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6·25전쟁 10대 장면] ① 6·25전쟁 발발 ② 유엔군 참전

↑ 서울로 진입한 인민군이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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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① 6·25전쟁 발발

 

6·25전쟁은 세계대전이었다. 유엔의 깃발 아래 세계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과 북한, 중국과 소련까지 합하면 참전국이 20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세계대전이었다.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하면 1500년대 근대 국가체제가 형성된 이래 발발한 모든 전쟁 중에서 7번째로 규모가 크고, 연평균 사상자 수로 비교하면 1차, 2차대전에 이어 3번째로 피해 규모가 컸다. 우리는 ‘6·25전쟁’,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은 통상 ‘한국전쟁’으로 부르지만 북한과 중국은 각각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 부르며 자국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73년 전 6·25전쟁이 어떤 맥락 속에서 발발하고 전개되고 종전을 맞았는지 전후사정을 살펴본다.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합작품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면전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스탈린으로서는 북한을 앞세운 대리전을 통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나 미군 일부가 아직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을 의식해 “아직 때가 아니다”라며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주한미군은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1만 6,000여 명 대부분이 철수했으나 제5연대 전투단은 아직 한국에 주둔 중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주저하는 동안 중국에 있는 조선의용군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줄 것을 모택동에 요청했다. 당시 중국에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선의용군 3개 사단 병력이 있었다. 모택동의 승인이 있고나서 조선의용군 5사단과 6사단 병력은 1949년 여름과 가을 북한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12사단은 1950년 3월에 입북했다. 반대로 한국에 주둔 중이던 나머지 미군은 1949년 6월까지 모두 한국에서 철수해 남한에 남은 미군은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뿐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 출범한 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으나 스탈린은 여전히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한미군이 모두 철수하자 1950년 1월 30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테렌티 스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을 만날 용의와 도와줄 의사가 있다”는 뜻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북한 정권의 2인자인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을 설득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하면서도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 공동으로 이뤄져야 하며 만일 중국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스탈린은 5월 14일 모택동에게도 같은 의견을 보냈다. 이는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을 모두 견제하려는 속셈이었다. 김일성이 소련에서 돌아와 그해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모택동에게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뜻을 전달하자 모택동도 김일성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남침이 확정되고 구체화되었다.

전쟁 초기 전황도 (출처 국방부)

 

개전… 군사 전력에서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

부슬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단잠에 빠져 있는 38선 인근의 한국군 부대 막사 위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곧이어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어 거침없이 남하했다. 이에 앞서 새벽 3시 30분쯤에는 북한군이 동해안의 옥계, 삼척, 임원 등 3곳을 기습공격했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군은 6월 25일 당일 서해안의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의정부(6.26), 서울 창동(6.27), 미아리 방어선(28일 새벽 1시)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 김포, 문산, 포천, 춘천, 가평 등이 잇따라 북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군사 전력에서 북한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국군은 9만 4,000여 명에 불과한 반면 북한군은 18만 2,000여 명이나 되었다. 북한의 전투장비 규모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전차도 북한이 200대 이상 보유한 반면 국군은 단 한 대도 없었다. 북한은 전투기를 포함해 항공기가 211대가 있었으나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서울을 향한 북한의 주공(主攻)은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아 3개 방면으로 나뉘어 펼쳐졌다. 제1군단은 의정부와 문산 그리고 한강을 넘어 김포와 영등포로 진격했다.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담당한 조공(助攻) 중 한 방향은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의 동측방을 우회 공격하고 다른 한 방향은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했다. 이에 맞서는 국군의 전방 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가 전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북한의 남침이 있기 하루 전인 6월 24일 0시를 기해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6월 25일 오전 8시 30분, 김일성이 “남한의 도발을 반격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시작한다”며 남한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우리 국민은 38선에서 늘상 있어온 충돌 가운데 하나려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북한 전투기가 서울의 용산 상공에 출현, 총격을 가하고 김포비행장을 폭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포성에 서울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우리 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하고 6월 28일 서울을 내주었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 사수를 약속해놓고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한강 이북의 서울 시민을 사지로 내몰았다. 4만 4,000여 명의 국군도 낙오병 신세가 되었다.

김일성

 

서울 점령 후 북한군이 6일 동안 지체한 것은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의 전술도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북한군은 6월 26일 오후 1시 의정부를 점령한 뒤 서울의 창동을 거쳐 28일 오전 1시에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16㎞를 남하하는 데 36시간이나 걸린 것은 잘못된 도로 선택과 의정부에서 벌어진 북한군끼리의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그들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는 국군의 활약도 컸다. 개성 남쪽에서 한강을 건너 김포·영등포 방향으로 공격하려는 북한군 6사단을 가로막은 것은 한강이었다. 북한군이 보유하고 있는 1개 중대 분량의 도하 장비로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한강 하류를 쉽게 넘지 못했다. 결국 북한군은 김포 쪽에서만 3일을 지체했고, 우리 군이 긴급 편성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선전으로 북한군은 7월 3일에야 영등포에 진출했다. 국군 6사단은 춘천 지역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2사단을 격퇴했다. 이 때문에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출한 뒤 국군의 후방을 치려했던 북한군의 작전은 헝클어졌다.

6·25전쟁의 최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6일 동안 지체한 일이다. 덕분에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북한군이 한강을 건넌 것은 7월 3일이었다. 그들이 전면에 내세운 소련제 T-34 전차는 당시 최강의 전차였다. T-34는 전면 장갑 두께가 79㎜로 당시 우리 국군의 대전차무기에 정통으로 맞아도 끄떡하지 않았다. 국군은 57㎜ 무반동총과 2.36인치 로켓포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소련제 T-34전차와 M72 사이드카 모터사이클 정찰대가 서울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

 

미국의 발빠른 대응으로 일본의 오키나와에 있던 미 제24사단의 선발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고 24사단의 주력부대가 경기 평택~안성선을 최초의 저지선으로 설정했으나 천안 일대의 사단 방어진지마저 단 하루 만에 붕괴되고 전의~조치원 방어선도 쉽게 무너졌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으로부터 “후속  부대인 미 제25사단이 부산에 도착하는 7월 20일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대전을 사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적의 진격을 막았다. 북한군은 7월 20일 새벽 세 방향에서 대전을 공격했다. 미 제24사단은 3.5인치 대전차 로켓포(일명 바주카포)를 쏘며 분전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전투력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사실상 붕괴되다시피 했다. 딘 사단장마저 포로가 되었다.

워커 사령관(왼쪽)과 딘 소장

 

미군의 대전 철수로 급박해진 것은 호남 지역의 상황이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호남 지역을 빠른 속도로 장악했다. 호남 지역 전체를 점령한 북한군은 7월 25일 경남 하동을 거쳐 진주까지 점령했다. 적이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침투할 경우에 대비해 워커 8군 사령관은 미 25사단을 마산 정면으로 돌렸다. 북한군 6사단이 마산 방어선을 뚫고 부산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면 김일성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1950년 7월 말 유엔군은 경상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북한군에 내주었다.

낙동강에 방어선을 친 국군과 유엔군은 한편으로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북한군의 주 병참선은 차단되고 병력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전세가 역전되자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넘고 10월 9일 유엔군이 뒤를 따랐다. 국군은 뒤이어 원산(10.10)과 평양(10.19)을 점령하고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까지 도달했다. 곧 북한 전역을 장악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오면서 유엔군은 다시 수세로 내몰렸다. 중공의 참전은 맥아더 표현대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고 있다.

 

1500년대 이래 전 세계에서 7번째로 사망자 많은 전쟁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는 1·4 후퇴가 시작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선까지 망연자실 후퇴했다. 확전이냐 한국 포기냐의 갈림길에서 미군은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승리’ 대신 ‘휴전’을 선택한 것이다. 중국과 김일성 역시 피해를 감수하면서 전선을 남하시키기보다는 전쟁 전의 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미 정부는 1951년 5월 38선을 기준으로 한 휴전을 공식 정책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무력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에 맹렬히 반대했다. 모든 전쟁 당사국들이 휴전에 동의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의 휴전 반대는 메아리 없는 고독한 외침이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은 11월 27일 “현재 쌍방간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양측의 합의로 대규모 기동전은 멈췄으나 전쟁의 양상이 고지쟁탈전, 수색정찰전, 진지전으로 바뀌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면서도 양측은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구 구성 등에 대해서는 1952년 5월까지 합의를 도출했다. 다만 전쟁포로 문제만은 합의하지 못해 1952년 10월 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한국전쟁의 조기 해결을 공약으로 내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3년 2월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쟁 도발의 주요 당사자인 스탈린도 3월 5일 죽어 조기 종전을 바라는 분위기가 미소 양국 모두에서 고조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았다. 휴전 반대와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국회도 4월 21일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휴전협정 체결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이승만이 이처럼 단호하게 반응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속한 체결을 얻어내기 위한 ‘계산된 전략’이었다. 이승만은 휴전조약 체결 전인 1953년 6월 18일 부산, 대구, 광주,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를 유엔군과 사전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전격 석방함으로써 얼마든지 휴전을 거부하고 그것을 파기할 의사와 능력이 있음을 미국에 확실히 보여주었다. 휴전협정의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반공포로 석방은 종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는 이승만의 승부수였다.

미국이 부랴부랴 월터 로버트슨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한국에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고 이승만도 휴전조약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화답함으로써 휴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비로소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에도 양측은 협정이 발효되는 밤 10시까지 상대방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밤 10시부터 72시간 이내에 현 전선에서 후방으로 2㎞ 물러나는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3년 1개월 2일간을 끌며 250만 명의 남북한 한국인, 40만 명의 중공군, 3만 6,900여 명의 미군 등 모두 3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전쟁이 ‘일시 중지’를 의미하는 ‘휴전’에 돌입한 것이다.

아이젠하워(왼쪽)와 스탈린

 

 

② 유엔군 참전

 

미국과 유엔 지도자들의 대응,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

북한의 전면 남침 사실을 전하는 존 무초 주한 미 대사의 최초 전문이 미 국무부에 전달된 것은 1950년 6월 24일 밤 8시(한국시간 25일 아침 9시)였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을 비롯한 주요 정책결정자 대부분은 교외로 나가 있거나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국무부 당직자로부터 무초의 전문을 전화로 보고받은 후 밤 9시쯤 고향에 머물고 있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한다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장면 초대 주미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6·25 남침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들은 것은 6월 24일 밤 10시 30분쯤이었다. 이 대통령은 “국운이 위급하니 즉시 미 대통령과 유엔에 호소해 구국의 방도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조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을 직감한 장면 대사는 그날 밤 미 국무부로 달려가 유엔 안보리 회부를 논의한 후 바로 군용기 편으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날아갔다. 6월 25일의 안보리에서 장면은 “대한민국이 북한군의 불법공격을 받고 있다”며 유엔의 지원을 호소했다. 6월 26일 오후엔 트루먼 대통령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유엔 안보리에서 한국의 위급함을 호소하는 장면 주미대사(가장 우측)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 시간으로 6월 25일 오전, 한국에 파견되어 있는 유엔 한국위원단으로부터 “전면 침공의 성격을 띤 중대 사태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어 안보리에 상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엔 안보리는 6월 25일 오후 2시에 긴급 소집되었다. 이처럼 미국과 유엔 지도자들의 발 빠른 대응은 지금까지도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전례 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에서 유엔 안보리는 “즉각적인 전투 중지와 38선 북쪽으로 병력 철수”를 촉구하는 미국의 안을 9 대 0으로 채택했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1949년 10월 출범했는데도 중화민국(대만)이 중국 전체를 대표해 총회 안보리 의석을 차지하도록 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며 1950년 1월 30일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우리로서는 천만다행한 순간이었다.

 

트루먼, “미군의 작전 범위는 38선 이북으로 확대하면 안 된다” 명령

안보리의 첫 번째 결의가 있던 6월 25일 밤, 백악관에서도 국가안보회의가 소집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봉쇄선에 대해 소련이 전면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인지 여부였다. 다행히 봉쇄선에 대한 전초전이 아니라는 보고를 받고 “해·공군력 사용을 제한해온 모든 조치를 제거하되 미군의 작전 범위는 38선 이북으로 확대하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는 6월 26일 미군의 징병 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안을 315 대 4로 통과시켰다. 트루먼은 6월 27일 12시쯤, 미 해·공군의 한국 파병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그날 밤 유엔 안보리도 소련, 이집트, 인도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7 대 1로 두 번째 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에서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유엔 회원국에 권고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59개 유엔 회원국가 중 53개국이 이 결의문을 지지했다.

1950년 6월 27일 밤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소련, 이집트, 인도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7개 이사국이 손을 들어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의하고 있다.

 

6월 29일 도쿄에 주둔하고 있는 미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황 파악차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전용기가 수원에 착륙하는 동안 간이활주로 한쪽 끝을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뒤이어 한강 남쪽에서 전황을 살핀 뒤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트루먼이 미 2개 사단 투입을 결정한 것은 6월 30일 오전이었다. 이로써 6·25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서울 남쪽 한강 유역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사령관(1950.6.29)

 

‘스미스 부대’ 도착은 본격적인 미 참전의 시작

가장 먼저 한국에 파견된 미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였다. 500여 명의 보병과 1개 105mm 포대로 이루어진 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의 이름에서 따 ‘스미스 부대’로 불렸다. 부대가 군용기로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 1일 오전 8시 45분이었다. 최초의 미 지상군 부대였고 본격적인 참전의 시작이었다.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군용기를 타고 부산에 도착(1950.7.1)한 후 열차를 타고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대장의 이름에서 따 ‘스미스 부대’로 불렸다.

 

대전을 거쳐 북상한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맞딱뜨린 곳은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이었다. 하지만 첫 전투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탓에, 그리고 스미스 부대가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고 대전차 화기도 낡아빠진 바주카포가 전부였던 탓에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완벽한 패배로 끝났다. 540여 명의 부대원 중 150여 명이 전사하고 31명이 실종되었다. 3년간의 전쟁 중 머나먼 이국 땅에서 죽어간 3만 6,940명의 미군 중 첫 희생자였다.

소련제 탱크 T-34

 

7월 7일 유엔 안보리가 유엔의 깃발 아래 미국이 통솔하는 통합사령부 설치에 관한 세 번째 결의안을 7 대 0으로 채택했다. 트루먼은 유엔의 결의를 받아들여 7월 8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를 유엔 통합군사령관에 임명했다. 7월 14일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와 같은 적대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이라는 단서조항을 붙여 ‘한국군에 대한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한다’는 이른바 ‘대전협정’을 일본에서 한국전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맥아더 유엔 통합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이후 전 세계 16개국의 군대가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를 위해 속속 몰려들었다. 전투부대를 파병한 미국,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터키, 룩셈부르크, 그리스, 남아공,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콜롬비아, 태국, 필리핀 등 16개국은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우방국이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부 건물 옥상에서 조셉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기를 전달받고 있다.(1950년 7월 14일)

 

☞ 클릭! ① 6·25전쟁 발발  ② 유엔군 참전
☞ 클릭! ③ 워커 라인 설정과 다부동 전투 ④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 클릭! ⑤ 국군·유엔군의 38선 돌파와 중공군 참전 ⑥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 클릭! ⑦ 중공군·북한군의 총공세와 1·4 후퇴 ⑧ 포로교환협정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
☞ 클릭! ⑨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⑩ 빨치산 대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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