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신흥강습소’, 중국 길림성에 설립… 군사교육 포함한 교육기관으로 출범했다가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한 뒤부터는 독립군 양성 전문 교육기관으로 변신

↑ 1947년 10월 19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신흥학우단의 복원 모임을 한 뒤 성재 이시영(앞줄 가운데 흰옷 입은 이)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우당기념관)

 

근대 교육과 군사교육 실시하는 교육기관

신민회는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비밀결사였다. 1907년 4월 창립되었다. 양기탁이 총감독, 이동녕이 총서기, 전덕기가 재무, 안창호가 집행을 맡았다.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과 민족산업 진흥 그리고 계몽 강연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 병탄이 노골화하자 애국 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1910년 3월 양기탁의 집에 모여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독립전쟁 전략이란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동삼성 국경 인접 지대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토지를 매입하고 조선인들을 단체 이주시켜 신한민촌을 만든 뒤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장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신민회가 처음 목표한 곳은 황무지가 대규모로 펼쳐 있는 만주 길림성 밀산현 관내 봉밀산자 일대였다. 당시 그곳에는 한인들의 마을이 드문드문 있었다. 한인들은 몇 가구씩 모여 개간 사업을 벌이며 정착을 꾀했지만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유목민 수준을 넘지 못했다. 1909년 여름,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중심 인물은 헤이그 특사 사건(1907년)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상설, 그곳 한민회장 김학만, ‘해조신문’의 주간 정순만, 유학자 이승희 등이었다.

이승희가 앞장서 토지를 사들이고 개척을 시작했다. 이승희는 1909년 가을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자 근처의 토지를 사들이고 장차 북만주의 독립운동 기지가 될 ‘한흥동’을 건설했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승희는 을미사변 이래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상소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08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 영남 출신의 유학자였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머물면서 그곳을 민족 부흥의 터전으로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그곳 민족운동가와 한인의 힘을 모아 자금을 조달하고, 수시로 한흥동을 왕래하면서 격려했다. 미국의 국민회도 모금 운동을 전개해 자금을 지원했다. 한흥동 주민들은 1910년대 초 ‘밀산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일어난다는 ‘흥(興)’자를 합친 것

한편 신민회 간부들 중 이동녕·이회영·주진수 등은 1910년 8월 조선이 패망하자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한흥동과 별개로 독립운동 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1910년 12월에는 양기탁·안태국·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이 참석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계획을 구체화했다. 요지는 ‘만주에서 영토를 구입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한다’와 ‘집단으로 이주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주민 모집과 자금 확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회영·이시영 6형제를 위시해 이동녕·이상룡·김창환·주진수 등의 선발대는 그들의 가족을 이끌고 1910년 말부터 1911년 봄까지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했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영양·봉화·예안·안동·영해 등지에서도 1912년 9월까지 1,092명이 망명·이주했다.

이동녕·이회영·이상룡 등 신민회 간부들은 1911년 5월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토지 개간과 농업 경영으로 한인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한인 자치기구로 ‘경학사’를 조직했다. 경학사란 실업을 의미하는 ‘경(耕)’과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한다는 의미의 ‘학(學)’을 합친 말이다. 경학사 사장에는 이상룡, 내무부장에는 이회영, 재무부장에는 이동녕이 선임되었다. 경학사는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구국 단체 역할도 했다.

경학사는 1911년 6월 10일 삼원보 추가가에 근대 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창설했다.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일어난다는 ‘흥(興)’자를 합친 것이다. 무관학교라고 하지 않고 강습소라고 한 것은 토착 만주인의 시선과 만주 군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교장은 이동녕이 맡아 40여 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던 중 경학사는 현지 동포들이 국내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수토병이라는 괴질로 큰 피해를 보고 큰 흉년까지 들어 1911년 가을 해체되었다.

그후 동포들은 1912년 7월 인적이 드물고 요새로도 손색이 없는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 집단촌을 재정비했다. 토지를 매입하고 신흥강습소 본관을 건립하는 데 들어간 경비는 이회영·시영 6형제의 둘째 이석영이 국내 소유 전답을 매각한 자금으로 충당했다. 1912년 가을에는 경학사를 대신할 자치단체 조직으로 ‘부민단’을 결성했다. 초대 총장에는 허위의 형인 허혁이 추대되었고 이상룡이 그 뒤를 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공 세워

부민단의 표면적인 사업은 재만 한인의 자치 담당, 재만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 해결, 재만 동포들을 대신해 중국인 또는 중국 관청과의 분쟁 사건 처리, 재만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 민족교육 실시 등이었으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독립전쟁 준비였다. 부민단은 1913년 신흥강습소를 ‘신흥학교’로 개명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신흥학교에는 4년제 중학 과정의 본과가 있었고, 6개월 과정의 장교반과 3개월 과정의 하사관반이 있었다. 졸업생들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에 배치되어 대일 투쟁에 나서거나 만주 지역의 각 학교에 교원으로 배치되어 건학 정신에 따라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졸업생들은 1913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흥학우단’을 조직했다. 처음에는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을 가진 ‘다물’의 이름을 따 ‘다물단’이라고 했다가 ‘신흥학우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은 1914년 길림성 통화현 백두산 서쪽 산기슭 사방 200리에 위치한 통화현 팔리초 소백차에 독립군 군영인 ‘백서농장’을 건설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백서’는 백두산 서쪽에 위치해 붙여졌고, ‘농장’은 중국 당국의 이목을 의식해 지어졌다.

신흥학교는 애국 청년이 국내에서 몰려들어 600여 명으로 늘어나자 1919년 5월 유하현 고산자로 교사를 옮겨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하고 독립군 양성 전문 교육기관으로 변신했다. 통화현 쾌대모자, 임강현 토애, 해룡현 성수하자에는 분교를 두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만주 지역 내 독립군 토벌 강화와 마적들의 습격 사건 등으로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2,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폐교 후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은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의열단·광복군 등 수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대한독립군단 창설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 참변’ 때는 이 학교 출신 독립군들이 많은 죽음을 당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주요 간부들로는 김법린 전 문교부 장관, 변영태 전 국무총리, 송호성 초대 국방경비대 사령관, 이범석 전 국무총리, 오광선 광복군 국내지대장 등이 있고 공산주의자 중에는 김원봉 의열단장과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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