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상룡, 대가족 인솔해 만주로 망명

↑ 이상룡과 임청각

 

의병의 한계를 절감하고 구국 계몽운동으로 방향 틀어 

이회영 등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이상룡(1858~1932)은 경북 안동의 유림 명문가 자제로 99칸 대저택인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안동에서 학문을 쌓아 유학자로 활동하면서도 군사학을 연구해 병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감’을 저술했다. 화살을 연이어 발사하는 재래식 무기도 개조해 더욱 빠르게 화살이 날아갈 수 있도록 했다.

1895년 민비 시해를 계기로 외숙인 권세연이 1896년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의병을 지원해 행동하는 척사 유림의 면모를 보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인 1908년에는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하도록 자금을 제공했으나 가야산 산중에 기지를 구축하고 장정을 모으는 과정에서 기밀이 새 나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다.

이상룡은 의병의 한계를 절감하고 구국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1909년 2월 안동경찰서에서 한 달여 동안 신문을 받고 석방된 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으로 민족 자강 운동에 앞장섰으며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칠 ‘협동학교’를 설립했다. 대한협회 안동지부는 설립 몇 달도 안 되어 수천 명이 가입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고 서양의 근대사상과 제도를 소개했다.

한일합방으로 울분을 삼키며 두문불출하고 있던 1910년 11월 신민회의 이동녕과 양기탁이 밀사를 보내 이상룡의 참여를 타진했다. 만주 벌판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워 무장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침략자를 몰아내자는 제안이었다. 그것은 52세 나이에 선택한 형극의 길이었다. 이상룡은 곧 가산 정리에 들어갔다. 제사와 친척들의 생활을 위한 논밭 일부만 남겨두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했다. 노비 문서도 불태웠다. 가까운 일족과 동지들에게도 동행을 권유해 수십 명이 동참했다.

 

독립군의 군세 확장에 혼신의 힘 쏟아

이상룡은 1911년 1월 5일(음력)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서 조상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단신으로 신의주에 먼저 도착해 20일간 전후 사정을 살피고 있을 때 아들 준형과 동생 봉희 등 일행이 신의주에 도착했다. 대가족은 1월 27일 썰매 수레를 타고 얼어 있는 압록강을 건넜다. 이상룡은 국경을 넘으며 느낀 비통한 감회를 시로 남겼다. ‘칼날보다 예리한 저 삭풍 / 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 내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리.’

이상룡의 대가족은 안동(현재의 단동)을 거쳐 새 삶의 터전인 서간도로 향했다.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한 뒤에는 이시영·이동녕 등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한인사회 건설과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주력했다. 이름은 이상희에서 이상룡으로 개명해 새 출발을 다짐하고 황무지 개간과 농업경영을 통한 경제 자립 실현을 위해 설립한 ‘경학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1918년 11월(음력)에는 만주·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1 운동의 여파로 거족적인 만세 운동이 펼쳐지고 있던 1919년 4월에는 서간도 각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을 삼원보로 불러 ‘한족회’를 결성했다. 한족회는 이상룡의 주도 아래 무장투쟁을 주도적으로 지휘할 ‘군정부’를 설립한 뒤 이상룡을 총재로 추대했다. 하지만 곧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상룡은 두 개의 정부를 둘 수 없다며 1919년 11월 한족회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표격인 독판으로 추대되었다. 해외 독립운동 단체 중 최대 규모인 서로군정서는 1920년 5월 본격적으로 무장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대병력이 만주로 쳐들어왔을 때는 북간도 독립군과 연합해 청산리대첩의 쾌거를 이뤄냈다.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으로 활동

이상룡은 1922년 6월 만주 지역의 각기 다른 독립군 조직을 묶어 서로군정서를 ‘통군부’로 확대 개편하고 이후에도 통군부와 17개 독립운동 단체를 또다시 합쳐 ‘통의부’를 결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 확장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25년 3월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박은식은 임시정부 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이상룡을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으로 지명했다.

이상룡은 김좌진, 오동진, 김동삼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하게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를 기대했으나 국무위원들은 창조파와 개조파, 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분열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상룡은 결국 1926년 2월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와 의정부, 신민부, 참의부의 통합에 심혈을 기울이다 1932년 5월 12일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국토를 찾기 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서거했다.

유해는 광복 후 45년 만인 1990년 9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상룡의 아들 준형은 국내로 돌아왔으나 1942년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할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 생을 마쳤다.

이상룡의 가문은 독립운동가 허위의 가문과 혼인으로 맺어진 사돈지간으로도 유명하다. 이상룡의 손녀와 허위의 아들이 혼인을 하고 이상룡의 손자와 허위 사촌의 손녀가 결혼했다. 허위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을 때 의병을 조직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저항한 의병 지도자였다. 서울 탈환 작전 등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상룡 집안은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허위 가문에서도 4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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