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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①]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

by 김지지

 

■나폴리·폼페이·소렌토로 가는길

 

오늘의 여행지는 지중해 문화의 진수를 대표하는 남부의 고대도시 나폴리·폼페이·소렌토다. 지척에 세계적인 휴양지 카프리섬이 있으니 그곳도 빼놓을 수는 없다. 이곳은 모두 캄파니아 주에 속한다. 온화한 기후, 빼어난 풍광, 비옥한 토양 덕분에 예로부터 ‘복받은 캄파니아’라며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나폴리·폼페이·소렌토를 약칭한 나폼소는 자동차로 로마에서 3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오늘의 일정은 폼페이를 먼저 둘러본 후 그곳에서 열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소렌토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카프리섬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을 관광한 후 다시 여객선을 타고 나폴리로 북상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이 코스를 따른다는 것이지 역으로 나폴리→카프리섬→소렌토→폼페이 코스도 자주 이용하는 순서다.

우리 일행을 태운 폼페이행 버스는 로마에서 A1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한다. ‘태양의 도로’로 불리는 A1 고속도로는 북부 중심지 밀라노와 남부 중심지 나폴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다. 볼로냐, 피렌체, 로마를 경유한다. 1935년 무솔리니의 주도로 건설되었고 제한 속도는 100㎞다. 우리 고속도로보다는 비교적 한산했다. 여행 일정 내내 경험하게 될 이탈리아의 다른 고속도로 역시 여유로웠다. 주변 풍광은 탁 트여 시각적으로 시원했다.

주행시간이 3시간이나 되니 가이드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가이드에게 침묵은 직무유기일 것이다. 여행자들에게 가이드의 설명은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게 해주는 파이프라인일 터이다. 그래서 세계 어디를 가도 가이드의 약장수식 설명은 빠지지 않는다. 여행자 대부분이 가이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 나라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 가이드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다.

40대 가이드는 첫 마디를 당부로 시작했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초면의 여행자들끼리 직업과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라는 것이다. 매우 적절한 당부였다. 가이드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중세 때 흑사병을 겪은 후 상점 주인과 손님이 손을 닿는 것을 가급적 꺼려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많은 상점 주인이 물건값을 직접 손으로 받지 않고 손가락으로 판매대 위를 가리키며 그곳에 돈을 내려놓으라고 신호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경험해보니 가이드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상점 주인은 거스름돈도 같은 장소에 놓는다.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 지도

 

로마를 출발해 폼페이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우리로 치면 인천에서 전북 군산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니 서해안 고속도로 남쪽 구간에 해당한다. 고속도로 주변의 자연은 우리와 비슷했다. 다만 며칠 후 보게될 북부 평원 지역 말고 중부와 남부에서는 경작지가 별로 보이지 않고 목초지가 대부분인 게 신기했다. 우리처럼 반도국가에 산악 지역이 많은데도 흙은 보이지 않고 초록의 풀밭 일색인 게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목초지 대부분이 휴경지여서 목초지마다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스위스와는 대조적이었다.

4월의 기후도 우리와 비슷해 이즈음 우리의 자연이 그러하듯 연초록이 자태를 뽐냈다. 우리 산하에서 해마다 4월이면 향연을 벌이는 연초록은 매년 봄 내게 흥분과 기대를 선물하는 엔도르핀이다. 이런 연초록을 이탈리아 여행 내내 만났으니 생각지 않은 큰 즐거움이었다.

 

 

■폼페이, 하루만에 지구상에서 사라지다

 

폼페이는 로마에서 남쪽으로 약 270㎞ 떨어진 해안가 도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수비오산(1281m)의 화산 폭발로 땅속에 묻혀 있다가 폼페이를 가로지르는 운하건설 공사 중 발견되어 1500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베수비오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이름 높았던 폼페이의 참극은 약 1940년 전인 79년 8월 2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갑자기 베수비오 화산이 분화하더니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이 인근의 폼페이를 덮쳤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려 쌓인 흙과 돌은 높이가 4~7m나 되었다. 피난을 하지 못한 생명체는 그대로 파묻혔고 폼페이는 하루 만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당시 폼페이에는 2만 명 이상이 살았는데 화산 폭발로 2,000여 명이 고온 가스에 질식되거나 열에 타서 죽었다.

사라진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1513년만인 1592년이었다. 폼페이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 잔해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제대로 발굴할 수 없어 150여 년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1748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왕조가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다름 없었다. 다량의 미술품을 프랑스로 실어갔기 때문이다.

폼페이의 민낯이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86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하면서였다. 발굴해 보니,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덕분에 고대 로마 시대의 생활상이 파악되었다.

폼페이 모습. 멀리 베수비오산이 보인다.
화산 폭발을 타락한 폼페이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어

3.2㎞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신전, 광장, 포장도로, 공중목욕탕을 비롯해 각종 주택이 자리잡고 있었다. 체육관과 극장은 물론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원형 경기장도 발굴되었다. 고지대였던 탓에 빗물을 받아서 각 가정으로 보내는 수도관 시설의 흔적도 드러났다. 도로 양옆의 인도는 마차가 다녔을 법한 가운데 도로보다 높게 만들어 시민들이 배설물과 악취나는 음식 등이 뒤섞인 도로를 밟지 않고도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도로 곳곳에 야광석을 박아놓아 달빛에 돌이 반사되어 밤에도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빵가게의 화덕과 술집 테이블 위의 술잔들은 화산 폭발이 갑자기 일어났음을 알려주었다.

발굴 초기, 발굴단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여기저기 보이는 뻥뻥 뚫린 공간이었다. 발굴단이 그 공간에 반죽한 석고를 부은 뒤 흙을 걷어내자 원형물체의 모습이 복원된 인체 캐스트가 만들어졌다. 화산 폭발 후 용암과 화산재에 파묻힌 사람이 숯처럼 타버려 공간만 남은 것이다. 어린아이를 꼭 껴안은 채 숨을 거둔 어머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웅크린 남자, 귀중품을 움켜쥔 여자, 빵을 구우려던 빵가게 남자 등 다양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홍등가의 성행위 장면 프레스코화

 

도로에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한 돌로 된 화살표도 있었는데 홍등가를 알려주는 표지였다. 홍등가 집에는 욕조와 침대는 물론 다양한 체위를 그린 선정적인 프레스코화까지 남아있어 당시의 성 풍속을 전해주었다. 폼페이에는 도시 크기에 비해 매춘굴이나 술집이 많았다. 도시 곳곳에서 에로틱한 이미지, 매춘 문구가 발견되었다. 심지어 공회당 벽에는 “이곳에서 감미로운 사랑을 나누려는 자는 이곳의 여자들이 언제나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낙서가 있을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이를 보고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타락한 폼페이 시민들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했다.

폼페이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베수비오산 서쪽 인근의 헤르쿨라네움도 화산재에 파묻혔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대부분의 출토품들은 현재 인근의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폼페이의 과거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폼페이에서는 고대 도시의 겉모습을 보고, 나폴리 국립 박물관에서는 그 안을 채웠던 유물을 보아야 한다.

나폴리 국립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BC(기원전) 333년, 소아시아의 남동쪽 이수스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초대형 ‘알렉산더 모자이크’다. 가로 5m, 세로 3m 크기로 기원전 1세기 경 제작된 이 초대형 모자이크 역시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

막상 폼페이를 살펴봐도 충격적이거나 놀랍지는 않아

폼페이는 이처럼 대단한 유적지인데도 막상 그곳을 찾아가 살펴본 느낌은 충격적이거나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비교적 무덤덤한 편이었는데 화산재를 다 걷어낸 도시 모습이 다른 고대 유적지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바닥에 푸석푸석한 화산재가 깔려있어 오히려 다른 유적지만 못했다. 죽은 사람의 형상도 캐스트여서 정교하지 않은 박제처럼 보였다. 폼페이 유적지를 관람하기 위해 입구의 마리나 성문으로 들어서니 도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가 펼쳐지고 멀리 베수비오산이 보인다.

폼페이에서 새로 알게된 사실은 유럽인들도 우리처럼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후 방문하게 될 모든 유명 관광지가 다 그랬다. 정확한 설명을 들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깃발부대를 비하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양인의 깃발부대가 우리의 지나친 자기비하였음을 되돌아보게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개인 여행이 워낙에 자연스럽기 때문에 깃발부대가 촌스럽게 보일테지만 중장년층에게 깃발부대는 여전히 도움되는 측면이 크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던 지난 2018년 10월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정확한 시점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와 관심을 끌었다. 즉 유적발굴 현장에서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기존 학계의 통설인 기원전 79년 8월 24일이 아니라 10월에 일어났음을 알리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주택으로 보이는 유적의 벽에서 한 노동자가 목탄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XVI K Nov’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라틴어로 ‘11월이 되기까지 16일 전’, 즉 10월 17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발굴팀은 “낙서가 목탄으로 쓰여져 보존이 어려운데도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벽에 날짜가) 쓰여진지 얼마되지 않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벽이 화산재에 묻혔기 때문”이라면서 화산 폭발 시점을 10월 24일쯤으로 추정했다.

 

■소렌토는 남부 여행의 필수 코스  

폼페이를 둘러본 후 향한 곳은 해안 절벽 위 도시 소렌토였다. 그곳까지는 열차로 30분이 걸렸는데 열차 안이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물론 좌석 중심의 쾌적한 열차가 아니고 과거 우리나라 경춘선 열차 같은 것이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그동안 중국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민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가이드 말로는 이탈리안이 더 시끄럽단다. 고종희 한양여대 교수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수다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밀라노를 가노라면 프랑스 국가에서는 조용하다가도 이탈리아 국경만 넘으면 기차 안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진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소렌토 타소 광장

 

귀국 후, 여행사 익스피디아가 여행 에티켓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23개 국 1만8229명(한국인 607명 포함)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한국인 여행객이 소음에 특히 민감했다. 비행기 옆자리에 수다스러운 승객이 앉는 것(88%)과 울거나 시끄러운 아이에 대한 거부감(72%)이 조사 대상국 중 한국이 가장 높았다. 내 DNA에 있는 이런 민족성도 작용했으리라.

소렌토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인기 휴양지다. 한국인에게는 이탈리아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기아자동차 브랜드 ‘소렌토’ 때문에 친숙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작곡가가 절벽에 세워진 호텔 트라몬타노의 테라스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이후 호텔의 테라스는 명소가 되었고, 저녁이면 이곳을 방문해 지중해에 내려앉은 낙조를 감상하기도 한다.

로마에서 소렌토 까지는 고속열차로 1시간 10분이면 도착한다. 나폴리에서는 지방열차나 배를 타고 갈 수 있다. 주민이라고 해야 2만 명에 불과한 소박하고 작은 도시이다. 이탈리아 땅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그 흔한 유물·유적이 하나도 없고 특별히 둘러보아야 할 관광명소가 별로 없는데도 예로부터 남부 여행의 필수코스로 꼽히고 요즘도 매년 수백만 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아마도 나폼소의 한 곳이고 카푸리섬을 오가는 페리호가 이곳에서 입출항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자동차 ‘소렌토’ 때문에 친숙한 지명

아름다움이 거리 곳곳에 넘쳐흐르고, 이탈리아 남부의 낭만과 정취가 온 도시에 묻어난다. 시내 중심에는 소렌토가 자랑하는 위대한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의 기념비가 있는 타소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다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절벽도로 또한 명소다. 소렌토의 전망을 한눈에 감상하고 싶다면 해안가 쪽에 위치한 빌라 코무날레 정원을 둘러보면 좋다. 가파른 절벽 위에 지어진 정원에서는 나폴리와 2000년 전 폼페이를 화산재로 뒤덮은 베수비오 화산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은 리몬첼이라 불리는 레몬주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레몬사탕과 레몬비누도 인기다. 레몬은 십자군전쟁 때 중동에서 들여오고 소렌토 해안을 따라 심어져 오늘날에는 세계 최고 생산지를 자랑한다.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에게 레몬은 생활 필수품이다. 멀미도 급체도 기력저하도 모두 레몬으로 해결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소렌토 앞바다에는 신비로운 요정 세이렌이 살았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에 물고기 꼬리를 한 인어의 모습이다. 세이렌은 지중해를 오가는 배를 향해 치명적인 유혹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선원들은 이 달콤한 노래에 넋을 잃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소렌토라는 이름도 세이렌에서 따온 것이다. 소렌토의 원래 이름은 ‘수렌툼’으로 라틴어로 ‘시레나의 땅’이라는 뜻인데 그리스어로는 세이렌이다.

세이렌은 스타벅스의 브랜드 로고로도 유명하다. 1971년 커피·차·향신료 판매회사로 출발한 스타벅스의 이름은 소설 ‘모비딕’의 일등 항해사 ‘스터벅’에서 유래하고 초창기 로고는 커피색 원형 바탕에 그려진 세이렌의 일종인 멜루신(꼬리가 둘 달린 인어)을 회사 이름과 영업 품목이 둘러싼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멜루신의 자세가 선정적이라는 여론에 밀려 1992년 검은색 원에 상반신과 두 꼬리의 끝부분만 확대한 디자인으로 단순화했다. 2011년 창립 40주년을 맞아서는 ‘Starbucks’와 ‘Coffee’를 모두 삭제하고 멜루신의 얼굴과 꼬리만을 확대해 더 단순화했다

 

■카프리, 신이 만들고도 아름다움에 놀랐다는 섬

 

카프리 지도

 

우리 일행은 소렌토에서 폐리호를 타고 세계적 휴양지 카프리 섬으로 건너갔다. 섬까지는 뱃길로 32㎞이고 30분 정도 걸린다. 카프리 섬은 신이 만들고도 아름다움에 놀라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한 채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긴 네모꼴에 각각의 거리가 6㎞, 2㎞다. 섬에는 마리나 그란데 항과 그 반대쪽인 마리나 피콜라 항 등 2개의 항구가 있다. 이중 나폴리·소렌토와 연결해주는 마리나 그란데 항이 단연 활발하다.

카프리의 마리나 그란데 항

 

페리호가 마리나 그란데 항으로 접근할 때 멀리서부터 우리를 반긴 것은 급경사의 절벽에 층층이 지은 낭만적인 저택들이었다. 카프리 섬은 마리나 그란데 항 위쪽에 있는 섬의 중심지 카프리와 서쪽에 있는 아나카프리 두 마을로 나뉜다. 카프리는 항구에서 푸니쿨라(급경사를 기관사 없이 오르내리는 산악기차의 일종)를 타고 5분쯤 올라가면 나온다. 미니버스나 택시 등 대중교통도 있다. 아나카프리는 마리나 그란데 항구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걸린다.

몬테 솔라로로 올라가는 리프트

 

카프리 섬에서 푸르디 푸른 일망무제의 지중해를 잘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크게 두 곳이다. 하나는 섬의 최고봉인 몬테 솔라로 즉 솔라로 산(589m)이고 다른 하나는 아우구스토 정원이다. 솔라로 산 정상에 올라가려면 항구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아나카프리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15분 정도 소요되는 리프트를 타면 된다. 물론 걸어서도 1시간 정도면 올라갈 수 있다. 리프트는 고요한 자연 위를 마치 둥둥 떠다니듯 천천히 이동한다. 정상에 도착하면 탁 트인 바다와 섬의 정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아우구스토 정원으로 가려면 먼저 항구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카프리 마을로 올라가야 한다. 걸어가거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푸니쿨라를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면 카프리 마을의 움베르토 1세 광장에 닿는다. 그곳의 시계탑 주위가 카프리의 중심이다. 움베르토 1세는 이탈리아 통일 후 초대 왕이 되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아들이다.

아우구스토 정원

 

카프리 마을에서 카페와 상점이 즐비한 골목길을 지나 끝자락에 다다르면 바다를 배경으로 새하얀 건물들과 녹음이 가득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친다. 독일 출신 사업가가 로마 시대 건축물 터에 만든 아우구스투스 정원이다.

정원에서는 다양한 관상용 식물과 꽃, 조각상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섬 전경을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비가 이곳에서 허니문을 즐겼다. 러시아 소설가 고리키가 레닌과 장기 두던 빌라가 있고,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호텔이 있고, 처칠과 아이젠하워가 회담한 팔라초(관청)가 있다. 고리키는 1차대전 전야에 이곳에서 6년이나 머물며 혁명학교를 운영했다.

정원에서 내려다본 지중해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흰색 집이 많아 이색적이었다. 정원을 구경하는데 문득 우리의 거제도 앞바다 외도가 떠올랐다. 중국 항주에서 황산으로 가다보면 안휘성의 휘주 지방을 지나가는데 대부분의 집들이 외벽을 흰색으로 칠한 것도 생각났다.

 

지중해를 조망하는 최적의 장소는 솔라로 산과 아우구스토 정원

정원에서 위를 쳐다보면 카푸리 섬을 처음 별장지로 삼은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AD 14~37)의 별장지인 ‘빌라 요비스(일명 제우스 별장)’이 보인다. 빌라 요비스는 카프리 마을의 시계탑(해발 146m)에서 2㎞ 정도 떨어져 있고 카프리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336m)에 있다. 시계탑에서 완만한 오르막을 1시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군데군데 담벼락에 빌라 요비스(Villa Jovis)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어 찾는 게 어렵지는 않다.

빌라 요비스

 

카프리에 처음 별장을 짓은 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BC 63~AD 14)다. 황제는 당시 카프리를 소유하고 있는 나폴리에 다른 섬을 내주고 섬을 취득한 뒤 섬 전체를 황제의 사유지로 삼아 바닷가에 별장을 지었다. 그때도 카프리는 ‘나폴리 만의 진주’로 불렸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토록 반했던 카프리 섬을 만끽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죽던 해에 나폴리 만을 유람할 때 잠깐 들른 게 마지막이다.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제국을 잘 다스리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근위대장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 섬에 정착한 것은 69세 때인 서기 27년이다. 그는 선황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곳에 세워진 신전 봉헌식에 참석한다고만 말하고 로마를 떠났다. 카프리에 간다고는 원로원은 물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하인들과 10명 남짓의 지인들만 동행했다. 지인들의 공통점은 티베리우스가 좋아하는 천문학이나 그리스 문학에 정통하다는 것뿐이었다. 정치나 군사 문제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가족과 로마 시민들은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갔다가는 사실을 곧 알았지만 이후 10년 동안이나 로마를 비우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10년 동안 한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섬 주민들의 축제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카프리에서 10년을 보낸 티베리우스가 북서풍이 몰아치는 카프리 섬을 피해 나폴리 만 서쪽 끝에 있는 미세노 곶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서기 36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37년 3월 16일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여의도 3배 크기의 땅에 관광객은 연간 200만 명

티베리우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긍정적인 평가는 수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고 자신에 대한 비난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등 공화정과 민주원리를 존중했으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했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제거, 궁정음모, 측근의 권력남용, 카프리 섬 은둔 기간에 나돌던 좋지 않은 소문 등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지금도 나폴리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좋지 않은 소문이란 황제가 소년·소녀들을 강제로 별장으로 끌고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온갖 음탕한 성행위를 하도록 하고 역할을 끝낸 소년․소녀들은 모두 절벽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 로마사 연구자들 대부분은 이런 악행을 일소에 부친다는 게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이다. 그녀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를 언급한 고대 역사가는 10명 정도인데 그중 악행을 상세히 언급한 유일한 역사서는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이다.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의 폐쇄적인 성격이나 고독한 세월에 대해 언급했을 뿐 악행은 언급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항간의 소문을 전하는 형식으로 몇 줄 언급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시오노 나나미는 ‘황제 열전’이 오늘날의 옐로 페이퍼라며 악행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카프리 섬이 맥주 브랜드, 카페나 바의 상호 등에 쓰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젤라토(이탈리아 아이스크림)도 유명한데 맛이 다양하고 진했다. 귀국 후 보도에 따르면 카프리 섬이 밀려드는 관광객을 주체 못해 성수기에는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카프리 섬은 여의도 3배 크기이지만 관광객이 연간 200만 명에 달하니 그럴만도 했다.

카프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보석 같은 관광 코스는 푸른 동굴이다. 길이 53m, 너비 30m, 높이 15m의 동굴 안으로 햇빛이 들어와 동굴 안을 파란빛으로 채워 동굴 전체가 은은하게 빛나는 신비스러운 동굴이다. 입구는 더욱 좁아 너비 2m, 높이 1m에 불과해 조수가 낮고 바다가 평온할 때만 동굴 투어가 가능하다 보니 4월에서 10월까지만 작은 보트로 탐험할 수 있다. 바다색은 카프리섬 가운데서도 유독 짙푸르기로 유명하다. 동굴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일정이 빡빡해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푸른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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