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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6·25전쟁 10대 장면] ⑤ 국군·유엔군의 38선 돌파와 중공군 참전 ⑥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 중국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눈으로 덮인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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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⑤ 국군·유엔군의 38선 돌파와 중공군 참전

 

‘국군의 날’은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

6·25전쟁의 양상은 인천상륙작전 성공(9.15)과 서울 수복(9.28)을 분수령으로 유엔군의 승세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9월 30일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 사이 미 정부는 유엔군의 38선 북진에 대해 작전계획을 짜는 한편 유엔을 통한 법적 근거 마련에 골몰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단독 진격을 선언하고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에게 북진을 명령했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는 상태에서 국군의 단독 행동은 지휘체계에 혼선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런데도 정일권은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10월 1일 동해안 제3사단의 23연대에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현재 ‘국군의 날’은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한편 진격 중지를 명령한 맥아더는 10월 1일 북한에 항복 권고 방송을 하고 이튿날 전 부대에 ‘작전명령 제2호’를 하달했다. 미 8군을 주공(主攻), 미 10군단을 조공으로 하여 북한 북부의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잇는 이른바 ‘맥아더 라인’까지만 진출하라는 명령이었다. 10월 9일에는 ‘한반도 전체에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단일정부 수립을 인정한다’는 유엔 결의안이 47 대 5로 통과(10.7)된 것에 고무되어 북한에 두 번째 항복 권고 방송을 하고 서부전선의 미 8군에 북진 개시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유엔군도 국군에 이어 전면적인 북진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건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만났다. 맥아더는 걱정하는 트루먼에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더라도 병력은 고작 5만~6만 명 정도에 불과하고 공군도 없다”고 공언했다.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웨이크섬에서 만나 전황을 논의하고 있다.(1950.10.15)

 

이후 유엔군과 국국은 함남의 원산(10.10)과 함흥(10.17)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10월 19일 한국군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 누구도 10월 11일 중공군 선발대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 아래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고, 10월 19일부터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이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 땅을 밟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중국의 항미원조일((抗美援朝日)은 중공군이 총공세 시작한 10월 25일

중공군은 매일 어둠이 깔릴 때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강을 건너 철저히 은닉했다. 1차로 북한에 진입한 25만 명의 중공군은 평북의 희천~구성~운산~덕천선 이북 지역에 배치를 완료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병력은 계속 증강되었다.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백전노장 팽덕회였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알지 못한 채 10월 24일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에 “모든 지상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국군 제6사단 7연대는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진출, 압록강 국경선에 태극기를 꽂고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았다. 동해안으로 상륙한 미 제7사단도 11월 20일 함경남도 삼수와 갑산에 진출하고, 이튿날 함경북도의 혜산진까지 무혈점령함으로써 한국군 제6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국경선에 도달한 부대로 기록되었다.

중공군의 총사령관인 팽덕회(왼쪽)과 모택동

 

중공군이 제1차 총공세를 감행한 것은 10월 25일이었다. 산속 매복지에서 뛰쳐나온 중공군은 미군보다 전력이 약해 보이는 국군 선봉부대를 먼저 공격했다. 10월 25일 오전 11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은 평북 운산의 텅 빈 시가지를 진격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과 교전했다. 오늘날 중국이 기념하는 항미원조일은 이 10월 25일이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한국군 제1, 제6, 제8사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날 한국군 제1사단의 선봉인 15연대가 운산 북쪽의 전투에서 중공군 1명을 생포했다. 아군이 생포한 첫 중공군 포로였다. 포로는 근처에 2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있다고 자백했으나 미 8군 지휘부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소규모의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1월 3일까지 계속된 운산 전투를 치르면서 중공군의 실체를 인정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중공군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긴 했지만 결국 방어에 실패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잃은 채 후퇴했다. 특히 미 제8기병연대는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운산 전투 후 미군과 국군이 청천강까지 후퇴했을 무렵 갑자기 중공군이 전선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이 벌어졌다.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중간에 위치한 고원지대 산속에 틀어박혀 밤이 되면 깊은 산속을 따라 남하하고 낮에는 몸을 숨겨 보이지 않는 것인데도 유엔군은 이런 중공군의 이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맥아더, 중공군을 과소평가해 총공세 명령 내렸다가 열흘만에 총퇴각 명령 내려

11월 4일 중국 공산당 정부가 한국전 참전을 공식 발표했으나 맥아더는 여전히 중공군을 과소평가하며 11월 24일 ‘종전을 위한 총공세’ 명령을 내렸다. 11월 25일 중공군도 제2차 총공세를 감행, 양측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 사이의 간격이 더욱 벌어진 틈을 파고든 중공군의 인산인해식 파상공세는 위력적이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미군은 후퇴해야 했고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 시작된 ‘장진호 전투’로 미 해병1사단이 포위된 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맥아더는 11월 28일 전면적 후퇴를 결정하며 “전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는 한미 양군과 북한군이 맞서던 전쟁의 양상이 미군과 중공군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2월 2일 맥아더는 모든 유엔군 부대에 평양~원산 저지선을 포기하고 38선으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유엔군은 12월 5일 평양을 포기하고 12월 24일 흥남부두에서 철수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1950년 12월 16일 1차대전과 2차대전 때도 없었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골자는 물가와 임금 통제, 500억 달러 규모의 국방예산 편성이었다. 그런 가운데 1951년 1월 4일 마침내 서울마저 중공군·인민군에 내줌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고 전선은 6개월 만에 다시 개전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더글러스 맥아더

 

그 무렵 6·25 전투의 또 다른 변수는 소련 전투기의 출현이었다. 소련은 자국의 전투기에 중공 국적을 표시하고 조종사들에게는 중공의 공군복을 입혀 중공기로 위장했다. 1950년 11월 1일에는 중국 땅에서 이륙한 소련의 미그-15기가 미 공군 T-6 전술통제기와 F-51 전투기를 위협하고, 11월 8일에는 압록강변 신의주 상공에서 미그-15기와 미군 F-80C전투기 간 세계 첫 제트전투기 교전이 벌어졌다. 뛰어난 성능과 무장을 갖춘 최신예 미그-15 전투기의 참전에 따라 전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소련 공군의 참전은 1950년 11~12월의 유엔군 후퇴를 가속화한 요인이기도 했다.

다행히 1951년 3월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반격으로 3월 15일 서울을 수복하고 전선은 38선으로 돌아왔다. 트루먼은 중공군의 참전을 오판하고 자신에게 항명한 맥아더를 1951년 4월 11일 전격 해임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의 공식 전사자는 15만 2,000여 명이지만 훗날 등소평이 일본 공산당 지도부에 실토하고, 모택동의 전기에 기록된 전사자 수는 40여만 명이다.

 

⑥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11월 27일 밤, 첫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 대패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 사령부가 6·25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전 부대에 ‘종전을 위한 총공세’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이 명령을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총공격’으로 받아들여 ‘크리스마스 대공세’로 바꿔 불렀다. 총공세 명령이 떨어졌을 때, 낭림산맥(함경남도와 평안남북도의 경계를 따라 형성된 남북 방향의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 산악 지역에서는 월턴 워커 중장이 이끄는 미 8군이 청천강 부근에 포진하고 있었고, 동쪽 지역에서는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10군단이 함흥의 북쪽 장진호까지 작전권 안에 두고 있었다.

총공세 명령이 떨어졌을 때 10군단 중 미 해병 1사단과 제7사단은 장진호를 향해 북진 중이었다. 장진호는 개마고원 위를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장진강 중류를 1934년 일제가 막아 건설된 인공호수다. 당시는 일본이 만든 지도 뿐이어서 미국은 일본식 지명 발음에 따라 ‘초신(Chosin)’으로 불렀다. 해병 1사단은 11월 10일 장진호 남쪽의 고토리를 확보했으나 11일부터 기온이 급강하하고, 강풍까지 불어 장진호 바로 남쪽에 위치한 하갈우리까지 18㎞를 통과하는 데 꼬박 5일이 걸렸다. 그리고 하갈우리에서 22㎞ 떨어진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에는 11월 25일 도착했다. 10군단 소속 미 육군 7사단 일부 병력 4,500명은 장진호 동쪽에 포진했다. 문제는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12만 명으로 구성된 중공군이었다. 중공군은 탐지가 어려운 야간을 틈타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함으로써 고립무원 상태에 빠뜨렸다.

중공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 장진호 전투가 시작된 것은 11월 27일 밤이었다. 다음날 밤까지 이어진 이 전투로 장진호 동쪽의 7사단은 부대원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비극적 패전을 경험했다. 미 해병1사단마저 궤멸될 경우 동부전선에 투입된 미 10군단 전체 병력 10만여 명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11월 29일 맥아더 사령부가 미 해병1사단에 흥남으로 집결해 교두보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수송기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고 거부하고, 육로 철수를 결심했다.

계속되는 장진호 전투와 혹독한 추위로 지쳐버린 미 병사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

결국 미 해병1사단은 발길을 돌려 120~130㎞에 이르는 거리를 되돌아나와야 했다. 유담리 → 하갈우리 → 고토리 → 진흥리 → 흥남으로 이어지는 철수 루트는 해발 1,000~2,000m의 개마고원 지대였다. 기온은 영하 20~40도의 혹한이었다. 윤활유와 대포가 얼어붙고 배터리가 방전되어 통신이 끊어질 정도였다. 12월 1일 미 해병1사단의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되었을 때, 병사들은 쫓아오는 중공군과의 전투로도 쓰러졌지만 혹한에 의한 동상과 설사 등으로도 생사를 넘나들었다. 중공군의 기습 공격에 전사자가 늘어났지만,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팔 수 없어 주검을 서너겹 쌓아 올려야 했다.

미국 신문에 “해병1사단 전멸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1면을 장식했으나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로 병사들을 격려하며 철수를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험난한 지형과 추위를 뚫고 적과 전투를 벌여가며 부대 단위와 장비를 유지하고 후퇴한다는 것은 극한의 사투와 같았다.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에 거의 당도했을 때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제10군단 전체로는 3,000여 명이 사망하고 5,000여 명이 다쳤다. 중공군 9병단의 피해도 막대했다.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2만 5,0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 2,500여 명이 부상했다. 그래서 “진주만 이래 최악의 패배”라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군사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중의 하나”라는 평가도 있다.

중국 최대의 검색 엔진 바이두는 미군이 전쟁 후 발표한 자료들을 취합해 장진호전투 통계를 냈는데 미군 측은 사망 2,100명, 포로 300명을 포함해서 1만 3,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고, 중국군 측은 동사 4,000여 명을 포함한 전사자 1만1,000명에 병력 손실은 5만 6,000명인 것으로 집계했다.

장진호 전투 상황도

 

현봉학의 노력 덕분에 10만명의 피란민 자유의 땅 찾아

미 해병1사단이 흥남에 거의 도착한 12월 11일 맥아더 사령부는 함흥과 흥남에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동부전선에서 해안으로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군함을 타고 바다를 통해 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철수 병력을 태울 군함이 정박할 곳은 함경남도 흥남 항구였다. 그런데 미군의 철수 행렬 뒤에는 현지 주민들의 피란행렬이 줄을 지었다. 철수를 앞둔 흥남부두는 피란민과 군인이 뒤섞여 아수라장이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들이 밧줄과 사다리를 통해 미군 수송선에 올라타고 있다.

 

12월 12일부터 미군과 국군이 배에 오르며 철수를 서두르는 동안 바다에서는 미주리호를 비롯한 13척의 함정과 함재기들이 중공군의 진지와 집결지를 향해 밤낮없이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가했다. 그 틈을 타 10만 5,000여 명의 지상군과 1만 7,500여 대의 각종 차량, 35만t에 달하는 군수물자가 미 군함에 실렸다.

문제는 피란민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당시 10군단의 고문관이면서 고향이 함흥인 현봉학(1922~2007)이었다. 그는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 의대에 유학했다가 1950년 3월 귀국했는데 귀국 직후 6·25전쟁을 맞았다. 한국 해병대 문관으로 참전해 미군 통역을 맡았다.

현봉학

 

현봉학은 “함흥에는 기독교인이 많다. 공산당이 점령을 하면 이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며 10군단의 알몬드 소장에게 피란민을 데려가줄 것을 요청했다. 알몬드 소장은 군인과 장비 수송 때문에 피란민 수송이 어렵다며 거절했다. 배에 피란민을 태울 자리도 부족한 데다 10만명이나 되는 피란민을 태우다가는 출항 시간이 늦어져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피란민 속에 간첩이 섞여 들어와 파괴 공작을 펼 위험도 있었다.

그래도 현봉학은 포기하지 않고 철수작전 담당 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긴밀히 협의한 끝에 “철수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도적으로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될 것”이라며 알몬드를 설득했다. 알몬드 입에서 “4,000~5,000명 정도는 데려갈 수 있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봉학은 함흥으로 달려가 “12월 15일 밤 12시까지 기차역으로 나오라”고 주민들에게 알렸다.

수만 명의 사람이 남부여대해 기차역으로 몰려들었으나 기차는 5,000명 정도만 태운 채 새벽녘에 흥남을 향해 달렸다. 기차를 놓친 사람들은 흥남까지 13㎞ 거리를 걸어서 갔다. 날이 밝았을 때 부두는 처참한 모습의 피란민 10만 명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를 본 알몬드 소장은 수천 명만 태우겠다는 당초의 입장을 바꿔 그들을 모두 자유의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왼쪽)과 에드워드 포니 대령

 

영국 기네스본부,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역사상 가장 많은 구조작전을 한 배’로 인정

12월 19일 시작된 피란민 수송에 동원된 선박은 193척의 군함과 민간 상선이었다. 10여 척의 상선 중에는 7,600t급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있었다. 빅토리호의 적정 승선인원은 2,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2월 22일 밤부터 14시간 동안 승선작업을 끝내고 나니 1만 4,000여 명이나 배에 타고 있었다. 그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있었다. 배에 싣고 있던 200t이 넘는 탄약과 500여개의 포탄, 유류 200드럼은 바다에 버려졌다.

빅토리호가 12월 23일 흥남부두에서 떠남으로써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흥남철수작전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빅토리호는 25일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되었다.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그 3일 동안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빅토리호를 포함해 이렇게 함흥에서 탈출에 성공한 피란민은 9만 8,000여 명이나 되었다. 싣지 못한 탄약과 연료는 흥남항만과 함께 폭파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빅토리호를 둘러싼 또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당시 빅토리호 선장은 마리너스 라루(1914~2001)였는데 그는 6·25전쟁 휴전 한 해 뒤인 1954년 가톨릭 수도자가 되었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에서 종신서원한 뒤 평생 수도원 밖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가톨릭 수도사 감소와 재정난으로 뉴튼수도원은 문 닫을 위기에 처했고, 결국 스스로 독일의 베네딕도회 지도부에 공동체 해체를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경상북도 칠곡 왜관수도원에서 지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마리너스 수사는 이 결정 이틀 뒤인 2001년 10월 14일 수사는 세상을 떠났다. 미국의 뉴튼수도원은 지금도 왜관수도원에서 운영 중이다.

오늘날 장진호 전투는 2차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더불어 세계 양대 동계전투로 꼽힌다. 가장 성공적인 철수작전의 사례로 꼽히면서도 세계에 알려진 전투명은 장진호 전투가 아니라 초신호 전투다. 미군이 당시 일본 지도를 갖고 전쟁을 치른 탓에 장진호가 아니라 일본어 표기인 초신호로 불렸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를 기려 미국은 훗날 ‘Chosin(초신)’이라는 이름의 순양함을 진수했다. 빅토리호의 성과에 대해 미국 해사부는 “바다 역사상 단일 선박이 이룬 가장 위대한 구조작업”으로 격찬했고, 미 의회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배에 주어지는 ‘갤런트십’으로 지정했다. 2004년 영국 기네스본부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구조작전을 한 배’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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