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6·25 전쟁’ 발발 70주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10대 장면 ⑦ 중공군·북한군의 총공세와 1·4 후퇴 ⑧ 포로교환협정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

↑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돼 온 공산당 포로들

 

by 김지지

 

⑦ 중공군·북한군의 총공세와 1·4 후퇴

 

중공군·북한군의 총공세로 우리 정부 다시 부산으로 후퇴

중공군의 개입으로 뒤집힌 전세는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1950년 12월 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선이 뚫려 서울이 위태로웠고 동부전선에서는 12월 24일 흥남 철수가 완료되었다. 시시각각으로 전해오는 후퇴 소식에 서울 시민 대부분은 피난을 재촉했다. 그런 가운데 12월 31일 오후 5시를 기해 38선을 돌파하려는 중공군·북한군의 제3차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결국 정부는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다시 부산으로 후퇴했다. 유엔군 역시 서울에서 철수했다. 1·4 후퇴였다. 3개월여 만에 다시 서울을 장악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며칠도 안되어 수원, 오산, 인천을 함락하고 1월 14일에는 37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무리하면 더 내려갈 수 있었으나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길어지는 보급선을 우려했다. 그는 개전 초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길어진 보급선으로 애를 먹은 것을 교훈으로 삼았다.

1.4후퇴 당시 끊어진 한강 철교 부근에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팽덕회는 유엔군이 비록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력의 우위와 반격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해 더 이상의 공격을 중지하고 각 군의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선에 시달했다. 그러나 대치는 잠깐이었다.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선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고 있던 유엔군이 1월 25일 북진을 시작하면서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

1951년 2월 1일의 유엔 총회는 압도적 지지로 중공 정부를 ‘침략자’로 결의하고 한반도 작전 목적을 “침략자를 한국에서 축출하는 것”으로 고쳐 잡았다. 유엔군은 동부전선에서는 2월 7일 대관령~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고, 서부전선에서는 2월 10일 한강선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이 2월 11일 제4차 총공세를 시작했으나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혀 되레 3월 14일 서울을 내주고 38선으로 후퇴했다.

맥아더는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 본토 공격을 워싱턴에 건의했으나 트루먼은 전쟁을 38선에서 끝낼 생각에 휴전을 모색했다. 3월 20일 트루먼이 사실상 휴전 의사를 밝힌 성명서를 유럽 동맹국에 전달했는데도 맥아더는 3월 24일 “승리 외에 다른 것은 없다”며 공개적으로 38선 북진 명령을 내렸다. 화가 치민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을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초강경책을 구사했다.

해임되기 직전 한국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오른쪽)와 그 뒤에 탑승한 리지웨이

 

휴전 협상은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

중공군과 북한군은 4월 22일 밤 제5차 총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엔군의 공습과 대대적인 포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팽덕회는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고 5월 27일부터 전 전선에 걸친 방어전을 명령했다. 모택동이 휴전에 수락할 뜻을 비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휴전 협상은 양측의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우선 중공군은 재래식 장비와 전술, 열악한 군수 지원 체제로는 유엔군을 이길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세계 최대의 인적 자원을 갖고 있지만 공세 때마다 발생하는 엄청난 사상자를 감당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유엔군도 화력으로는 적을 압도했지만 38선을 넘어 재차 북진할 때 소련의 개입과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 인명 피해와 비용 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다. 따라서 “명예로운 휴전을 끌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통일을 기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국민은 휴전 협상을 반대했으나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종전 방안을 강구하고 있던 미 정부는 당시 국무부 고문관이던 조지 케넌을 유엔 주재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와 만나도록 했다. 5월 31일의 만남에서 케넌은 “경계선을 현재 상태에서 유지하는 선에서 협상을 통해 한국전을 끝내고 싶다”는 미 정부의 뜻을 밝혔다. 소련 정부는 이를 중국 측에 전달했다.

메시지를 전달받은 모택동은 6월 초 김일성을 북경으로 불러 전전(戰前) 영토 보장과 한반도 주둔 외국 군대의 점진적인 철수를 약속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회담 논의는 6월 23일 말리크가 교전 당사자 간의 대화를 제안하고 며칠 뒤 미국과 중국이 지지를 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6월 30일 원산 앞바다 덴마크 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중공·북한 측은 개성에서 회담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결국 7월 10일, 한때 고급요정이던 개성의 내봉장에서 첫 본회담이 열렸다.

본회담이 열린 내봉장

 

 

⑧ 포로교환협정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

 

6·25전쟁 휴전이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6·25전쟁의 휴전이 늦어진 것은 전적으로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중공군의 1951년 춘계 공세 후 전선이 38선을 경계선으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전쟁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생각을 했다. 공산 측 역시 무리하게 전쟁을 지속할 생각은 없어 양측은 협상을 모색했다.

양측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시작해 7월 26일 군사분계선 설정, 전투행위와 정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등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합의했다. 예상대로 가장 큰 걸림돌은 5개 항 가운데 제4 의제인 전쟁포로 처리문제 즉 포로 송환이었다. 포로 송환 문제는 1951년 10월 처음 협상 의제에 올랐다. 그러나 회담 벽두부터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를 석방하자”는 북한의 주장에 가로막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했다.

포로송환은 1949년의 제네바 협정 제118조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 없이 석방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자동송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산 측의 주장은 옳았다.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많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도 인도주의에 어긋난다. 유엔군은 이런 사정을 감안해 포로의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유엔군 측은 포로의 개별의사를 존중한다는 자발적 송환 원칙으로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도모하려했고, 공산 측은 포로 가운데 북한이나 중국으로 귀환을 거부하는 자가 나올 경우 침략자를 물리쳐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는 이른바 ‘정의의 전쟁’의 가치가 퇴색할 것을 우려했다.

 

공산 측이 통보한 1만 1,559명의 포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

문제는 또 있었다. 공산 측이 제시한 유엔군의 포로 숫자가 지나치게 적었던 것이다. 1951년 12월 18일 유엔군이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인민군 9만5531명)을 공산 측에 통보한 것과 달리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숫자만을 유엔군에 통보했다. 이 숫자는 나중에 부상병 포로, 잔류 포로, 시신으로 인도된 경우 등이 추가되어 1만 4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렇더라도 전쟁 중 북한 언론에 보도된 전쟁 발발 후 첫 9개월간 6만 5000여 명, 1951년 6월 25일 북한군 총사령부가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한국군 등 유엔군 포로가 10만 8257명이라고 노동신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힌 것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더구나 전쟁 개시 후 1년간의 통계였기 때문에 휴전까지는 포로가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공산 측이 전투 성과를 과장했을 수도 있다.

유엔군 측은 포로 협상 초기부터 6만 5000명을 근거로 ‘사라진 5만 명’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반대로 공산군 측은 “5만여 명을 이미 석방했다”면서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여 명이 제외된 것을 항의했다. 또한 공산 포로 중 다수의 송환 거부자가 발생한 것을 두고 유엔군 측에서 이들 포로를 강제로 억류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이 때문에 유엔군 측은 어쩔 수 없이 북한이 제시한 포로 명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과 소련 스탈린의 사망 후 휴전 논의 급물살 타

양측의 휴전협상 대표는 1952년 5월 7일까지 모든 의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포로 송환 문제만은 여전히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 1952년 10월 8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양측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사태가 미소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1953.1)하고, 전쟁의 배후 주동자인 스탈린이 사망(1953.3)해 양측에서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양측은 포로 송환 문제를 다시 논의했다. 의제 가운데 부상포로 교환협정이 1953년 4월 11일 먼저 체결되어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부상포로 교환이 이뤄졌다. 이렇게 포로 교환협정에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공산 측은 1953년 5월 7일 포로 송환 문제에 관한 8개항을 제시했다. “휴전협정 후 2개월 이내에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송환하되, 송환 반대 포로들은 한국 안에 잔류시키는 데 동의하겠다”는 양보안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북한과 중공의 설득 대표단을 비롯해 폴란드, 체코, 인도, 스위스, 스웨덴으로 구성된 5개 중립국 송환위원회가 한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송환위원회는 송환 반대 중국인 포로들의 관리만 맡고 한국인 포로들은 휴전과 동시에 북한이든 남한이든 스스로 결정한 자유를 보장한 채 개인 자격으로 석방해야 한다”며 맞섰다. 하지만 공산 측이 난색을 표명하자 5월 25일 “한국인 포로들도 중국인 포로와 마찬가지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놓았다. 공산군 측은 미국의 ‘5·25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이로써 포로 송환 문제는 해결의 가닥을 잡아나갔다.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6월 4일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 조인 후 2개월 내에 송환을 완료하고 잔류를 원하는 포로에 대해서는 90일의 설득 기간을 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또 이도저도 아닌 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6월 8일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과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이 포로 송환협정에 조인함으로써 2년간을 끌어온 포로 송환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중립국 송환위원회 위원들이 포로에게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갈 것인지 묻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도박

그러나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과 국민은 분노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정한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 데다 반공포로들이 수개월 동안 이들의 설득 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골수 공산주의자 포로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친공포로들이 그들과 뜻을 달리하는 포로를 학대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자 유엔군 사령부는 친공과 반공 포로들을 분리·수용했다. 이에 따라 북한 출신 포로 9만 명 중 40%, 남한 출신 포로 5만 명 중 50%, 중공군 포로 2만 명 중 75%가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부산·마산·광주·논산·대구·영천·부평 등 7개 지역에 분산 수용되었다. 북쪽으로 돌아가겠다는 친공포로는 계속 거제도에 남겨두었다.

반공포로 수용소는 주로 한국군이 경비를 맡았다.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풀어주어 자신이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미적미적한 반응을 보이는 미국으로부터 분명한 약속을 받아내야겠다고 작심했다.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53년 초였다. 결심이 서자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불러 “반공포로를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용덕은 부산 정치파동 때 계엄 업무를 담당하며 정치 탄압의 선봉에 섰던 이승만의 충복이었다.

원용덕은 반공포로 석방과 수용소 접수 두 가지 안 중 처음에는 수용소 접수안을 이승만에 올려 재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군 측이 낌새를 눈치채고 한국군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자 수용소 접수 계획을 포기하고 반공포로 석방안을 다시 재가받았다. 원용덕은 원활한 임무 완수를 위해 ‘각군 헌병은 헌병총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는 내용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그 후 계획은 국방장관과 참모총장도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극도의 긴장과 비밀 속에서 추진되었다. 명령계통은 대통령→헌병총사령관→육군헌병사령관→포로경비부대로 이어졌다.

장맛비가 퍼붓고 있는 6월 18일 새벽 1~2시, 북쪽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되어있는 7개 포로수용소 하늘에 예광탄이 발사되었다. 뒤이어 3만 5400여 명의 반공포로가 우리 헌병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대탈출을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1시 미국을 상대로 감행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도박이 자신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해 포로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주민들이 포로들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덕분에 3만 5400여 명의 반공포로 가운데 2만 6930명이 자유를 찾았다. 하지만 미군이 경비하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했다. 8293명은 탈출에 실패해 다시 철조망에 갇혔다. 이들은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져 90일의 설득 기간을 거친 뒤 1954년 1월 석방되었다. 반공포로 석방뉴스는 면도를 하고 있던 처칠로 하여금 휴전회담을 깨는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얼굴에 생채기를 낼 정도로 세계를 놀라게 한 쾌거였다.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우리 군에도 깊은 상처를 냈다. 반공포로 석방에 격노한 모택동이 휴전을 앞둔 상태에서 대규모 공격을 명령했기 내렸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 19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와 군대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라고 질의서를 보냈다.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의 신호탄이었다. 전투는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 김화군에서 합류하는 북한강 지류인 금성천에서 벌어졌다. 전사에는 한국전쟁 중 국군의 7대 패전의 하나로 불리는 금성전투로 기록되었다.

금성전투에는 공산군 측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6개 군단과 인민군 2개 군단, 유엔군 측에서는 국군 4개 사단과 미 제9군단 휘하 국군 수도사단 및 제9보병 사단이 격돌했다. 전투 결과 중국인민지원군 제20병단 사령관은 유엔군 5만2783명을 섬멸(전사 혹은 실종)하고 그중 283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밝혔다. 반면 아군 전투사에 따르면 7월12~27일 전사자와 실종자는 5569명이다. 실종자의 상당수가 전사자로 처리된 것을 감안하면 국군포로는 2836~5569명 사이다. 결국 포로 문제 끝에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전투가 또 다른 포로를 낳은 것이다.

 

중공군 1만 4,000여 명은 자유중국(현 대만)으로 떠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상 조인 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별 무리 없이 8월 5일부터 한 달간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 통계에 따르면 휴전 후 한국으로 돌아온 포로는 1만 2783명(국군 7870명, 유엔군 4913명)이고, 북쪽으로 송환된 포로는 7만 6451명(북한군 7만 371명, 중공군 6080명)이다. 남쪽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349명(국군 327명, 유엔군 22명), 북쪽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2만 1976명(북한군 7712명, 중공군 1만 4264명)이었다.

북한군 포로들이 유엔군에서 지급한 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차림으로 돌아가고 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한국인·중국인 포로들은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인도,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져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다. 남북한과 중공 대표들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자국 송환을 위해 3개월 동안 설득작업을 벌였다. 뒤이어 포로수용소에 삼거리가 만들어졌고,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남한, 북한, 중립국(인도행)이 결정되었다.

1954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경향신문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만 4227명, 북한군 7582명 등이었다. 이 가운데 마음이 바뀌어 다시 본국행으로 돌아선 포로는 중공군 72명, 북한군 32명 등 총 104명이었다.

포로들은 1954년 1월 20일 석방되어 3일간 자신의 행로를 선택했다.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은 그대로 한국에 남았지만 중공군 1만 4000여 명은 자유중국(현 대만)을 선택했다. 자유중국 정부는 이들을 맞기 위해 연예인을 포함한 환영팀을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1월 21일 인천항에서 미 LST 수송선을 타고 자유중국으로 떠났다. 이후 자유중국에서는 이들을 주제로 ‘1만 4000명의 증인’이란 반공영화를 만들고 이들이 자유중국에 도착한 1월 23일을 자유일로 정해 기념했다.

자유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중공군 포로들이 자유중국 국기인 청천백일기, 태극기, 성조기와 장제스 총통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중립국 선택한 76명은 인도로 갔다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북한으로 뿔뿔이 흩어져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당초에는 200여 명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88명만이 제3국행(인도행)을 선택했다. 88명 중 12명은 중공군, 76명(인민군 74명, 국군 2명)은 한국인 포로였다. 한국인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인천항을 떠나는 2만 2000톤 급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16일간의 항해 끝에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현재의 첸나이)에 내렸다. 이들은 인도 정부가 제공한 군 막사에 기거하면서 자신을 받아줄 나라를 기다렸다. 당초 그들이 원했던 목적지는 미국,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 등이었으나 받아주겠다는 나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참전국이라 불가능했고 스위스와 스웨덴은 수용을 거부했다. 다행히 멕시코에서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이 왔으나 6개월이나 시간을 끌다가 난색을 표명, 또다시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이 다 되도록 받아들이겠다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일부 포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자신을 남쪽에서 받아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남한 정부로부터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10여 명은 북한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포로들은 유엔에 청원했다. 그러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부터 전갈이 왔다. 포로들은 인도 잔류,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갈렸다. 50명이 브라질(1956.2 도착), 11명이 아르헨티나(1957.5)로 떠나고 나머지는 인도에 눌러앉았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 76명이 ‘아스투리아스호’ 에서 기념촬영했다.

 

브라질로 간 포로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기술을 익혀 자동차 정비공, 재봉공, 선반공장 직공 등으로 진출했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포로, 살인을 저질러 27년간 정신감호소에 갇힌 포로도 있었다. 아르헨티나로 간 포로들이 주로 터전을 잡은 곳도 공장지대였다. 인도에 남은 포로들은 1962년 우리나라가 인도에 총영사관을 개설할 때 도움을 주었다.

인도행 포로들의 이야기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그려졌다. 주인공 이명준은 정치보위부 간부로 6·25에 참전해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가 된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판문점 포로송환위원회에서 남북한 대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착지로 인도를 선택한다. 그러나 이명준은 크레파스보다 더 진한 남지나해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투신자살한다는 내용이다.

남으로 송환되지 않은 국군과 유엔군은 북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았다. 전쟁 중에는 부상이 악화되거나 질병과 기아, 혹한, 북한군의 살해로 스러졌다. 이동이 어렵거나 저항하는 포로들을 즉결처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아남은 상당수는 강제로 북한군에 편입됐다. 제대 후에는 북한 전역의 도로, 철도, 주택 복구와 각종 건설사업에 동원되고 탄광에서 살인적인 강제노역에 종사했다. 각종 감시와 처벌을 받았으며 아이들은 노동당 입당이나 대학 진학이 어려웠다.

이들 중 2012년까지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는 80명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측 정부는 납북자 문제와 함께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북측은 협의 자체를 거부해왔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범주에 넣어 126명의 생사확인을 요청했지만 북한은 그중 93명이 확인이 안된다고 답해왔다. 결국 17건의 국군포로 가족 상봉만이 성사됐으며, 그나마 북한은 이들이 해방전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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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릭! ⑤ 국군·유엔군의 38선 돌파와 중공군 참전 ⑥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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