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회영·이시영 6형제 만주로 망명

↑ 우당 이회영과 함께 6형제가 모여 망명을 의논하고 있는 그림(출처 우당기념관)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세우기 위해 결행한 혹한의 만주행

이회영·시영 등 6형제와 그들의 가족 등 60여 명을 태운 10여 대의 마차가 야심한 밤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엄동설한이던 1910년 12월 하순이었다. 그것은 4개월 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분통해하며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세우기 위해 결행한 울분의 만주행이었다.

6형제는 이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으로, 10대조인 이항복이 영의정을 지낸 이래 이조판서를 지낸 부친 이유승까지 정승·판서만 9명을 배출한 명문 집안의 후손이었다. 명문가의 6형제 가족 모두가 항일 투쟁을 위해 해외로 집단 망명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망명을 주도한 것은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창립회원인 넷째 이회영(1867~1932)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적자와 서자 차별을 철폐했다.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백부)의 양자로 입양해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의 가옥과 부동산을 급하게 팔아 독립 자금으로 쾌척했다. 다른 형제들 역시 서울 명동에 널려있는 각자의 가옥과 땅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다. 이 자금은 만주 길림성 통화현 등지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건립에 쓰였다.

6형제가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한 것은 1911년 1월이었다. 현지 중국인들은 집단 망명에 의혹을 품고 그들의 정착을 방해했다. 중국 군인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집을 수색했다. 이회영은 북경의 원세개 총리대신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일개 망명객이 일국의 총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원세개가 조선에 주둔할 때 아버지 이유승의 집에 들르는 등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원세개의 지시에 따라 회인·통화·유하현의 세 현장들이 “조선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행정 지침을 내리고서야 형제들은 비로소 추가가에 정착했다.

 

6형제 가족 모두가 집단 망명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 없어

이회영은 1911년 5월 동생인 이시영(1869~1953)을 비롯해 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협의해 유하현 삼원보 고산자에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했다. 표면적으로는 재만 한인의 자치단체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민족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1911년 6월 10일에는 옥수수를 저장하는 빈 창고에 경학사의 산하단체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토착 만주인의 시선과 만주 군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라고 하지 않고 강습소라고 칭했지만 1912년 7월 인적이 드문 통화현 합니하로 강습소를 이전한 뒤에는 ‘신흥학교’로,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다.

이회영은 자금 모집을 위해 1913년 국내로 잠입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난 적도 있었다. 1918년에는 국내에서 고종을 해외로 빼내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회영이 상해에 머물고 있을 때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취하면 정부 내의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내분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며 임시정부 설립에 반대했다. 그래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선택한 것이 아나키즘이었다. 형과 달리 다섯째 이시영은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총감으로 임명되어 임정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회영이 상해를 떠나 북경에 거처를 정했을 때 조완구·김규식·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이회영·김창숙·신채호 3인은 북경의 독립운동 3거두로 불렸다. 이회영은 북경에서 유자명 등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당시 아나키즘은 나라 빼앗긴 선각 지식인들의 사조였다.

1928년 조선·중국·대만·베트남 등 7개국 대표들이 중국 천진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할 때는 신채호 등과 함께 조선의 대표로 참가했다. 1929년에는 상해에서 백정기·정화암 등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또한 흑색공포단에도 가담했는데, 흑색공포단은 항일구국연맹의 산하단체로 중국 내 일제 요인 처단, 일제 기관의 건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행동 단체였다. 단원들은 1931년 복건성 하문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했다.

 

6형제 중 5형제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중국에서 눈 감아

이회영은 만주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상해에서 대련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가 조선인 배신자의 밀고로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932년 11월 17일 옥사했다. 이회영의 옥사 후 흑색공포단원 중 백정기·원심창·이강훈 세 의사는 1933년 3월 중국을 방문한 일본 공사를 처단하려다 계획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백정기 의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원심창·이강훈은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출옥했다. 6형제 중 막내 이호영은 1924년 북경한교동지회를 결성하고 1925년 다물단 단원으로 친일 조선인 처단 의거에 참여했다. 1926년엔 거액의 자금과 폭탄을 다물단에 지원했다.

고국을 떠난 6형제 중 이시영을 제외한 5형제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굶주림과 병과 고문으로 중국에서 눈을 감았다. 첫째 이건영은 1940년 중국에서 사망하고 둘째 이석영은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쏟아부은 후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다 1934년 상해에서 굶어 죽었으며 셋째 이철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뒤 1925년 병사했다. 여섯째 이호영은 1933년 북경에서 일가족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6형제의 자식 대부분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거나 병사했다. 이건영의 둘째아들 규면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 병사했고 셋째 규훈은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공군으로 복무하던 중 6·25 때 실종되었다. 이석영의 장남 규준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이회영의 둘째아들 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하고 셋째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다.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부통령직을 사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이시영은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을 신흥전문학원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세우고 이를 확대한 신흥대학을 1949년 3월 20일 인가받아 개교했다. 신흥대학은 초기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1949년 7월과 1950년 5월 각각 1회와 2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결국에는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1951년 5월 대학의 소유권을 조영식에게 넘겼다. 조영식은 학교를 1953년 12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전하고 1960년 경희대로 개칭했다.

해방 후 6형제 모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6형제의 아들 중 4명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6형제 가문에는 독립유공자가 10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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