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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조선 땅 최초로 밟은 서양인’ 세스페데스 신부의 발자취를 찾아서… 창원의 세스페데스 공원과 웅천왜성(熊川倭城)

↑ 웅천왜성(熊川倭城) 일부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황금연휴를 맞이해서 서울역으로 갔다. 목적지는 경남 진해. 지금은 창원시로 통합됐지만 어쩐지 진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기차가 덜그렁덜그렁 한강철교를 지나더니 순식간에 서울을 버리고 초록의 산하에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계절도 고속 질주. 산과 들은 푸름을 알리고 있었다.

창원 중앙역에서 내려서 긴 기다림 끝에 택시를 탔다. 가는 곳이 어려웠을까. 택시 운전사의 나이가 많은 탓일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택시 운전사에게 너무나 어려운 이름이자 장소였기 때문이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서양인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다. 눈에 들어오는 안내 표지판을 보면서 창원시 관광해설사 최영임씨의 원격 조정을 받아서 가까스로 공원을 찾았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신도시의 큰 길 모퉁이에 있었다.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누르면서 작고 아담한 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 땅을 밟은 것은 크리스천 왜장 고니시의 초청 때문

세스페데스 신부는 1551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인도의 고아에서 서품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12월 27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초청으로 일본인 수사 한칸 레온(Hankan Leon)과 함께 지금의 진해인 웅천(熊川)에 첫발을 내디뎠다.

세스페데스 신부(오른쪽)와 한칸 레온. 세스페데스 공원 입구에 설치한 부조

 

당초 목표는 크리스마스에 맞추어서 올 예정이었으나 풍랑으로 인해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나이는 불혹을 넘긴 42세였고, 한칸 레온은 신부보다 12~13세가 더 많았다. 이로써 그는 한국판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래한 인물)로 불렸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제1군에 고니시를 비롯해서 규슈의 아리마(有馬)와 오무라(大村) 등 크리스천 다이묘(大名)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부터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 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 병사들에게도 세례를 주는 등 목회활동을 했다. 조선에도 필히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고 싶다는 열의를 가지고 몇 번이나 웅천왜성을 벗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세스페데스의 미사에 대한 내용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의 기록에도 확실하게 쓰여 있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에 머무른 기간만 34년

그의 방문에 대해 상반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가 조선을 침략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요청을 받고 온 종군 신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스페데스 신부 연구의 전문가 외국어대 박철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그의 저서 ‘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를 통해서 알아본다.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의 종군신부로 조선까지 따라온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포부를 갖고 순수하게 가톨릭 교리의 일환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방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몰래 이루어졌고, 일 년 만에 그의 행각이 발각되어 타의에 의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의 종군 신부로 조선에 온 것으로만 속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찾은 여러 자료에 의하면 박철 교수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방한 활동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고니시 유키나가 등 다이묘들의 요청에 따라 비밀리에 취해진 것이었으나, 가토 기요마사의 방해에 의해서 ‘조선을 넘어 명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큰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그후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60평생 중 일본에 머무른 기간만 34년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다녔다. 1611년 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나가사키에서 관구장 신부를 알현하고 고쿠라(小倉, 현 北九州)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유명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생을 마감한 1611년은 암운의 시기였다. 성당이 파괴되고 사제들은 추방됐다. 1614년에는 크리스천 금교령이 내려졌으며 교회도, 관계자들의 묘지도 모두 파괴됐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에 설치한 왜성(城)들

 

조선에 1년 6개월 머물렀으나 조선인을 상대로 포교활동은 못해

세스페데스 신부는 어디로 상륙했을까. 다시 박철 교수의 저서 ‘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를 통해서 알아본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은밀하게 남해안 고문가이(熊川·진해의 옛 이름)에 도착하여 천주교 다이묘의 영접을 받아 인도되었다. 특히 그가 고문가이 성(城)에 머물면서 일반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성채의 가장 높은 윗부분에서 지냈으며 주로 말을 이용해서 선교활동을 했음을 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최영임 해설사의 안내로 한적한 바닷가로 갔다. 도로 아래 해안에 큰 바위들이 세월을 머금고 잔잔한 물결들과 노닐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탕수바위라고 하죠. 이곳이 세스페데스 신부가 최초로 상륙한 지점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마을의 탕수바위. 세스페데스 신부가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세스페데스 신부의 최초 상륙지는 사도마을 바닷가로 나온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멜보다 60년 앞서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서양인 신부 아닌가.’

그는 비록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저기 산이 보이시지요? 저기가 웅천왜성입니다. 저 산의 높은 곳에서 신부께서 기거하셨답니다. 지금도 일 년에 한번 진해 덕산성당의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오셔서 세스페데스 신부와 그 때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미사를 올립니다.”

최영임 해설사가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나는 웅천왜성을 오르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탕수바위에서 바라본 웅천왜성

 

426년 전의 상흔 찾아 웅천왜성에 올라

웅천왜성은 숲이 우거져있었다. 그러나 가파른 경사 때문에 중턱에서부터 숨이 거칠어졌다. 그래도 역사의 흔적을 직접 더듬어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새순이 돋아남과 동시에 바로 녹음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자연의 섭리도 인간사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불고불 산길을 올랐다.

웅천왜성 입구

 

7부 능선 쯤 오르자 성의 잔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돌담이었으나 형태가 왜성임에 틀림없었다. 정상 부근에 이르자 3개의 관문이 나왔다. 문지기는 키 큰 나무들이 대신했다.

드디어 해발 184m의 산 정상에 올랐다. 천수각이 세워졌을 자리에는 깨어진 돌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사이사이 야생풀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에는 부산 신항만의 컨테이너들이 가득했고, 멀리 거가대교가 섬과 섬을 잇고 있었다. 흩어진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녹슨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웅천왜성 일부

 

<웅천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장기전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에 쌓은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의 지형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북쪽으로는 웅포만을 끼고 있어서 왜군이 수백 척의 함선을 정박시키기에 적당하였다. 또한 안골포, 가덕도, 거제도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의 연락도 편리하고 본국과의 거리도 가까웠으므로 군사 주둔지로 유리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사용하였다. 성의 구조는 일본식으로서 산꼭대기에 본성을 두고 아래 쪽으로 능선을 따라 제1외곽, 제2외곽을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육지 쪽의 방비를 위해 또 다른 성(羅城)을 두었다. 원래 성의 넓이는 약 15,000㎡ 정도였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약3-5m 정도였으나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산등성이와 산정상부분에 길이 약 700-800m, 높이 약 2m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안내문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기돼 있었다. 이 성의 형태는 ‘성의 달인’으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가 쌓았다는 설이 있으나, 조선의 방어용 성을 고니시가 점령하여 개축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경상남도는 웅천왜성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하고 있었다.

웅천왜성 표지석과 설명문

 

아무튼 웅천왜성에서의 뱃길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九州)의 요부코(呼子)에 다이묘들을 모이게 했고 쓰시마(對馬島)를 중간 기착지로해서 조선 땅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종교인이자 평화주의자

나는 웅천왜성의 중턱 세스페데스 신부가 기거했을 법한 곳에 앉아서 가지고 간 자료를 펼쳐 봤다. 그가 조선에서 쓴 최초의 편지이다.

<우리는 마침내 성요한 축일에 두 번째로 항구(쓰시마)를 떠나 하느님의 가호로 조선에 도착하였습니다. 고문가이(熊川)는 우리 일행이 상륙한 곳으로부터 10~12레구아(1 Legua: 약 5,572m) 떨어져 있었으므로 즉시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간단히 종합해보면 평화가 금방 이룩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제의를 시작했던 중국의 중요한 인물인 심유경(沈惟敬)이 중국이 당초에 허락하기를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해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웅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조만간에 완성되리라 여겨지는 놀랄 만큼 거대한 방어 작업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부하들이며 맹우들인 모든 귀족들과 군사들이 야영하고 있는 성에 높은 방어벽들과 망루들과 튼튼한 초소들을 세워 놓았습니다. 1레구아 주위에 여러 요새들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동생인 도노메도노 베드로(Tonomedono Pedro)가 있었으며 다른 한 곳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위 쓰시마 영주인 ‘다리오’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는 시고쿠 지방의 4왕국의 영주들이 머물고 있으며….>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을 출발해서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일기를 쓰듯이 자세하게 기록해서 자신의 조선 방문을 허락한 베드로 고메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쓴 첫 번째 편지다.

나는 나름대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종교인이자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상륙 지점과 웅천왜성의 거리를 10~12레구아(Legua)로 기록한 것은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로 남았다. 1레구아가 스페인의 단위로 약 5,572m이기 때문이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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