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신민회 ‘독립전쟁 전략’ 채택

실력 양성에서 독립군 양성으로 전환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방식에는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운동 두 가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애국 계몽운동은 민족의식 고양, 민족경제 육성, 민족문화 발전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는 민족의 실력 양성 운동이었다.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한 단체들은 전국에 산재했으나 전국적 규모로는 합법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대표적이었다. 대한자강회는 1906년 3월 창립되어 1년 반 동안 활동하다가 1907년 8월 강제해산되었다. 그 취지를 계승·조직한 것이 1907년 11월 창립되고 1910년 8월 한일합병 후 해체된 ‘대한협회’다.

신민회는 재미 동포들의 구국 의지에서 발원했다. 안창호·이강·임준기 등 재미 애국지사들은 1906년 말~1907년 초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조국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한 뒤 이 단체를 조국에 조직하기 위해 안창호를 국내에 파견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서울에 도착, 애국 계몽운동을 펼치고 있는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 등과 함께 1907년 4월 신민회를 비밀리에 창립했다. 양기탁이 총감독, 이동녕이 총서기, 전덕기가 재무, 안창호가 집행을 맡았다. 전국 각지의 애국 계몽운동가들도 골고루 참여해 이회영·시영 형제, 노백린·김구·신채호·최남선·이상재·이승훈 등이 발기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핵심 세력은 크게 5개 집단이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종사했던 언론계 인사,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한 기독교계 인사, 평안도 일대에서 상공업에 종사한 실업계 인사, 무관 출신 집단, 안창호가 미국에서 창립한 공립협회 회원 등이다. 궁극적 지향점은 국권 회복 후 군주제 폐지와 공화제 도입이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획기적인 구상이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애국 사상이 투철하고 국권 회복에 헌신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인물을 엄선해 회원으로 입회시켰다. 입회 후에도 횡적으로는 동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러다보니 회원 수가 1910년 기준 800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창립 후 당면 목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이었다. 민족의 실력 없이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은 먼저 교육 구국 운동으로 나타났다. 1907년 12월 이승훈의 오산학교(평북 정주), 1908년 9월 안창호의 대성학교(평남 평양) 설립은 구체적 실천이었다. 회원 개개인이 세운 학교도 100여 개나 되었다.

 

창립 후 당면 목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신민회는 민족자본 확보와 민족산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족산업 진흥 운동도 펼쳤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자기의 진출을 막고 고려자기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평양에 자기회사를 설립했다. 평북의 협성동사와 상무동사, 평양의 조선실업회사, 황해도 안악의 소규모 방직공장과 연초공장도 설립하고 황해 사리원에는 모범 농촌을 구상했다. 애국계몽을 위한 출판물 보급에도 나서 평양·서울·대구에 태극서관을, 황해도 안악에 면학서관을 설립했다.

활동 중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것은 대중을 상대로 한 계몽 강연이었다. 그들은 강연을 통해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신사상·신지식·신산업 계몽, 구습 타파, 교육 구국 운동, 학교 설립, 자발적 의무교육 실시, 실력 양성 호소 등을 고취했다. 1909년 8월에는 ‘청년학우회’를 창립해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청년학우회는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단체임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국권 회복 운동단체로 활동했다.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는 이 모든 활동을 알리는 기관지요 총본부로 활용되었다.

그러던 중 일제의 조선 병탄이 노골화하자 애국 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해외 독립군 기지 창설 운동을 전개했다. 의병 활동 쇠퇴기이던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만주 지역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기로 의결했다. 이를 추진하던 중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 등 다수 신민회 간부를 구속함으로써 신민회 사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다행히 일제가 신민회의 존재를 알지 못해 신민회 간부들은 2~3개월 뒤 풀려났다.

신민회는 중단했던 사업을 재개했다. 1910년 3월 양기탁의 집에서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독립전쟁 전략이란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동삼성 국경 인접 지대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신민회가 모금한 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하고 조선인들을 단체 이주시켜 신한민촌을 만들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이다. 이로써 신민회의 구국 운동은 실력 양성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만주 이민과 독립군 양성으로 전환되었다.

 

만주에 ‘경학사’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

신민회는 결정을 실천하기 위해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 등을 만주와 러시아령으로 망명하게 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패망한 뒤에는 다른 신민회 간부들도 애국 계몽운동이 더 이상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독립군 기지 창설을 구체화하기 위해 해외 망명을 추진했다. 이동녕과 이회영 등은 1910년 9월부터 11월까지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1910년 12월 중순 양기탁·안태국·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은 다시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계획을 구체화했다. 결론은 ▲일제의 총독부에 맞서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는 총감을 두어 비밀리에 나라를 다스려 독립 정치를 한다.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서간도 통화현 부근에 영토를 구입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한 뒤 ‘적절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한다. ▲신민회 각 도 대표로 경기도와 삼남에 양기탁,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등을 선정한다 등이었다. ‘적절한 시기’란 장차 일제가 더욱 팽창해 러시아, 중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때를 의미했다.

이후 서간도 이주민 모집 사업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선발대 격으로 서울의 명문가 출신인 이석영·회영·시영 등 6형제 가족과 이동녕·주진수 가족 등이 1910년 12월 하순부터 1911년 1월까지 개별적으로 이주했다. 경상도 안동의 명문가 집안 출신의 이상룡도 수십 명의 식솔을 이끌고 1911년 초 압록강을 건너 합류했다.

이들은 만주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자리를 잡았다. 1911년 4월 황무지 개간과 농업경영을 통한 경제 자립 실현을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관 양성 기관으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경학사의 초대 사장에는 이철영(2대 사장은 이상룡)이 추대되었고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이 취임했다. 만주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1910년 12월 ‘안악사건’과 1911년 말 ‘105인 사건’이 터져 신민회 간부가 대거 검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국내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고 독립전쟁 전략은 큰 장애에 부닥쳤다.

그럼에도 신민회는 최초의 독립군 기지인 신흥강습소 외에 1913년 만주 왕청현 나자구 대전자에 두 번째 독립군 기지 동림무관학교(대전무관학교)를 세우고 만주 밀산현 봉밀산자에 제3의 독립군 기지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해 몇 년 후 있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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