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최배달 ‘국제가라테연맹 극진회관’ 발족

↑ 최배달이 32살이던 1954년 지바현 영화 촬영장에서 웃통을 벗고 맨손으로 소와 격투를 벌이고 있다.

 

무도인이면서도 책을 많이 쓴 것으로 유명

공수도 즉 ‘가라테’는 일본의 전통 무술이 아니다. 수기(手技) 위주였던 중국 무술 ‘남권’이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가 토착 무술과 합쳐치고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 때 일본 본토에 처음 소개되어 체계화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20년대 말에서야 일본의 무술로 인정을 받았으나 유도의 그늘에 가려 비주류 무술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 후 비로소 일본 무술의 주류로 떠올랐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한국인 최영의(1923~1994)의 역할이 컸다.

최배달로 알려진 최영의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14살이던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항공기술학교에 다니며 가라테에 입문하고 1947년 9월 ‘전일본가라테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 기염을 토했다. 최영의는 진짜 실전무술을 완성하기 위해 1948년 4월 지바현의 기오즈미산에 입산해 홀로 정진했다. 1년 8개월 동안 산속에서 고독과 싸우고, 넘치는 젊음의 힘을 자제하는 인내를 터득했으며, 바윗돌을 깨기 위해 모진 고통을 감내했다.

하산 후 그는 일본 전역을 돌며 이름난 고수들을 차례로 격파해 ‘열도 최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950년 11월에는 연이어 수십 마리의 황소와 대결, 47마리의 황소 뿔을 꺾어 쓰러뜨리고 4마리는 즉사시켰다. 1952년 3월 건너간 미국에서는 32개주를 순회하며 270여 회의 시범을 보이고 7회에 걸쳐 TV에 출연했다. 당시 동양인으로는 큰 체구(175cm, 83㎏)였으나 서양인의 눈에는 작아 보였던 최영의가 돌덩이를 격파하고 나란히 세운 맥주병의 병목을 깨는 모습에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최영의가 일본에 자신의 첫 도장인 ‘대산도장’의 간판을 내건 것은 1954년 4월이었다. 1956년 6월에는 오래된 발레 스튜디오를 빌려 ‘대산도장’의 규모를 키웠다. ‘대산’은 그의 일본어 이름인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동남아시아, 미국, 중남미, 유럽 등지를 순방하며 쿵후, 복싱, 프로레슬링, 무에타이 고수 등 그 지역의 격투기 강자들과 각종 실전대결을 벌여 한 차례도 패하지 않는 무술실력을 과시했다.

그가 세계를 누비며 대결을 펼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자신이 무도의 최강자임을 다른 사람이 인정해야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극진 가라테(極眞空手)’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고, 가라테와는 다른 격투기와 겨뤄봐야 새로운 기술을 터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최영의는 당시 일본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역도산(1924~1963)과도 절친하게 지냈으나 1954년 12월 그가 평소 존경하고 형이라 부르던 ‘일본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를 역도산이 처참하게 쓰러뜨린 후에는 역도산과 관계를 끊었다.

 

“실전이 아니면 진정한 강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최영의는 무도인이면서도 책을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58년 1월 영문으로 출판한 ‘가라테는 무엇인가’는 전 세계적으로 50만 부가 팔렸다. 1965년 3월 펴낸 ‘이것이 가라테다’는 해적판이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으로 17만 부나 팔렸다. 그는 생전에 모두 62권의 책을 냈다. 대부분이 무술과 관련된 책이지만 그 중에는 일본 사회를 비평한 책들도 있다.

최영의는 1962년 귀화해 진짜 ‘오야마 마스타쓰’가 되었다. 이름을 ‘배달(倍達)’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사정이 있었던 선택으로 보인다. ‘최배달’이라는 이름은 부모의 성 ‘최’에 일본어 이름 ‘배달’을 합한 것이다. 최영의는 가라테를 전 세계에 보급하는 데 일등공신이었으나 그가 보기에 공격 동작을 공격 부위 직전에 멈춰야 하는 가라테는 진정한 무술이 아니었다. “실전이 아니면 진정한 강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최영의의 신념은 그로 하여금 ‘극진 가라테’를 창안케 했다. ‘극진 가라테’는 상대방의 얼굴과 음낭을 제외하고 어느 부위든지 가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가라테와는 달랐다. ‘극진 가라테’는 ‘실전주의 가라테’라는 슬로건답게 기본기를 익힌 뒤 곧바로 대련을 통해 수련을 쌓는다. 방호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은 채 주먹과 발길질을 해야 하는 ‘극진 가라테’의 경기는 그래서 격투기 중 가장 격렬하다.

최배달은 1961년 극진회를 설립하고 1963년 10월 도쿄에 극진회관 총본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1964년 4월 ‘국제가라테연맹 극진회관’을 창설해 훗날 일본의 총리가 될 사토 에이사쿠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1964년 6월에는 극진회관 총본부가 준공되어 국제가라테연맹 극진회관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969년 9월에는 총 48명의 가라테 선수가 참가한, 직접 타격에 의한 제1회 ‘전일본가라테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극진회 문하생이 우승과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1975년 11월에는 세계 36개국 128명의 선수가 참가한 제1회 ‘전세계가라테선수권대회’를 개최해 극진 가라테의 국제화를 시도했다.

최영의는 1990년대 초 극진 가라테를 배우는 일본인이 50만 명 정도 되고, 세계적으로도 130개국 지부에 총 1200만 명의 문하생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스페인의 카를로스 국왕, 007 시리즈로 유명한 영화배우 숀 코너리도 있다고 했다. 1994년 4월 그의 사망 후 “최배달은 전 세계의 고수와 싸워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더 많이 회자되지만 그보다는 “일본이라는 무대에서 한국인이 ‘무도일문(武道一門)’을 창업했다”는 사실에 더 중요한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만화 ‘바람의 파이터(방학기 작)’ ‘대야망(고우영 작)’을 통해 국내에서도 유명했다. 일본에선 ‘전설의 무도인’ ‘위대한 영웅 10걸’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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