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준경묘’를 아십니까… 강원도 삼척 깊은 산속의 넓은 평지와 묘지를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답니다.

↑ 준경묘 원경(遠景). 수평적으로는 넓은 평지, 수직적으로는 높게 뻗어있는 금강송 군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by 김지지

 

가파르지만 길이 고즈넉해 마음이 차분해진다

강원도 삼척 두타산에 간다니까 대학 친구 희용이가 꼭 ‘준경묘(濬慶墓)’에 다녀오란다. 깊은 산 속에 엄청나게 넓은 평지와 커다란 묘지가 있고 그 주변에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단다. 처음 들어보는 곳이지만 틈날 때마다 전국의 산하를 휘젓고 다니는 희용의 추천이니 실망하진 않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준경묘를 찾아간 것은 추석 연휴 다음날인 9월 16일이었다. 두타산의 무릉계곡과 관음암 산길을 둘러본 다음날이었다. 그때까지도 준경묘에 대한 사전 지식은 사실상 제로였다. 아는 것이라곤 두타산(1353m)의 끝자락인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산간 오지인데도 주차장은 아담하고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초입에서 만난 부근 지도 그림이 반가웠다. 한달 전 댓재에서 두타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는데 댓재 쪽 지형이 입체적으로 잘 그려져있기 때문이다.

초입의 지도. 준경묘, 댓재, 두타산 위치가 입체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시멘트길과 옛길로 나뉜다. 두 길 모두 가파르지만 어느길로 가나 준경묘까지는 1.8㎞ 거리다. 올라갈 때는 옛길로, 내려올 때는 시멘트길을 택했다. 그런데 “초입길이 그저 그렇다”는 희용의 말과 달리 길이 고즈넉해 마음이 차분해졌다. 급한 오르막이긴 하지만 걷기에 편하도록 나무 데크와 흙길을 잘 조성해놓아 크게 힘들지는 않다. 0.8㎞ 정도 올라가니 다시 시멘트길과 합류한다.

그곳에서 100~200m 정도 올라가면 고갯길 같은 곳에 벤치가 있는 쉼터가 나온다. 쉬어 갈수도 있고 요기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솔솔 바람을 맞으며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조촐한 만찬을 즐겼다. 추석 연휴 다음날이어서 오가는 사람 한 명 없다. 행복하다. 쉼터에서 준경묘 가는 길은 산 중턱을 깎아 평탄하고 넓게 조성했다. 덕분에 발걸음이 편안하다. 길 오른쪽 경사면에서는 곧고 시원하게 뻗어올라간 소나무들이 묘지까지 가는 길을 군데군데서 호위하고 있다. 명품 숲길이다.

초입에서 쉼터로 가는 옛길(왼쪽)과 쉼터에서 준경묘 가는 길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무덤

주변 수목을 감상하며 사실상 평지인 1㎞ 거리를 걸어가니 넓게 펼쳐진 준경묘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심산유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깊은 산속에 축구장 2개 정도가 들어섬직한 넓고 평탄한 땅이 있다는 게 놀라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현대식 장비도 없었을 조선조 말기, 깊은 산 중턱에 이렇게 넓은 부지를 조성하고 커다란 묘를 만들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부터 평지였는지 아니면 땅을 평평하게 고른 것인지가 궁금했다. 평소 관리를 잘 해놓아 평지의 풀도 고르고 주변의 소나무들도 맵시가 있었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의 부친인 이양무 장군의 묘다. 목조는 “해동(海東) 육용(六龍)이 날아샤 천복이시니…”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의 첫째 용이다. 훗날 태조 이성계에 의해 목조로 추존될 이안사는 이한을 시조로 한 전주이씨의 18세 손이다.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는데 20세 무렵 관기(官妓)와 얽힌 문제로 지방관과 다투어 위험에 처하자 아버지 이양무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때 이양무와 이안사를 따라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사람은 170여호(태조실록) 혹은 7000여명(전주군지)이었다.

그들은 태산과 준령을 넘어 오지 중의 오지인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에 정착했다. 이안사(목조)는 삼척에서 생활한 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을 당하자 삼척 일대를 헤매며 묏자리를 찾다가 한 도승이 길지라며 점지한 곳에 아버지 묘를 썼다. 어머니도 머지않아 작고하자 부근에 영경묘를 조성·안장했다. 그런데 전주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던 관리가 공교롭게도 강원도 안렴사(도지사)로 부임하는 바람에 또다시 삼척을 떠나 멀리 함경도 덕원(현재의 함흥)으로 이주했다.

함흥은 그때 몽골 땅이었다.(‘태조실록’ 총서). 1254년 이안사는 두만강 건너 지금 러시아 땅인 알동(斡東)으로 옮겨 원나라 지역 관리가 되었다. 그 손자 이춘(도조)은 몽골명이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고 그 아들 이자춘(환조)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이들은 몽골 지역 수장인 다루가치로 넓은 영역을 통치했다. 그러던 중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해 공민왕 휘하에서 몽골을 격퇴하고, 함경도 영흥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이성계다.

목조(이안사)의 덕릉과 부인 이씨의 안릉으로 쌍릉이다. 현재 함경남도 신흥군에 있다.

 

고종 때 이양무의 묘로 확정하고 대대적으로 정비해

이안사(목조)가 함경도로 이주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양무 장군의 묘 위치가 묘연해졌다. 조선의 문을 연 태조를 비롯 역대 왕들이 이양무 묘소를 찾기 위해 전국의 지관을 동원했으나 찾지 못했다. 세종 때에 현재의 묘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왕가의 이런저런 복잡한 때문에 조상 묘로 확정짓지 못했다. 어떤 시기에는 이양무의 묘가 삼척이 아니라 황지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던 중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이 끝나고 양반 사회가 안정되자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 제작과 시조묘 찾기 열풍이 불었다. 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대봉사(四代奉祀)’ 한계를 뛰어넘어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墓祭)를 통해 가문을 결속하려 한 것이다.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묘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시조(이한) 묘가 있는 전북 전주가 제왕의 땅으로, 강원도 삼척이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다. 삼척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1640년 인조 때는 풍기 사람 박지영이 “묘를 꿈에서 찾았다”며 몽서(夢書)를 올렸고, 이듬해 최명길은 “가끔 꿈이 들어맞기도 한다”며 조사를 요구했다. 인조는 사람을 보내 지형을 조사하고 땅을 파봤으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 어진

 

그러다가 17세기 중반 허목이 삼척부사 시절 지역 문물을 정리한 ‘척주지’(陟州志)에서 ‘미로리’의 현재 위치가 목조(이양무) 부모의 묘라고 주장하면서 삼척이 대세를 이뤘다. 18세기 초에는 이 분묘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했다. 그후 다시 세월이 흘러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1899년 나라의 정통성과 황제국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이곳의 묘를 선조의 묘로 확정했다. 이후 ‘준경(濬慶)’ ‘영경(永慶)’이란 묘호를 내려 국릉(國陵)으로 공식 추봉하고 대대적으로 수축(修築) 공사를 단행했다. 그것을 관리할 ‘준경묘영경묘영건청’도 설치했다.

이양무가 이곳에 묻힌 해를 1232년으로 추정하면, 1899년 묘비가 세워지기까지 667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660여 년 동안 확실치 않았던 묘를 뒤늦게 확정했다는 게 미심쩍긴 하지만 그래도 각종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뒤늦게나마 준경묘로 확정하니 반갑기만 하다.

물론 왕릉보다는 조촐하게 꾸며졌다. 공식 호칭인 묘(墓) 자체가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는 릉(陵), 그 아래 왕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무덤인 원(園)보다 위계가 낮다. 태조의 4~1대조는 목조·익조·도조·환조로 추존됐고 그 무덤도 릉으로 격상됐다.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덕릉·지릉·의릉·정릉이 그것이다. 부인들 무덤 역시 안릉·숙릉·순릉·화릉으로 높여졌다. 5대조 무덤이 릉이 되지 못한 것은 성리학을 국시로 표방한 조선이었던 만큼 왕이라도 4대 봉사를 규정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넓은 평지와 금강송 군락이 준경묘의 자랑

멀리 준경묘가 보이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평적으로는 넓은 평지, 수직적으로는 준경묘를 호위하듯 주위에 높게 뻗어있는 금강송 군락이다. 이 금강송 숲은 2005년 환경단체 ‘생명의 숲’이 선정한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숲’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곳의 적송(赤松)은 조선 말기 고종 때 경복궁 복원에 쓰이고 2008년 방화사건으로 전소되어 복원한 숭례문(남대문)의 들보로도 쓰였다. 지금도 지름 60㎝가 넘는 궁궐 재목 3000여 그루가 준경묘 근처 숲에서 자라고 있다고 한다.

준경묘와 금강송 군락 일부

 

이곳의 금강송이 특별한 것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뻗어올라간 큰 키다. 금강송으로 유명한 강원 평창의 대관령과 경북 울진 소광리의 금강송에 비해 수령이 짧긴 하지만, 두 지역의 소나무들 중 건장한 것들은 그동안 베어져나가고 남은 것들만 살아남은 반면 준경묘의 금강송은 손을 대지 않아 순수혈통 그대로 건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게 자랑이다. 너른 평지인데도 사방이 주변 산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다.

준경묘에서는 1년에 한 번 4월 20일 국가사적인 봉심행렬과 대제 어가행차를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봉심은 조선시대 국왕의 명을 받아 묘역의 상태를 보살피는 것으로, 옛날 강원도 관찰사가 행한 의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준경묘는 인근의 영경묘(이양무의 아내 묘)와 더불어 역사적 풍수지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사적(제524호)으로 지정되었다. 고종 때 준경·영경 양묘(兩墓) 수축 역사와 제향 의례절차가 기록된 ‘준경묘영경묘영건청의궤’는 2016년 국가 보물(제1901-9호)로 지정되었다. 묘 앞에는 재실(제사 준비를 하는 공간)과 비각이 있다. 비각에는 대한제국 출범 후 정비한 무덤답게 ‘대한 준경묘(大韓 濬慶墓)’라 크게 새겨 놓았다.

준경묘 앞쪽에 ‘준경묘 진응수’라는 이름의 샘물이 있다. 설명을 보니 ‘명당의 용세가 극히 왕성하여 혈(땅의 생기가 뭉친 곳)을 맺고도 남은 기운이 지상으로 분출하는 샘물’이라고 되어 있다. 진응수를 마시면 그 기를 받아 활력이 넘치고 자손이 번성하고 큰 부자나 높은 벼슬이 나오므로 영천(靈泉)이란다.

준경묘 진응수

 

‘정이품송과 혼례 소나무’ 스토리 재미있어

묘지 뒤쪽으로 올라가 묘지 구역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데 오름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묘지 뒤쪽의 숲속을 거쳐 묘지 뒤쪽으로 접근했는데 묘지 뒤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라도 만들어놓으면 좋을 듯 싶다. 묘지 뒤쪽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초가을에나 볼 수 있는 양털구름이 파란 하늘을 덮고 있다. 마음 속으로 “그래! 내게는 오늘이 가을의 시작이다”라고 되뇌었다.

준경묘 뒤로 올라가 내려다본 모습

 

준경묘에서 물러나오는데 문득 이곳에서 백패킹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산들에 갇힌 분지 형태여서 하늘이 좁게 보이니 이곳에서 밤하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면 장관일 것 같다. 산속 고요도 제대로 느낄 것 같다. 물도 있고 화장실도 있으니 부근에 별을 보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비현실적이지만.

준경묘 입구 오른쪽에 미인송 안내판이 있어 경사면을 따라 10~20m 정도 올라가니 철책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조금의 뒤틀림도 없이 늘씬한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곱게 뻗어 있다. 껍질도 건강하고 균일하게 갈라져 있다. ‘정이품송과 혼례 소나무’라고 적혀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산림청 임업연구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의 혈통보존을 위해 10여 년의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찾았는데 이 나무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안내문에는 나이 95살, 길이 32m, 둘레 2.1m로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과 혼례식 치른 미인송. 철책 보호대 안에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이 미인송은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있는 천연기념물 정이품송을 신랑으로 맞아 2001년 5월 8일 산림청장이 주례를 맡고 충북 보은군수가 신랑(삼산초등학교 6학년 학생) 혼주, 삼척시장이 신부(삼척초등학교 6학년 학생) 혼주로 참석한 세계최초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열어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이 행사를 계기로 삼척시와 보은군은 사돈관계의 인연을 맺었다.

이왕에 준경묘까지 왔으니 그곳에서 3.6㎞ 남짓 떨어져 있는 영경묘(永慶墓)까지 둘러보도록 하자. 이양무의 아내 묘인 영경묘는 산비탈 가파른 곳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준경묘에 비하면 소박하고 봉분도 크지 않지만 준경묘처럼 금강송에 둘러싸여 있다. 제각(祭閣)과 비각(碑閣)은 영경묘에서 100m쯤 떨어진 초입에 있다.

영경묘 (출처 강원도 삼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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