계에서 왕좌를 차지했다 했더니 이제는 조토가 명성을 얻었다. 때문에 전자의 그림자는 흐려져 버렸다”고 했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조토가 몇백 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미술을 되살려내고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을 사실적으로 모방했다”고 썼다.

그런데 오늘날 조토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많은 그림 중에서 조토가 그렸다는 증거가 없는 그림들도 많다. 이는 조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림들에 대한 당대 혹은 후대의 기록들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기록들 사이에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의 양식이 진위 판단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 부분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 논란이 진행 중인 작품이 많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

아시시 구시가지에서 평지로 내려오면 아시시역 부근에 또 하나의 거대한 성당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프란치스코가 1208년 마태복음의 말씀을 들었다는 포르치운쿨라 예배당이 이 대성당 안에 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대성당 밖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를 전해주는 조그만 정원이 있다. 신기하게도 정원에서 자라는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성당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젊었을 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여성에 대한 욕정이 일어났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이 근처에 있는 장미덩굴 위에서 자신의 몸을 굴렸다. 가시가 몸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웠을 거다. 그걸 통해 그는 욕정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계속 장미 가시 위에서 뒹굴자 하늘이 장미의 가시를 없앴다.” 대성당 안에는 프란치스코가 선종할 때 둘렀던 수도복 허리띠도 유리병 속에 담겨 있다.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하다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성 다미아노 성당 역시 아시시역 가까이 있다. 성 다미아노 성당은 의사로 활동하다가 4세기 초 순교한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쌍둥이 형제에게 봉헌된 곳으로 9세기 또는 10세기에 지어졌다. 형제는 아라비아에서 태어나 시리아에서 의학공부를 한 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치료했다.

하느님도 이 박애의 의사들을 사랑해 기도의 힘으로 중병이 완치되는 기적을 가끔 보여주었다.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백인에게 절단된 흑인의 다리를 접합해서 낫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303년 2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칙서를 내려 전국에 있는 그리스도교 성당을 불태울 것과 그리스도교를 믿지 말도록 지시했다. 형제는 그래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져 순교했다. 이후 그들의 전구(나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은혜를 구함)로 인한 치유의 기적이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두 성인은 더욱 더 공경을 받았다. 4세기 경에 이미 그들에 대한 공경은 동로마 제국 전역과 서방 세계에 전해졌다. 예루살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 두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들이 많이 세워졌다.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은 성인 프란치스코 생존 때 성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 다미아노 수도원 밖에는 눈 아래 펼쳐진 움브리아 평원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빠진 듯한 모습의 프란치스코 황동 좌상이 있다.

 

■산타 클라라 성녀, 귀족 신분 버리고 자신을 송두리째 그리스도께 바쳐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평생의 거처로 삼은 이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첫 여제자이자 귀족 신분을 버리고 자신을 송두리째 그리스도께 바친 산타 클라라 성녀(1194~1253)다. 아시시에서 이 성녀의 흔적을 만나려면 소박한 고딕 양식의 산타 키아라 성당을 찾아가야 한다. 구시가지에 있는 성당에는 클라라 성녀를 기리기 위해 유해와 머리카락, 수도복 등을 보존하고 있다. 궁금한 것은 언론이 성당을 칭할 때는 ‘산타 키아라 성당’이라고 하면서 성녀의 이름을 칭할 때는 키아라의 영어식 표현인 ‘산타 클라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클라라는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얻으리라”는 음성을 듣고서 성녀가 태어나자 딸에게 ‘빛’이라는 뜻의 ‘클라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클라라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온 것은 극도로 청빈하게 살며 복음을 전파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었다.

산타 클라라. 시몬 마티니(1284~1344) 그림. 성 프란치스코 성당 소장

 

생전에 많은 기적 보여줘

클라라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화려하고 값비싼 옷은 버리고 아름다운 얼굴은 거친 수도복으로 가렸다. 긴 머리채는 싹둑 잘라냈다. 18살이던 1212년에는 프란치스코의 첫 여제자가 된 후 집을 뛰쳐나와 다미아노 수도원을 거처로 삼았다. 성녀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부모가 성녀를 설득하려 수도원을 찾아갔지만 삭발하고 나타난 성녀를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2회로 불리는 ‘클라라회’를 창립하고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허름한 수도복을 입고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썼으며 맨발로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성녀는 생전에 많은 기적을 보여줬다. 사라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는 빛을 발하는 성체를 들어 올려 사라센 군인들을 쫓아냈다. 기도로 환자를 치유하고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를 배불리 먹였다. 클라라는 1253년 8월 11일 하느님께 돌아갔고 2년 후 시성되었다. 성녀를 기념하는 산타 키아라 성당은 1257~1265년에 세워졌다.

산타 키아라 성당

 

■오르비에토,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여 있어

오르비에토 역시 아시시에서 멀지 않은 움브리아주의 작은 도시다. ‘옛 도시’란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오르비에토는 고대 에트루리아 이래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탈리아는 전국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오르비에토는 보석으로 꼽힌다. 중세시대 이탈리아의 마을들이 외침을 피해 주로 산 정상에 형성되었듯이 오르비에토 역시 해발 195m 화산암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급자족의 봉건사회를 형성했다. 마을은 끝에서 끝까지 거리가 2㎞도 채 안된다.

오르비에토 전경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여 있고 중세시대 모습이 길과 골목에 그대로 보존되어 고풍스럽다. 건물과 도로가 수백년 전, 노새가 마차 끌던 시절 그대로여서 골목길은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꼬여있다. 화산암으로 이뤄진 땅속에 터널과 동굴로 이어진 미로를 갖고 있는데 에트루리아 시대 이래 식품 보관 등을 위해 집집마다 판 지하굴이 1200여 개에 달한다.

오르비에토 구시가지 마을로 가려면 기관사 없이 2분 만에 올라가는 푸니쿨라(산악기차)를 타야 한다. 언덕 위 정차장에서 오르비에토 두오모(대성당)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두오모는 이탈리아 고딕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당 전면을 장식하는 모자이크와 성당 안에 있는 성 브리지오 예배당의 프레스코화가 일품이다. 성당 내의 장대한 전면은 모자이크와 조각과 부조로 신·구약의 주요 인물과 장면들을 소상히 재현해 그대로 한 권의 성서다.

두오모의 파사드(정면)는 당대 명장 오르카냐와 피사노의 솜씨이고 성 브리지오 에배당의 프레스코화는 안젤리코가 시작해 시뇨렐리가 마무리했다. 건물 외관은 석회암과 현무암이 줄무늬 형태로 보이도록 디자인되어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전체적으로는 웅장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고졸해 마음이 편하다. 두오모는 1290년 착공 후 30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600년쯤 완공되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

 

‘볼세냐의 기적’ 기리기 위해 대성당 건립

건축을 하게 된 계기는 ‘볼세냐의 기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볼세냐의 기적’을 몸소 체험한 이는 13세기 보헤미아(체코)의 프라하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베드로 신부였다. 그는 문득 매일 먹고 마시는 성체성혈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성체성혈은 성스럽게 된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몸과 피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신부는 시험에 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다잡기 위해 1263~1264년 로마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로마에서 돌아오던 길에 오르비에토 인근에 있는 볼세냐의 산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또다시 시험에 들었다. “이 성체성혈이 정말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까?”하고 또다시 의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체(빵)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신부의 손가락을 적시고 제대와 성체포 위로 흘러내려 25개의 얼룩을 남겼다.

당황한 신부는 미사를 중단하고 그무렵 오르비에토에 머물고 있는 우르바노 4세(재위 1261~1264년) 교황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신부의 말을 들은 교황은 피를 흘린 그 성체와 피묻은 성체포를 오르비에토로 가져오도록 했다. 조사 결과 진실인 것으로 확인되자 곧 ‘볼세냐 성체의 기적’으로 선포되었다. 여전히 혈흔이 뚜렷한 이 피묻은 성체는 지금도 오르비에토 두오모에 모셔져 있다.

‘볼세나의 기적’ 오르비에토 대성당 내 기적의 성체포

 

오르비에토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교황 클레멘스 7세(1523~1534)가 한동안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교황은 1527년 로마 대약탈의 재앙을 맞아 로마의 산탄젤로 요새에 7개월 동안 갇혀있다가 이곳으로 이주해 몇 해를 지냈다. 로마 대약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독일의 용병을 주축으로 한 군대를 동원해 로마를 공격함으로서 일어난 교황령 역사상 최악의 수난이자 굴욕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시시와 오르비에토에서는 이탈리아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중국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종교가 없는 나라여서 그런 것 아닌가 추정해본다. 한국인도 드문드문 보여 다른 관광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슬로 푸드’ ‘슬로 시티’로 유명한 3000년 도시

오르비에토는 오늘날 ‘슬로 시티(Slow City)’로도 유명하다. 슬로 시티(이탈리아어로는 치타슬로) 운동의 뿌리는 ‘슬로 푸드’다. 이것은 1986년 미국의 맥도널드가 로마 한복판에까지 파고들자 이탈리아 북부 도시 브라가 중심이 되어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이탈리아 땅에서 난 재료로 만든 전통음식을 지키자고 시작한 운동이다. 오르비에토는 1989년 패스트푸드점 개설금지법을 공포하는 등 슬로 푸드에 적극 동참했다. 그때의 영향으로 지금도 이탈리아에는 패스트푸드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르비에토 골목길

 

슬로 푸드 철학이 삶과 문화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태동한 게 슬로 시티 운동이다. 1999년 10월 토스카나주 피렌체에 속한 그레베 인 키안티 코무네의 시장이 관광객 유치, 첨단화, 일상의 편리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답게 사는 마을이 되겠다’며 오르비에토, 브라, 포지타노 등의 도시와 함께 ‘슬로 시티’를 선언한 게 시작이다. 이들 도시들은 ‘공해 없는 자연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호하면서 느림과 여유를 찾아 삶의 질을 높이자’를 모토로 내걸고, 느림보의 대명사 달팽이를 캠페인의 로고로 정했다. 그러고는 국제슬로시티연맹을 창설해 본부를 오르비에토에 설치했다.

오르비에토는 구시가지로 향하는 차량 통행을 제한하는 것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두오모 성당 주변의 차량 통행을 전면 금지시키고, 외부 차량의 도심 진입을 막는 대신 외곽에 대형주차장을 조성했다.

그러나 오르비에토 슬로 시티에 대한 반발도 있다. 대거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방해를 받아 진짜 삶을 잃었으니 이게 관광도시이지 무슨 슬로 시티냐는 항변이다. 중심가에 슬금슬금 들어선 베네통 등 옷가게를 가리키며 “맥도널드만 아니면 되냐”고 반문하는 주민도 있다.

2017년 11월 기준, 국제슬로시티연맹에 가입된 도시는 세계 30개국 241개 도시다. 우리나라는 전남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등 모두 13개 도시가 가입해 있다.

 

■페루자, 움브리아주의 멋진 전원 도시

움브리아 지방에는 아시시와 오브리에토 말고도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에는 아름다운 소도시들이 여럿 산재해 있다. 움브리아주의 주도인 페루자도 그중 하나다. 페루자는 테베레강 상류의 해발고도 약 500m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마을은 아니지만 간단치 않은 과거를 누렸던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다. 기원전 8세기 고대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12동맹 도시 중 하나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가 기원전 310년 로마에 점령당했다. 라파엘로가 스승 페루지노에게서 그림을 배운 곳도 페루자다.

현재 페루자 시청사로 사용되는 프리오리 궁전에는 움브리아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갤러리인 움브리아 국립미술관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으로 불리는 노빌레 콜레조 델 캄비오 은행도 이곳에 있다. 기원전 3세기 경 에트루리아인이 만든 거대한 성문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페루자가 멋진 전원도시라는 사실을 내게 확인시켜준 것은 이탈리아에서 7박한 호텔 중 가장 멋진 ‘호텔 블루베이 콜레 델라 트리니타 페루자(BlueBay Colle Della Trinita Perugia)’였다. 산 중턱에 있는 호텔에서는 페루자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호텔에 숙박하기 전 페루자 시내에서 먹었던 식당의 인테리어와 식사의 질도 잊을 수 없다. 그동안 느꼈던 질 낮은 음식 갈증을 해소시켜주려는 듯 모든 게 멋지고 맛이 있었다.

호텔 뒤에서 내려다본 호텔과 페루자

 

페루자는 우리와 축구로 인연있는 곳

페루자는 축구선수 안정환 때문에 우리에게는 나름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안정환은 2000년 이탈리아 프로축구 1부 리그인 세리에A의 AC 페루자에 입단했다. 첫 시즌 선발 9경기를 포함해 전체 15경기에서 4골을 넣고 이듬해 시즌에는 15경기(선발 4) 1골을 기록했다. 이후 안정환은 2002년 1월 헤딩골을 마지막으로 AC 페루자를 떠나야 했다. 골을 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안정환이 한국과 이탈리아와의 16강전(6월 18일)에서 골든골(2대1)을 터뜨린 게 방출의 원인이었다. 경기 직후 AC 페루자의 구단주가 “배은망덕한 코리안(안정환)은 두 번 다시 이탈리아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을 한 뒤 안정환을 내쫓은 것이다.

그러자 주요 외신이 AC 페루자의 갑질을 비판했다. 구단주의 아들과 페루자의 감독은 한국과 안정환에 대해 사과와 해명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며 사태 진화에 나섰다. 구단주 아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골든 골 때문에 방출된 것이 아니다”라며 “사태의 발단은 이탈리아 언론의 과장보도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해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아버지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 한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현재 페루자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는 없고 2017년 세리에B(2부 리그) AC 페루자로 임대 이적한 북한 축구의 기대주 한광성이 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부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머지 않아 2부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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