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어링 부부의 살림집과 채소밭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메인주
▲오건퀴트(Ogunquit)의 퍼킨스 포구, 가장자리 길, 오건퀴트 해변
오늘의 여행지는 대서양 연안의 미국 최북단 메인주다. 매사추세츠주에서 주간고속도로 95번과 US 1번 하이웨이 해안도로를 타고 메인주로 북상하는 길은 정말 아름답다. 오건퀴트(Ogunquit)에 도착하자마자 숙박지에 짐을 내려놓고 먼저 근처 어시장을 찾아갔다. 메인주의 별미인 큼지막한 바닷가재 한 마리를 사니 즉석에서 고속 찜을 해준다. 숙소로 돌아와 와인과 함께 조촐한 파티를 했다. 마침 숙소는 우리나라 콘도식이다. 부엌과 거실이 별도로 있다. 둘이서 하는 파티지만 분위기가 살아나 실컷 먹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태양이 눈부시다. 먼저 대서양 해변을 산책하기로 하고 퍼킨스 포구(Perkins Cove)를 찾아 나섰다. 포구는 호텔에서 언덕을 내려가니 바로 보였다. 조시아스(Josias)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깊숙한 곳에 움푹 들어가 만을 형성하고 있고 아늑하게 검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다. 포구 내항에는 하얀 가재잡이 어선들이 옹기종기 정박해 있고 주변의 수목과 잘 지은 집들이 어울려 여러 폭의 그림을 그려준다.
산책길은 포구에서 시작되는 절벽 위 바닷가에 조성되어 있다. 부드러운 대서양 바람을 느끼며 산책길을 걸었다. 검은 바위로 이어지는 해안가 절벽과 바위 무더기들이 쉴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부딪쳐 순간순간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그 경관을 바라보며 걷는 2㎞ 산책길은 이름이 ‘가장자리 길(Marginal Way)’이다.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검은 바위가 고불고불 만을 형성하며 이어져있어 제주도 해안가보다 더 오밀조밀 운치가 있다.
해안가 경치 좋은 절벽 위에는 가지각색의 집들이 바다를 향해 들어서 있다. 집앞 정원에는 어김없이 잔디와 교목, 관목과 꽃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사잇길을 산책하며 느끼는 시각 청각 촉각 모두가 신선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산책객들이 꽤 많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일일이 인사를 건넨다. 중간 중간에 커다란 펜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쉴 수 있게 비치의자가 잔디밭에 늘어져 있다. 숙박객들이 하얀 비치의자에 누워,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대서양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여름 휴가시즌에는 이 펜션을 한 달씩 임차해서 휴가를 즐긴다고 한다.
5월의 뉴잉글랜드 관광은 참 맹숭맹숭… 관광객 없어
왕복 한 시간여 산책을 마치고 조금 더 북쪽으로 차를 몰아 백사장으로 갔다. 이곳 오건퀴트 해변(Ogunquit Beach)은 육지에 붙어있는 백사장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오건퀴트 강을 사이에 두고 육지와 평행하게 방파제처럼 길게 뻗어있어서 섶다리 비슷한 풋브릿지(Footbridge)라는 목조 다리를 걸어서 건너야 접근할 수 있다.
강과 바다 사이에 줄을 친 듯 약 5㎞ 길게 뻗은 백사장이 곱게 뻗어있는 것이 신기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백사장은 텅 비어 있다. 서핑을 즐기려는 몇몇 젊은이들만 눈에 띈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 들어오다가 결국엔 하얀 포말로 흩어져 백사장 위에 밀려든다. 그리고는 곧 힘의 정점을 확인하고 밀려나가는 과정이 쉼없이 이어진다. 그 파도와 놀다가 오늘의 목적지인 케네벙크(Kennebunk)를 향해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5월의 뉴잉글랜드 관광은 참 맹숭맹숭하다. 관광지에 가도 관광객이 없다. 본격적인 관광은 6월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호젓하고 편리한 면도 있지만 어딜 가도 우리 둘 뿐이니 너무 싱겁다. 드디어 각시가 보채기 시작한다. 사람 많은 아울렛 매장을 둘러보자고 한다. 어제 매사추세츠주 경계선을 넘어서자마자 보이던 키터리(Kittery)라는 동네에 대형 아울렛 매장이 있다고 책에 나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키터리를 눌러놓고 차의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다. 15마일, 25분 거리를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온 길을 되돌아 가다보니 꽤나 먼 길로 느껴졌다. 드디어 키터리 팩토리 아웃렛 쇼핑매장 거리에 도착했다. 역시 쇼핑 매장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 구경이 최고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관과 유적이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앙꼬 없는 진빵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간단히 눈요기 쇼핑을 마치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케네벙크(Kennebunk), 브룬스윅(Brunswick)
동쪽 대서양 해안길 환상적인 절경의 연속
오건퀴트에서 웰스(Wells)를 거쳐 케네벙크(Kennebunk)까지의 대서양 해안은 절경의 연속이다. 하루 이틀 묵으며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싸고 싱싱한 게와 가재요리를 맛보며 해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건만, 가야할 곳이 너무 많다. 결국에는 달리는 차창으로만 눈요기를 하며 케네벙크로 향했다. US-1번 국도는 눈요기로도 아름다운 도로다.
US-1번(U.S. Route 1) 국도는 동부 쪽에 위치한 15개 주와 주요 도시들을 경유하며 남쪽의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와 북쪽의 메인주 포트켄트 사이를 오가는 남북간 도로다. 거리는 2369miles(3813㎞)로 미국에서 남북간 국도로는 최장이다. 1926년 개통되었다. 1번 국도와 더불어 동부의 남북 축을 잇는 주간(州間)고속도로 제95호선(Interstate 95, I-95)과 구간이 비슷하다.
케네벙크는 항구도시로 번성한 마을이다. 200여 년된 아름다운 주택들이 무게를 더해주며 도시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다만 지난 며칠동안 보아온 수많은 전통마을들과는 별도의 특색이 없어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내일 우리 일정의 최북단 지역인 굿라이프센터(스콧 니어링 농장)까지는 180마일, 3시간 40분 거리이다. 이번 여행의 최장거리 운행 코스이므로 오늘 저녁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북진해서 잠을 잘 요량으로 차를 몰아 보도윈 대학이 있는 브룬스윅(Brunswick)에서 묵었다.
메인주의 동쪽 대서양 해안은 우리나라 동해와는 달리 해안선이 톱니같이 들쭉날쭉 계속 이어져 숲과 바다가 서로 맞물리며 환상적인 경치를 보여준다. 도로의 경치가 모두 빼어나 4시간의 운전이 힘들기는커녕 흥미진진했다. 스콧 니어링의 농장을 찾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길이다. 이 길에서 드라이브했다는 추억만으로도 오래 인상이 남을 것이다.
달리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5월, 이제 막 깨어나는 봄을 맞이하여 누구는 연두색으로, 누구는 자주색으로 부끄럽게 새싹을 내밀며 각양각색의 봄빛으로 향연을 펼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의 행복, 숲과 꽃이 시원하게 내뿜는 맑은 향기가 코 끝을 스치는 쾌감, 깨끗한 햇빛과 파란 하늘과 봄바람이 차창으로 넘어와 내 몸의 모든 세포와 감각기관을 열어 제치고 새봄의 희망과 설레임을 흠뻑 뿌려준다.
■스콧 니어링 부부
▲저서 ‘조화로운 삶(Good Life)’과 농장
스콧 니어링의 삶의 자세와 철학에 매료된 나로서는 정말 가고싶었던 곳
몇 년 전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의 자서전과 이들 부부의 저서 ‘조화로운 삶(Good Life)’을 읽고 나서 이들의 삶의 자세와 철학에 매료되었다. 나도 은퇴하면 이들 부부처럼 단순하고 의미있는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다. 특히 스콧 니어링의 죽음을 준비하는 유서는 인생을 깨끗하게 하직하는 자의 멋이라고 생각되어 나의 죽음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싶은 내용이다.
스콧 니어링은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였다. 아동 노동을 반대하고, 반전 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불순분자,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교수직에서 해직되었고 그가 쓴 경제학 교과서와 저서들은 금서가 되어 서점에서 철수되었다. 이렇게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철저히 배척당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자 50대인 1932년 뉴욕을 떠나 버몬트주 산골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철저한 생활 규칙을 만들어 실천하면서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자급자족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소박한 농장을 일구며 20년을 살다가 그곳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이곳 메인주로 이사했다. 메인주에 처음 지었던 집과 농장도 중간에 자신들과 비슷한 인생 철학을 가진 사람에게 팔고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땅에다 손수 돌을 날라 튼튼한 돌집을 지었다. 이때 스콧은 90세, 부인인 헨렌은 70세였다.
부부가 손수 돌 날라 튼튼하고 아름다운 돌집 지어
이제는 모두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이왕 메인주까지 온 김에 그가 살던 농장을 보고 싶었다. 농장과 집은 사후에 공동체에 신탁되어 그들의 삶의 정신과 유기 농사법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굿 라이프 센터(good life center)’라는 기관으로 관리되고 있다.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이 센터는 6월 중순부터 가을까지만 문을 열고 그 외의 기간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센터 관리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방문해도 괜찮겠느냐고 문의했더니 자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언제나 가든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전화를 미리 주고 방문하라고 답장이 왔다.
드디어 니어링 부부의 ‘포레스트 팜(forest farm)’에 도착했다. 농장은 메인주 거의 꼭대기 가까운 대서양 해안에 있다. 약 4시간의 긴 운전을 해야 한다. 왕복 8시간이 소요되는 힘든 길이지만 꼭 가보고 싶었다. 날씨가 오랜만에 화창하다. 고속도로는 토요일인데도 한산했다. 계속해서 US 1번 국도와 지방도를 타고 달리는 메인주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과 숲과 바다와 호수와 끝없이 이어지는 잘 가꾸어진 잔디를 보며 달리는 드라이브는 짜릿하고 행복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즐거운 운전 끝에 메인주의 작은 마을 하버사이드에 도착했다. 그곳에 니어링 부부가 1952년 보금자리로 잡은 포레스트 팜이 있다. 농장은 쾌청한 대서양 바다를 바로 앞에서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생각보다는 작았다.
마당 건너편에서 누군가 밭일을 하고 있어 찾아가 인사를 나누자 반가이 맞아주며 이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워렌 버코위츠(Warren Berkowiz)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농장 설명을 해준 뒤 “니어링 부부의 영화를 준비할 테니 그 동안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보라”고 한다.
살림집 한 채와 창고 한 채, 가로 세로 각 15m, 높이 1.2m의 정사각형 돌담으로 둘러친 채소밭과 거기에 붙어 있는 작은 유리온실(폭 2.7m, 길이 12m), 사과나무 몇 그루, 그리고 밭 옆에 지어놓은 UFO 같이 생긴 목조 명상센터가 전부였다. 두툼하게 쌓은 돌담으로 둘러쳐진 채소밭은 사슴이나 다람쥐 등 야생동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고, 춥고 바람이 많은 기후에서 작물을 보호하고, 햇볕이 돌에 축열되어 보온기능을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농장은 대서양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있어… 생각보다 작아
우리 부부가 농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니 교육생들의 숙소와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는 창고에서 DVD를 틀어주었다. 니어링 부부가 생전에 일하는 모습과 육성을 담아 놓은 것이다. 열정적으로 일하고, 그들이 연구 개발한 유기농법을 시연하며 교육하고, 노부부가 직접 돌을 나르고 모래를 고르고 시멘트를 바르면서 즐겁게 집을 짓고, 집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어스 만(Orr’s Cove)이 썰물로 물이 나갈 때 만의 한 가운데에 운치있게 솟아있는 바윗돌에 올라 서서 대서양을 향해 헨렌 여사가 요들송을 아름답게 부르는 모습 등을 비디오에 담아 놓았다.
우리 둘이서만 비디오 관람을 마치고 살림채로 들어가 니어링 부부가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서재와 응접실, 부엌, 거실, 친환경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의 가장 큰 통창을 통해서 대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름다웠다. 바닥은 모두 검은 판석으로 깔아 모자이크의 미감이 새로웠다.
부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화장해서 이곳 농장 구석구석과 해변가에 뿌렸다고 한다. 듣고 보니 스콧이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거두어 대서양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 주길 바란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헬렌은 네덜란드를 좋아해서 유골 재의 일부를 네덜란드로 가져가서 뿌려주었단다. 니어링 부부는 그들의 저서 ‘조화로운 삶(Good Life)’에서 그들의 삶과 인생을 자세히 기술했다.
굿 라이프 센터에는 매년 2000여 명의 방문객이 찾아와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의 정신과 농사법 등을 배우고 간다. 특이한 것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 미국인을 제외하면 한국인이 가장 많다고 한다. 심지어 가까운 캐나다 사람들보다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니어링 부부의 책들도 대부분 한국어로 번역·판매되었다며 한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열광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마도 한국이 급격하게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자연과 평화를 추구하는 니어링 부부의 삶을 흠모하게 된 것이리라고 대답했다.
▲스콧 니어링의 생활 원칙
그의 위대함을 웅변해주는 몇 가지 일화
스콧 니어링은 부의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치고 일용할 양식만으로 살 때 진정으로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했다. 그의 삶에서 몇 가지 일화는 재산에 대한 위대한 철학을 증거해 주고 있어 그의 위대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1920년대 젊었을 때 뉴욕의 한 재력가 해리어트 G. 플래그라는 여성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10만 달러 가량의 유산을 그에게 남기고 싶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스콧은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풍족한 재산만큼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인플레이션으로 신음하던 때 독일의 한 도시에서 발행한 공채를 약간 사두었다. 전후 독일의 재건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800달러를 주고 산 이 공채가 약 6만달러까지 올라갔다. 그는 이 상황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전쟁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이득, 독일 국민의 노동을 착취한데서 비롯한 결과를 받아먹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결국 공채 증서를 난로 속에 던져 버렸다. 부의 위험으로부터 다시 한 번 벗어났던 것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를 그는 버몬트주에서 살았다. 윈홀 마을에 2200달러를 주고 구입한 약간 넓은 임야와 2500달러를 주고 산 적당한 규모의 농장이 있었다. 버몬트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을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전쟁특수로 인해 임야의 땅값이 최소 2만5000달러로 치솟았다.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횡재였다. 니어링 부부는 임야를 윈홀 마을에 공유지로 양도하고, 직접 지은 무려 아홉 채나 되는 돌집은 시가의 절반 가격으로 팔았다. 그들은 다시 한번 아슬아슬하게 부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자본주의 계급사회 원칙을 경멸
그는 살아오면서 도박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독일 공채를 구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식이나 채권, 저당권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어떠한 형태든 불로소득은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숱한 경제적 부침을 되돌아볼 때, 부의 유혹을 거절한 것 만큼 현명한 처사는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원칙을 경멸했다. 그는 하루의 일과를 생계를 위한 노동 4시간, 지적 활동 4시간, 좋은 사람들과의 친교 4시간으로 나누어 철저히 지켜나갔다. 그는 모든 계획과 목표를 고려하여 1년을 그럭저럭 지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현금을 정하고 그 액수를 벌어들일 수 있을 만큼만 환금 작물을 생산했다. 그리고 일단 목표액이 채워지면 다음해 예산을 세울 때 까지 생산을 중단했다.
기본 식품과 집, 땔감을 스스로 마련하는 자급경제를 유지했으며, 일정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에 따라 생활했다. 가능한 한 시장과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이윤을 남기는 경제는 노동력과 현금의 맞교환을 전제로 삼는다. 개인이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노동시장과 생필품시장과 국가에 맡기는 셈이 되므로 곤란에 처할 수 있다. 그래서 수입의 약4분의 3은 그들이 직접 생산에 공을 들여 얻은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가격과 이윤경제에 직접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생활했다.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줘
스콧은 이러한 생활 원칙을 실천함으로써 경쟁적이고 자본주의화 된 사회양식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4가지 해악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고 말한다. 4가지 해악이란 돈과 물질에 대한 탐욕에 찌든 인간들을 괴롭히는 권력, 다른 사람보다 출세하고 싶은 충동과 관련된 조급함과 시끄러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 반드시 수반되는 근심과 두려움, 많은 사람이 좁은 지역으로 몰려드는 데서 생기는 복잡함과 혼란을 말한다
스콧 니어링은 100세 생일이 지나고 18일째 되는 1983년 8월24일,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아내와 대화하다가 마른 나뭇잎이 떨어지듯 “좋아~” 하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00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잠깐의 방문이었지만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저서를 통해서 흠모하던 이 분들의 삶의 터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건진 뜻밖의 수확이었다. 단순 소박한 삶을 부조리하고 힘겨운 삶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대안으로 소개하고 몸소 살아간 니어링 부부와 헨리 소로 그리고 쉐이커 교도들의 흔적을 확인하고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의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니어링의 죽음과 장례절차 지침서
스콧 니어링이 1963년 쓰고 1982년 수정한 ‘주위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죽음과 장례 절차에 대한 지침서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가능하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따라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게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 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것을 요청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받기를 바란다.
김정일
은행 지점장 퇴직 후, 뭐라도 배우고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한 ‘뭐라도학교’ 초대교장으로 3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10년째 소나무와 씨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