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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⑨] 베네치아(1) : 역사, 산 마르코 성당, 두칼레 궁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화파

↑  산 마르코 종탑에서 내려다본 베네치아 운하와 시내

 

by 김지지

 

■베네치아 역사와 정치

 

베네치아의 지리를 개괄하면

베네치아는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배들이 교통수단의 전부인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물의 도시다. 이곳 출신의 유명인 중에는 ‘사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여성 유혹의 달인 조반니 카사노바 등이 있다. 베네치아는 118개 섬들이 378개 다리로 이어져 있고 약 3800m의 역S자 대운하(카날 그란데)를 비롯해 크고 작은 운하가 150여 개나 된다. 대운하는 육지로 치면 고속도로인 셈이다. 베네치아는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복잡하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본섬을 비롯해 주요 섬은 하루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려면 육지에서 3.85㎞ 길이의 리베르타 다리를 건너야 한다. 기차든 차량이든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는 유일한 육상 통로다. 기차로 다리를 건너면 도착하는 곳이 본섬 어귀에 있는 산타루치아 역이다.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면 본섬 북단 부근에 주차장이 있다.

본섬의 역이나 터미널에서 베네치아 여행의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를 타거나 좁은 운하의 다리와 골목길을 그냥 걷는 것이다. 수상버스는 대운하 양쪽 연안에 번갈아 접안하면서 대운하를 지나기 때문에 베네치아 건축의 역사적 변천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어려서 베네치아보다 영어식 베니스로 배운 탓인지 오랫동안 두 도시가 다른 곳으로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빈이 같은 도시라는 것도 성인이 되고서 알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리알토 본섬. 우측 하단이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 두칼레 궁전, 산 마르코 성당이고, 좌측 상단이 육지와 연결되는 리베르타 다리다.

 

베네치아의 시작은 5세기 훈족의 침입

베네치아 역사는 로마제국 말기인 5세기 이민족인 훈족의 침입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 북동쪽의 베네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훈족을 피해 어디로 달아날까를 고민하다가 석호(사주의 발달로 해안의 만이 바다로부터 떨어져 생긴 얕은 호수) 주변의 개펄지대로 몰려갔다. 육지 길이 막힌 그들에게 생존의 통로는 바닷길 뿐이어서 그들은 베네치아 만 안쪽에 형성된 늪지대에 수많은 백향목 말뚝을 촘촘히 박았다. 말뚝박기가 끝나면 바닷물에 강한 이스트라 반도에서 나는 석재를 몇 겹으로 쌓았고 돌과 돌 사이는 흙과 시멘트로 다져 인공섬을 만들고 마을을 형성했다.

그러던 중 6세기에 또 다른 이민족인 랑고바르드족이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훈족이 침입했을 때의 이주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침략을 피해 개펄지대로 몰려들었다. 점차 인구가 증가했으나 생존의 통로는 여전히 바닷길 뿐이어서 주민들은 인근의 다른 섬들로 옮겨가 터를 잡았다. 그 결과 오늘날 베네치아의 본섬인 리알토 섬을 중심으로 주변에 산재한 여러 섬에 취락이 형성되고 도시 기반이 갖춰졌다. 베네치아인들은 섬과 섬 사이의 수로를 정비하고 본섬인 리알토 섬을 관통하는 역S자형의 대운하를 도시의 핵심 통로로 만들었다.

697년에는 첫 주민투표를 실시해 국가원수 격인 ‘도제(Doge·통령)’를 선출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베네치아 남쪽의 라벤나에 거점을 두고 이탈리아를 지배한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속국이었지만 자치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던중 800년 프랑크족 왕 샤를마뉴가 로마교황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신성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임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토에는 당연히 이탈리아 전역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베네치아에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 지배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베네치아가 거절하고 자주방위에 나서자 신성로마제국이 베네치아를 포위했다. 하지만 늪지에서 발생한 역병의 창궐 등으로 신성로마제국은 베네치아 침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베네치아는 이때의 승리로 쟁취한 독립을 유지하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마뉴와 동쪽의 비잔티움 제국 황제 사이에 체결한 협정에 의해 독립을 추인받았다. 협정은 베네치아가 명목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임을 확인해주었다.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정해

베네치아가 비로소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 것은 828년이었다. 당시 베네치아 상인 몇명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성 마르코의 유해를 몰래 빼내 베네치아로 가져온 것이 정체성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위계 서열에서 가장 높은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한 명이자 복음서를 쓴 4명의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성 마르코의 유해를 가져오자 베네치아 시민들은 너나없이 기뻐하며 성 마르코를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정했다.

참고로 로마의 수호성인은 성 베드로이고, 피렌체는 세례자 성 요한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에는 네 가지 동물이 등장하는데 중세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복음서 저자인 4명의 성인을 상징하는 동물로 믿었다. 성 마태오는 탄생을 나타내는 인간, 성 루가는 희생을 나타내는 암소, 성 마르코는 부활을 의미하는 사자, 성 요한은 승천을 나타내는 독수리로 나타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이들 네 동물은 모두 날개가 달려있어서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를 상징하는 사자에도 날개가 달려 있다.

성 마르코 성당 꼭대기에 있는 성 마르코와 사자상 (출처 위키피디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개펄은 척박했다. 땅이 없으니 농사도 불가능했다. 식량과 연료 등 생필품은 물론 지반을 다지기 위한 목재·석재 등 모든 물품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했다. 결국 활로는 바다를 통한 교역이었다. 베네치아는 독립과 자유에 기반한 안전한 무역로 확보와 유지를 국가 전략으로 삼았다.

그런점에서 서기 1000년은 베네치아에 각별한 해였다. 인근 아드리아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아드리아 연안에 있는 달마티아에 첫 식민지를 개척해 해양국가로서의 첫걸음을 뗐기 때문이다. 이후 베네치아는 멀리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이탈리아 동부 해안과 동지중해에 상선 기항과 항로 안전을 위한 거점 확보와 유지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베네치아가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로 우뚝 선 것은 13세기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10만 명의 시민이 3300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3만 6000명에 달하는 선원 겸 수병을 유지했다. 지중해에 흩어진 거점을 중심으로 성립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외교관을 활용한 정보망을 구축했다. 상대국에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전통도 베네치아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지중해를 주름잡아 14~15세기에 해양제국으로 우뚝 섰다.

국내적으로는 철저한 공화제로 개인숭배나 파당 형성의 소지를 없앴다. 11세기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이 출범할 때는 모두 공화제였으나 14세기 경에 이르러 대부분 군주제에 굴복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1500년을 고비로 이탈리아 전역에 외세의 영향이 일반화될 즈음 진정한 독립세력이자 공화체제로 남아 있은 도시국가는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천년 동안 자유로웠던 독립 공화국

당시 이탈리아 도처에 편재한 것들 중에 베네치아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첫째 교황이 영향력을 행사한 흔적이 거의 없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로마 교황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교황령)를 지배하는 세속군주이면서 서유럽 기독교 세계 수장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다. 각국의 군주·영주를 승인하고 대관식을 주관하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종교적 명분은 최대한 활용하면서 종교적 개입은 최소화하는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했다.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정하고 성 마르코 유해를 안치한 대성당을 지어 종교적 위상을 과시하긴 했으나 대성당은 교황이 파견한 주교 관할이 아니라 국가원수 개인 예배당으로 시민이 운영했다. 국가원수 대관식도 교황 대리인이 아니라 시민 대표가 주관했다. 이처럼 베네치아는 교황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아 역대 교황들과 늘 긴장 관계였다. 이 때문에 몇 차례나 도시 전체가 파문되기도 했다. 베네치아에서 우선은 시민이고 기독교는 그 다음이었다.

주민이 뽑은 지도자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봉건 영토도 없고, 로마 교황과 관계도 없고, 세습도 하지 못한 이 지도자를 가리켜 ‘도제(Doge)’라 했다. 반면 피렌체, 밀라노 등의 공국은 공작 혹은 대공이라 불리는 영주가 통치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교황의 승인으로 집권하고 권력은 세습되었다. 베네치아는 종신직 국가원수를 697년부터 1797년까지 선출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도제의 독재를 막기 위해 귀족만이 정치에 참여하는 과두정을 도입, 견제와 균형을 유지했다. 프랑스나 스페인 왕은 물론 중세 이래 이탈리아 전역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닌 역대 신성로마황제의 그림자도 베네치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베네치아는 천년의 역사 동안 그 어떤 외세로부터도 자유로운 독립 공화국이었다.

베네치아에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없고 봉건 영주가 지배했던 적도 없다. 시기적으로 서로마 멸망 후 세워진 도시인데다 농토와 영지가 없어 봉건제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거주 지역을 가리키는 ‘게토’라는 용어도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처음 쓰인 뒤 보편화되었다.

현재 베네치아가 안고 있는 최대 숙제는 지면이 주변보다 낮아지는 침강 현상이다. 이유는 두 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근접한 아드리아해의 수면이 지각 변동으로 인해 서서히 상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석조건물들이 나무 말뚝과 진흙 위에 지은 것이어서 지반이 내려앉기 때문이다. 현재 베네치아는 물론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에서도 다각도로 대책을 마련 중이다.

 

■베네치아 이모저모

 

▲산 마르코 광장

관광버스가 육지와 베네치아 본섬을 잇는 리베르타 다리를 지나 우리 일행을 내려놓은 곳은 본섬 북단에 조성한 버스 주차장이었다. 우리는 부근의 여객선 터미널에서 바포레토라 불리는 단체유람선(수상버스)을 타고 역S자형 대운하(카날 그란데)의 출구 격인 본섬의 산 마르코 광장 여객선 터미널에 내렸다. 베네치아의 심장부 답게 광장에는 인파가 가득하고 비둘기가 떼지어 있었다.

산 마르코 광장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비둘기가 많은 산 마르코 성당 앞 너른 광장을 통칭 ‘피아차’라고 하고, 대운하에 면한 쪽 두칼레 궁전(통령궁) 앞에 갈매기가 날아드는 곳을 ‘작은 광장’이라는 뜻의 ‘피아체타’라고 한다.

산 마르코 너른 광장(피아차)

 

너른 광장 주변에는 산 마르코 성당, 두칼레 궁전, 종탑이 있다. 광장 입구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꼭대기에는 산 테오도레 상과 산 마르코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있다. 로마 제국 말기의 군인 순교자인 산 테오도레는 베네치아의 첫 수호성인이었고,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르코는 9세기부터 지금까지의 수호성인이다. 마가는 예수의 12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선교 도중 순교해서 거기 묻혔다가 베네치아 상인이 유골을 몰래 베네치아로 빼와 지금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있다.

산 마르코 광장의 랜드마크인 종탑에는 가슴아픈 과거가 있다. 지반이 갑작스럽게 침하해 1902년 7월 14일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무너진 벽돌들을 하나하나 다시 쌓아 10년 만에 종탑을 복원하고 1912년 4월 25일 성 마가 축일에 완공식을 거행했다. 복원하면서 엘리베이터도 설치했다.

두칼레 궁전
▲수상택시와 곤돌라

베네치아에는 7~8명 정도가 정원인 수상택시도 있다. 수상택시는 단지 사람만 옮겨주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대운하를 오가며 좌우 양쪽의 멋진 베네치아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수상택시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운하 양쪽의 건물들을 바라보니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멋진 풍경들이 펼쳐졌다. 눈과 마음과 머리가 맑아지고 시원해졌다.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명물이자 대표적 관광상품이다. 과거에는 시내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모터보트의 보급으로 관관상품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흔들리다’는 뜻의 곤돌라는 배의 앞뒤가 검은 색이고 선수와 선미는 휘어져 올라간 모습이다. 바닥에 붉은 융단을 깔아서 더 고급스럽게 보인다. 곤돌라에 올라타는 순간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선미에서는 마린룩(줄무늬 티셔츠)을 입은 키 크고 까무잡잡한 40대 가량의 사공이 노를 젓는데 어쩌면 그리도 잘생기고 표정이 온화한지 말로만 듣던 이탈리아 남자의 모습이었다.

곤돌라가 가는 곳은 멋진 장소라기 보다는 현지인들의 생활 거주지나 작은 상점이 있는 뒷골목의 수로였다. 수로의 물이 사실상 멈춰 있어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의외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수상버스 성격의 바포레토

 

▲산 마르코 성당

산 마르코 성당의 외관은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의 교회들과 다르다. 5개의 지붕(돔)이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풍이기 때문이다. 꼭대기에 산 마르코가 있고 성당의 정면 중앙 윗부분에 날개달린 황금사자상이 있다. 산 마르코를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4대 복음 저자 중에서 마르코는 사자, 마태오는 천사, 요한은 독수리, 루카는 황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날개 달린 사자상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이어서 베네치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니스영화제가 주는 최고상과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인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주는 가장 큰 상도 황금사자상이다.

산 마르코 성당

 

산 마르코 성당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줄이 길어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골목길을 보기 위해 성당 정문 왼쪽으로 돌아갔는데 성당 옆문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슨 줄인가 싶어 살펴보니 일요일의 성당 미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라도 미사를 드리는 성당 안을 볼 수 있다는 반가움에 옆문으로 들어가 미사를 참관했다.

이탈리아는 어딜가도 성당 일색이지만 성당마다 고유의 색깔을 띠고 있어 늘 새로웠다. 성당 안은 미사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눈으로는 온통 황금색인 천장의 돔, 거대한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아치, 찬란한 모자이크들을 두리번 거리며 감상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성당 외관 일부도 장식한 이 비잔틴 모자이크는 400~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아트리움이라 불리는 공간을 통과해야 하는데 ‘천지창조’를 소재로 한 천장(돔)의 모자이크(1320년경) 역시 유명하다. 성당 내부의 천장 역시 12~13세기에 제작된 황금빛 모자이크 그림으로 가득 덮여 있다. 산 마르코 성당은 아이보리색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는 다른 성당과 달리 주로 검은 계통의 대리석을 사용하고 바닥에만 밝은 대리석을 사용한 것이 이색적이었다. 검은 대리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옥돌처럼 절단할 때 생긴 자연적인 문양이 아름답고 독특하다. 이 검은 대리석 덕분에 성당 내 분위기가 차분해져 성당의 위엄을 지켜주는 듯 했다.

성 마르코 성당 안. 일요일이라 미사를 보고 있다

 

팔라 도로와 네 마리 청동마상,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년) 때 가져와

성당에서 꼭 챙겨 보면 좋은 것이 있는데 중앙 제단의 팔라 도로(황금 가리개)와 성당 입구 위에 놓여있는 네 마리 청동마상이다. 팔라 도로를 장식한 현란한 보석들은 대부분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 때 가져온 것이다. 청동마상의 원작은 부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성당의 조각은 복제품이다.

성당 안 중앙제단에 있는 ‘팔라 도로’

 

미사기 시작되기 전 성당 밖으로 나오면서 베네치아 배경의 머그컵을 샀다. 살 때는 그저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집에 와 살펴보니 세련과 멋과는 거리가 먼 그렇고 그런 머그컵이었다. 그래도 머그컵으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산 마르코 성당이 떠오르니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산 마르코 성당은 828년 베네치아의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되어있는 산 마르코의 유골을 베네치아로 훔쳐와 테오도로 성인을 봉헌하기 위해 지어진 성당 안에 납골당을 만든 것이 시작이다. 이후 베네치아 도제(통령)가 산 마르코를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고 산 마르코의 유골을 안장하기 위해 11세기 말에 성당을 새롭게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 마르코 성당이 재건된 후에는 동방을 침략할 때마다 각종 물건과 조상, 부조 등을 가져와 성당을 장식함으로써 건축양식이 비잔틴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교회의 십자가가 라틴 십자가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해 비잔틴 양식의 성당은 그리스 십자가형으로 불리는 정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산 마르코 성당 역시 그리스 십자가 형이다. 산 마르코 성당은 베네치아의 중심 교회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통령의 개인 경당 지위에 머물렀다. 베네치아 공화국에 미칠 교황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베네치아 도제(통령)가 성 마르코의 유해를 도제 건물로 가져가려 하자 성인의 유해가 꿈쩍하지 않는 것을 묘사한 모자이크 그림. 성 마르코 성당 입구 위에 있다.

 

▲카페 플로리안과 뒷골목

산 마르코 광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하나 있다. 1720년 12월 개업한 뒤 300년 간 베네치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카페 플로리안’이다. 카페로는 이탈리아 최초다. 이곳을 찾은 유명 인물들은 괴테, 바이런, 카사노바, 프루스트, 디킨스, 릴케, 하이네, 니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내부는 중세 골동품 가게를 보는 듯 고풍스럽다. 실내는 물론 아케이드 복도와 광장에까지 테이블이 있어 규모가 매우 크다. 이탈리아 카페는 우리와 다른 점이 있는데 서서 커피를 마시면 1유로 남짓이지만 일단 자리에 앉으면 값이 2배 혹은 그 이상으로 올라간다.

광장의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마치 중세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가이드는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길을 잃을지 모른다며 들어가지 말라고 했으나 우리는 안다. 행여라도 길을 잃는 사람이 나오면 가이드가 뒷처리하는 데 골치아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골목은 작은 호텔과 음식점과 상점의 연속이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가더라도 상점도 없고 행인도 없어 더 들어갈 필요는 없어보였다.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도 있다.

골목을 거닐다보면 수로(운하)가 보이고 수로와 수로를 연결하는 계단으로 된 다리가 곳곳에 놓여있다. 골목과 수로들 때문에 길을 잃기 쉽다고 하지만 곳곳에 산 마르코 광장이나 리알토 다리 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있어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카페 플로리안

 

▲리알토 다리

대운하에는 4개의 다리가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리베르타 다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위치를 기준하면 아카데미아 다리, 리알토 다리, 스칼치 다리 순서다. 그리고 리베르타 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2008년에 세워진 코스티투치오네 다리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역S자 대운하의 중간에 위치한 리알토 다리다. 아치 모양의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가장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리알토 다리가 세워지기 전부터 주변은 상권의 중심가였다. 상품들이 넘쳐나고 대운하를 건너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다리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2세기 말~13세기 중반 무렵 부교와 나무다리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대리석 다리를 만들기로 의견이 모아져 당대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오 디 폰테가 1588년 착공하고 1591년 완성했다. 베네치아가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시기에 주력 선박인 대형 갤리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높게 만들었다. 두 번째 오래된 다리는 1854년 건립된 아카데미아 다리다.

리알토 다리

 

▲두칼레 궁전

두칼레 궁전(팔라초 두칼레)은 베네치아의 최고통치자인 도제의 관저 겸 집무실이자 대평의회, 원로원, 재판소 등 주요 정부기구들의 업무 장소였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 정부종합청사, 국회, 검찰청을 한 곳에 모아둔 곳이다. ‘두카’는 이탈리아어로 공작, 통령, 군주 등을 의미하고 ‘두칼레’는 그 형용사다

두칼레 궁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9세기 초였다. 하지만 몇 차례의 화재로 지금 남아있는 것은 1424년 완공한 건물이다. 궁전 외벽은 흰색과 분홍색 대리석에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하고 둥근 아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동방의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지상층과 2층은 하얀 석재로 장식하고 3, 4층은 붉은 빛 도는 베로나산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두칼레 궁전처럼 고딕 양식에 비잔틴과 르네상스 양식을 융합해 탄생한 독특한 양식을 ‘베네치안 고딕’이라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방이 대평의회실이다. 한꺼번에 1500~2000명의 의원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던 곳으로 너비 54m, 폭 25m, 높이 15m의 거대한 공간이다. 내부는 온갖 그림들의 전시장이다. 세계 최대 유화 작품인 틴토레토의 대작 ‘천국’(22.6×9.1m)이 회의실 한 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벽면 상단에 벽을 따라 돌아가며 76명의 역대 도제(총독)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는 물론 천장에도 그림이 있다. 이곳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화가들을 ‘베네치아 화파’라고 하는데 ‘피렌체 화파’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양대 산맥이다. 베네치아 화파 그림은 색채가 풍부하고 생생하다는 게 특징이다.

두칼레 궁전에는 재판소도 있었는데 이곳과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가 작은 운하 위에 설치되어 있다. 죄수들이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쉰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탄식의 다리’다. 감옥은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카사노바는 유일하게 이 감옥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후 나중에 생생한 모험담을 책으로 출판했다.

두칼레 궁전의 재판소와 감옥을 연결했던 ‘탄식의 다리’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산 마르코 광장에서 수상택시를 타고 대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운하 왼쪽에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 보인다.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죽은 후 페기가 살았던 저택을 용도 변경해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미술관이라기보다는 아담한 저택 같은 분위기에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크지는 않지만 현대 거장들의 작품이 빼곡하다.

구겐하임은 1912년 타이태닉호의 침몰로 죽은 유대인 부호 벤저민 구겐하임의 딸로 막대한 부를 물려받았다. 23살 때 프랑스 파리로 가서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등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현대미술에 눈을 떴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화가이자 조각가인 막스 에른스트 등과의 애정 편력으로 자주 구설에 올랐다. 1938년 영국 런던에 구겐하임 죈느라는 상업화랑을 연 것을 계기로 작품 컬렉션에 본격 나서고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명성을 떨쳤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비행기 티켓까지 구해주면서 여러 예술가들의 미국행을 주선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그녀 자신도 유대인이어서 유럽에 머무를 수 없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가 1941년 에른스트와 결혼하고 1942년 뉴욕에서 ‘금세기 예술 갤러리’를 열었다. 뉴욕이 파리를 제치고 미술 중심지로 떠오른 데는 이 갤러리의 역할이 컸다. ‘금세기 예술 갤러리’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면서 지나간 시대와 다가오는 시대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페기는 1946년 에른스트와 이혼하고 1947년 갤러리 문을 닫았다. 1948년에는 뉴욕을 떠나 베네치아로 가 자신의 컬렉션으로 전시회를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9년, 베네치아 대운하 옆에 건축된 18세기 집을 구입해 거주했다.

페기는 벽이 전부 담쟁이로 덮인 나지막한 대리석 건물에 자신의 소장품을 그러모았고 여러 예술가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베네치아에 정착한 지 30여년 만인 1979년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았고 유해는 화장되어 정원에 묻혔다. 그의 사망 후 소장품들은 대부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되었고 베네치아 저택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니스 분관으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공식명칭을 얻어 운영되고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화파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조금 지나면 왼쪽에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보인다. 이 미술관은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몰락의 산물이다. 1805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프랑스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 ‘이탈리아 왕국’으로 편입되어 주요 관공서와 종교기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문을 닫자 이탈리아 정부가 건물을 장식했던 미술품들을 미술학교 ‘아카데미아’로 보낸 것이 미술관의 시작이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그러다가 성당이나 수도원이던 현재의 미술관 자리로 아카데미아를 옮기고 이웃 건물들과 합치고 운하에 새 다리를 설치하는 등 수년간의 작업 끝에 1810년 미술학교 겸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원래는 수 천점을 소장했으나 베네치아 경제가 쇠퇴하면서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많은 그림이 팔려나가 지금은 중·근세에 걸쳐 약 8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베네치아 화파’로 분류되는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대표적인 그림은 조르조네(1477~1510)의 ‘폭풍우’, 틴토레토(1519~1594)의 대형 유화 ‘성 마가의 기적’, 티치아노가 죽기 직전까지 그린 최후의 대작 ‘피에타’ 등이다.

도발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파올로 베로네세의 ‘레위 가의 향연’(1280×555㎝, 1573년)도 이곳에 있다. 원래 제목이 ‘최후의 향연’인 그림에는 코피 흘리는 하인, 난쟁이, 개 등이 등장한다. 그러자 성서에 없는 내용을 그렸다며 비난이 쏟아져 작품을 완성한 지 3개월만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제목을 ‘레위 가의 향연’으로 바꾸고 적절한 수정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아 제목만 수정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안에 있는 파올로 베로네세의그림 ‘레위 가의 향연’(1280×555㎝)

 

베네치아 회화는 전성기였던 15~16세기부터 200여 년 간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화파로 인정받고 있다. 이 화파는 찬란한 빛과 강렬한 색채를 이용해 화려하고 역동적인 그림을 선보이며 독자적인 화파를 형성했다. 이 화파를 탄생케 한 베네치아의 빛은 하늘에서 직접 내리쬐는 햇빛만이 아니고 시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운하의 수면에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빛, 집앞 계단까지 찰랑거리는 바다 물결에서 반사되는 빛 등 다양했다.

 

베네치아 화가들, 풍부한 색채와 명암의 대조로 아름다움 추구

당대 이탈리아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파는 피렌체 화파였다. 피렌체 화가들은 치밀한 구도와 윤곽선을 중시해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을 회화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다. 정교한 기하학과 이성을 사용해 정확하고 사실적인 재현을 추구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들에게 색채는 그 다음 요소였다.

반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와 명암의 대조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항상 축제와 바다에 반사된 빛을 접해온 터라 관능과 감각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빛과 색채가 자아내는 느낌과 감성적 분위기가 이들에게는 회화의 원리였다. 이들은 많지 않은 색을 사용하면서도 느슨하고 가벼운 붓 터치, 색채 구사, 명암의 대조미를 추구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기하학과 이성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감각과 관능이 넘치고 색채가 가득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베네치아에서는 비잔티움과 인접한 상업 항구도시라는 특수한 지리적·문화적 환경 때문에 이탈리아의 비잔틴 양식인 ‘마니에라 그레카’ 전통도 오래 지속되었다.

중후하고 화려한 색채의 베네치아 양식을 확립한 것은 15세기 벨리니 일가였다. 아버지 아코포 벨리니는 소형 풍경화와 중앙 원근법을 실험하고 아들 조반니와 젠틸레는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를 즐겨 표현했다. 조반니(1430~1516)는 베네치아에서 유화물감을 사용한 초창기 화가였으며 젠틸레는 베네치아의 전통을 지키면서 기념비적인 크기의 그림에 베네치아의 풍광을 담아냈다.

그 뒤를 이은 대표적인 화가로는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첼리오 티치아노(1488~1576), 풍경화를 회화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자리잡게 한 ‘폭풍우’ 그림의 화가 조르조네(1477~1510), 베네치아 화파의 르네상스를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틴토레토(1519~159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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