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66년 : 그레고어 멘델, 유전 법칙 증명한 ‘식물의 잡종 연구’ 논문 발표

 

‘유전법칙의 선구자’로 생물학사에 길이 남아

그레고어 멘델(1822~1884)은 ‘유전학의 원조’로 불린다. 다만 1865년과 1866년 ‘멘델의 유전법칙’을 정리해 발표했는데도 30여 년 동안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1900년에야 연구 업적이 재발견되어 그때부터 ‘유전법칙의 선구자’로 생물학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멘델은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현재 체코령)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 1843년 모라바의 브륀(지금의 체코 브르노)에 있는 성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들어가 184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학구적인 태도를 인정받아 1851년 빈대의 청강생으로 들어가 2년 동안 자연과학의 기초를 쌓고 찰스 다윈의 학설을 접했다. 교사가 되고 싶어 자격시험에 계속 응시했으나 연거푸 낙방해 결국 교사의 꿈은 접어야 했다.

대신 멘델은 다윈의 진화론이 실제로 일어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1856년 수도원 정원에 완두콩을 심어 관찰을 시작했다. 완두콩은 성장 주기가 짧을 뿐만 아니라 종자가 많고 정원이나 온실에서도 잘 자라 실험에는 적격이었다. 멘델은 2년 가까이 완두콩을 길러 두드러진 형질을 지닌 순종 가계를 만들었다.

그가 선택한 대립형질은 7가지였다. 콩 껍질 색(매끄러운 회색 / 주름잡힌 흰색), 콩 속의 색(노란색 / 녹색), 줄기 길이(긴 것 / 짧은 것), 꽃잎 색(흰색 / 붉은색), 콩깍지 색(노란색 / 녹색), 콩깍지 모양(매끈한 깍지 / 주름잡힌 깍지), 꽃 피는 자리(가지 사이 / 꼭대기) 등이다.

멘델이 먼저 노란색 완두 순종과 녹색 완두 순종을 교배했더니 늘 노란색 완두콩만 나왔다. 왜 녹색 완두가 안 나오는지가 궁금해 잡종 1세대(F1)인 노란색 완두콩끼리 교배했더니 이번에는 노란색과 녹색 완두가 섞여 나왔다. 결국 멘델은 순종의 부모를 교배했을 때 첫 번째 후손인 잡종 제1대(F1)에 나타난 형질을 ‘우성’이라 하고, F1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다음 세대(F2)에 나타나는 형질을 ‘열성’이라고 정의한 뒤 F1에서 우성형질만 나타나는 현상을 ‘우열의 법칙’이라고 정리했다.

 

“전 세계가 곧 가치를 알게 될 것” 유언 남겨

이후 수많은 실험 끝에 잡종 1세대의 완두를 교배하면 잡종 2세대에서는 우성과 열성의 비율이 3대1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특정의 형질적 특징을 나타내는 유전인자들은 쌍을 이루는데, 이들은 부모로부터 각기 하나씩 유전된 것이며 생식세포가 형성될 때는 쌍을 이루고 있는 인자들이 서로 분리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이 ‘분리의 법칙’이다.

마지막으로 ‘완두콩 색깔’과 ‘완두콩 형태’라는 두 가지 형질이 있다면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을 각각 지키면서 독립적으로 유전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7가지 대립형질이 다른 형질에 대해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두고 ‘독립의 법칙’이라고 정리했다. 멘델은 이렇게 1863년까지 8년 동안 완두콩을 225번 교배해 1만 2,000여 종의 완두를 얻어 ‘멘델의 유전법칙’을 완성했다.

실험 결과는 1865년 2월 브륀에 있는 자연과학협회에서 ‘식물의 잡종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1866년 3월에는 자연과학협회지에 논문이 게재되었다. 멘델은 논문을 40여 부 제작해 관련 대학이나 연구소에 보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유전 현상은 알려져 있었으나 유전 물질은 액체와 같이 서로 섞여서 전달된다는 혼합유전설이 지배적이었다. 멘델이 대학이나 연구소에 소속된 유명 과학자가 아니라는 점도 냉대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당시의 생물학 연구는 자세히 관찰한 결과를 기록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문가는 멘델이 논문에 소개한 복잡한 통계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찰스 다윈도 자신의 진화론에서 설명하지 못한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 멘델의 논문을 받았으나 포장을 뜯어보지도 않았다.

이처럼 학계의 냉대를 받으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가운데 멘델은 1868년 3월 종신 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멘델은 연구는 제쳐둔 채 수도원 운영에만 힘을 쏟아부으며 약자는 보호하고 부당한 간섭에는 저항했다. 체코의 혁명 동지들을 종종 수도원에 숨겨주다 비밀경찰의 의심을 받았으며 1874년 오스트리아 의회가 수도원에 세금을 징수하는 법률을 제정했을 때는 10년간 철회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멘델은 직무에 전념하며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하지 않고 1884년 1월 6일 눈을 감았다. “나는 내가 이룬 과학적 업적에 대단히 만족한다. 틀림없이 전 세계가 곧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는 유언만이 그가 옳았음을 증거해주고 있다.

 

1900년은 ‘멘델 유전법칙 재발견의 해’

멘델의 죽음과 함께 사장되어 있던 멘델의 논문이 새삼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이었다. 네덜란드 식물학자 휘호 더프리스가 어느 날 유전 관련 자료들을 훑어보던 중 도서관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와 똑같은 내용이 실린 멘델의 논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프리스는 1900년 3월 자신의 논문을 식물학회에 보고하고 4월 학회지에 게재하면서 자신의 연구 논문 각주에 멘델의 실험 결과를 명기했다. 다만 파리의 아카데미 4월호에 논문을 게재할 때는 멘델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독일의 식물학자 카를 코렌스로부터 더프리스에게 편지가 왔다. 자신은 1년 전 ‘완두콩과 옥수수의 실험’으로 한 연구 결과를 얻었는데 멘델의 논문이 자신의 연구 결과와 같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의 연구와 발표를 포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아카데미 4월호에 실린 더프리스의 논문에 멘델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코렌스는 멘델의 연구 결과를 관련 학회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잡종의 자손 행동에 관한 멘델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 독일 식물학회지 5월호에 게재했다. 그 무렵 오스트리아의 에리히 폰 체르마크도 자신의 연구 결과를 멘델의 논문과 덧붙여 오스트리아 농학잡지 6월호에 발표했다.

이로써 1900년 2~3개월 동안 멘델의 법칙이 관련 학회지에 연이어 소개되는 묘한 일이 일어났다. 관련 학계에서는 같은 해에 무려 3명의 생물학자가 같은 내용을 잇달아 발표하자 그때서야 “멘델의 법칙이 무엇인가”, “멘델이 누구인가”라며 떠들썩한 관심을 보였다. 이로써 1900년은 ‘멘델 유전법칙 재발견의 해’가 되었다. 이후 유전학은 멘델의 법칙을 기본으로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발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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