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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어데 가봤니껴 6-④] 도심권(시내권) : 월영교, 호반나들이길-원이엄마 테마길, 낙동물길공원, 안동댐, 임청각과 칠층전탑, 이상룡과 안동의 독립운동가들

↑ 월영교 (출처 안동시청)

 

by 김지지

 

안동 도심권(시내권)에서 둘러볼 만한 주요 명소는 월영교와 호반나들이길, 낙동물길공원과 안동댐, 임청각과 칠층전탑이다.

 

■월영교 일대

 

▲월영교

월영교는 안동댐의 역조정지에 2003년 부설한 목재 인도교다. 안동 시내에서 멀지 않다. ‘역조정지(逆調整地)’란 댐 아래에 조성한 유량 조정용 저수지인데 주로 물이 고여 있어 호수처럼 느껴진다. 월영교는 목재 다리로는 국내에서 가장 길다. 길이는 387m, 폭은 3.6m다. 다만 다리 위만 목교이고 아래 기둥은 목재가 아니어서 100% 나무다리는 아니다. 그래도 목교처럼 보이게 하고 다리 전체를 검은색으로 칠해 시각적으로 눈길을 끌게 한  안동시의 발상은 칭찬할 만하다. 무엇보다 조선 중기 원이엄마가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를 다리로 형상화한 것이야 말로 스토리텔링의 힘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월영교(月映橋)는 한자 그대로 ‘달빛이 비친다’는 뜻이다. 안동 지역에 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유난히 많은 데서 착안한 이름이다. 안동댐 수몰 지역 중 일부가 예로부터 달골(月谷)로 불리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엄달골과 연결된다. 강 건너 산 중턱에는 옛 선비가 시를 읊었던 월영대(月映臺)라고 적힌 바위글씨도 있다. 월영교는 조명이 달빛을 대신하지만 그래도 조명 덕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낮보다는 밤이 더 아름답다.

월영교 밤 모습

 

▲호반나들이길-원이엄마 테마길

월영교를 건너면 강변을 따라 왼쪽(상류)으로는 안동민속박물관과 안동민속촌으로 연결된 민속촌길이, 오른쪽(하류)으로는 원이엄마 테마길을 지나 호반나들이길로 이어진다. 두 길을 합친 거리는 2.7㎞ 정도인데 나무데크와 흙길이 나란히 붙어있어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 호반나들이길은 월영교~법흥교까지 역조정지(안동댐 보조호수)를 따라 걷는 2㎞ 거리의 길이다. 왕복하면 4㎞이므로 산책에 적당하다. 한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반대쪽으로는 호수가 어우러진 풍광을 즐기며 가볍게 걷기에 좋다. 산책길에는 8개의 전망대와 2개의 정자도 있어 쉼터와 포토존 역할을 해준다.

호반나들이길

 

월영교 외관이 ‘원이엄마’를 소재로 삼은 것이니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원이엄마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만든 길이 월영교 끝과 호반나들이길 사이에 짧게 조성한 원이엄마 테마길이다. 테마길 철망 벽에 작은 병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담은 ‘상사병’을 연상해서라는데 아제 개그를 보는 느낌이다. 원이엄마는 안동에 터를 잡고 있는 조선 중기 고성이씨 문중의 며느리다. 결혼 후 남편 이응태가 1586년 31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와 한글 편지를 관 속에 넣었다. 1998년 이 무덤에서 발견된 편지에는 부부가 함께 누워 속삭이던 일에서부터 배 속 아이를 생각하며 느끼는 서러운 감정, 꿈에서 만나 얘기 나누고 싶다는 애절한 간청까지 담겨 ‘한국판 사랑과 영혼’으로 불린다.

이후 원이엄마는 안동시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 되었다. 원이엄마의 상징물과 한글편지, 비석 등을 세운 원이엄마 테마공원도 안동시내에 조성했다. 다만 원이엄마 테마길이든 원이엄마 테마공원이든 실제 유물은 없고 조형물 위주여서 원이엄마 편지와 미투리를 실물로 감상하려면 안동대 박물관으로 가야한다.

원이엄마 테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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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와 월영대

원이엄마 테마길 옆에 야산으로 올라가는 좁고 긴 돌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석빙고, 월영대 바위, 선성현 객사가 나온다. 석빙고는 조선 영조 때 이곳 현감이 왕에게 낙동강 은어를 진상하기 위해 축조한 얼음창고다. 길이 12.5m, 너비 6.1m, 높이 5.4m다. 원래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있었으나 안동댐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석빙고를 지나 왼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조금 가면 월영대 바위와 선성현 객사가 보인다. 월영대 역시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원래 자리인 월곡면 사월리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그곳 야트막한 산자락의 소나무 숲에 금하재(錦下齋)란 정자가 있었는데 월계 권공이란 사람이 시를 읊조리던 곳이었다. 권공의 사후 그의 후손 권병한이 선조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 자연암벽을 다듬어 ‘달이 비치는 대(臺)’란 뜻의 월영대(月映臺) 석자를 새겼다. 선성현 객사는 1712년(숙종 38) 지어진 객사로 조선시대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선성현 객사 역시 1976년 도산면 서부리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달맞이하기에 더 없이 호젓하고 근사한 자리다.

월영대

 

☞ TIP : 월영교 부근 간고등어 음식점

안동은 어딜 가나 간고등어 음식점이다. 그중 어딜 가도 크게 실망할 일은 없다. 다만 월영교 부근이라면 주차장 바로 앞의 ‘안동 간고등어 직영식당’(054-859-2767)을 추천한다. 맛도 좋고 가격(1만원)도 적당하고 내부도 깔끔 쾌적해 가성비가 좋다.

 

■낙동물길공원과 안동댐

 

▲낙동물길공원

월영교 입구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2㎞ 정도 걸어가면 안동댐 아래 숨겨진 숲이 있다. 이름하여 낙동물길공원이다. 주차장도 잘 구비되어 있어 차로 이동할 수도 있다. 낙동물길공원은 요즘 많은 청춘들이 각종 SNS에 ‘인생 핫 플레이스’로 소개하고 있는 명소다. 안동댐 아래 왼편에 숨어 있다고 해서 ‘안동 비밀의 숲’,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사랑한 지베르니 정원을 닮았다고 해 ‘한국의 지베르니’로도 불린다.

공원 밖은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와 전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공원 안은 작은 연못과 분수, 폭포와 숲이 어우러진 숲속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연못에서는 2개의 분수가 하염없이 물을 뿜어 올리고, 떨어지는 물방울 가장자리에는 초록의 수련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분수는 안동댐에 저장되어 있는 물의 수위차에 의해 발생하는 낙차를 이용한 무동력 분수다. 분수 뒤 폭포 역시 안동댐의 배수구를 통과한 물을 자연 낙차로 떨어뜨리는 인공폭포다.

낙동물길공원

 

숲속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도는데 10분이면 충분해 자칫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입소문을 타고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안동댐 위로 연결된 500~600m의 호젓한 산책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간 쉼터에는 비스듬히 누워 월영교 방향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나무의자도 있다. 안동댐에 거의 올라간 지점에 전통 양식으로 만든 누각이 서 있다. 안동호와 낙동강, 월영교 일대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안동루다. 안동의 일몰과 야경 포인트로 꼽혀 일부러 찾아가는 이도 많다.

안동루 바로 옆으로 안동댐 윗길로 연결되는데 곧고 넓다. 안동댐 위를 걸으며 보이는 탁 트인 사방의 전망이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한다. 다만 안동댐 윗길은 낮에만 개방한다. 낙동물길공원 주차장은 안동댐 바로 아래 물을 가둬둔 보조댐 옆에 있다. 그곳에서 올려다보는 안동댐의 거대하고 조밀한 석축이 인상적이다. 주차장 옆은 잔디광장이다.

낙동물길공원 데크로드

 

▲안동댐

안동댐은 용수공급과 전력생산을 겸한 다목적 사력댐이다. 높이 83m, 길이 612m의 안동댐을 쌓는데 장장 5년이 걸린 끝에 1976년 10월 28일 준공했다. 사력댐은 돌과 자갈과 진흙을 섞어 쌓은 댐이다. 참고로 안동에는 안동댐과 임하댐 2개의 댐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안동시내에서 만나 하류로 흐른다. 안동댐은 낙동강 수계 최초의 댐이다. 발원지는 낙동강 발원지와 같은 강원 태백의 함백산 너덜샘이다. 임하댐 발원지는 경북 영양이다. 안동에서 낙동강과 만날 때까지 하천명은 반변천이다. 합류지점까지, 낙동강 발원지에서는 171㎞이고, 임하댐 발원지에서는 98㎞다.

우리가 댐이라고 하면 의례히 댐 위를 지나가지 못하는 금지 구역으로 알고 있는데 안동댐은 댐 위에 길을 내놓아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관광자원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 인근에 현대적으로 잘 지은 안동댐기념공원(안동문화관광단지)이 있다. 최근에 짓고 나무도 어려 황량해보이나 훗날 멋진 공원으로 탈바꿈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물포럼기념공원도 부근에 만들어 그곳에서 안동댐과 호수 내려다볼 수 있게 했다.

안동댐

 

■임청각 일대

 

▲임청각과 이상룡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민가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안동 시내의 임청각(보물 제182호)이다. 형조좌랑을 지내 고성이씨 이명이 1519년(중종 14년) 짓고 11대 종손 이종악이 1767년 개축했다. 궁궐을 제외하고 100칸 이상 짓지 못하게 했던 당시에 99칸으로 지어졌으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가 중앙선을 부설하면서 부속건물 중 일부를 철거해 현재는 60여칸만 남아있다. 임청각은 낙동강 상류의 물줄기와 경북 영양에서 발원한 반변천의 물줄기가 합해지는 지점에 세워졌다. 낙동강 물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배가 임청각 대문 앞에 닿을 정도로 강과 가까웠다.

임청각

 

임청각이 각별한 것은 독립운동가 이상룡(1858~1932)이 이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상룡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아들·동생들 가족은 물론 동지들을 이끌고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침략자를 몰아내는데 힘을 보태기 위함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 이상룡은 제사와 친척들의 생활을 위한 논밭 일부만 남겨두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했다. 노비 문서도 불태웠다. 또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곳 사당에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

이상룡은 만주에서 한인사회 건설과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주력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5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활동하고 만주에 산재한 한인 독립단체인 의정부, 신민부, 참의부 등의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 1932년 5월 12일 “국토를 찾기 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서거했다. 아들 준형은 부친의 유골을 안고 국내로 돌아왔으나 10여년간 일제의 고문 협박과 변절 요구를 받다가 1942년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할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 생을 마쳤다. 이상룡 집안은 3대에 걸쳐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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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독립운동가들

 

안동은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

안동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독립운동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 안동이기 때문이다. 2019년 기준,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한 인물이 1만 5000명을 넘어섰는데 이중에는 외국인도 있고 출신지를 모르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데도 대구경북 전체의 독립유공자 숫자가 2200명이 넘는다. 경북에서도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곳이 인구 16만명에 불과한 안동이다. 기초자치단체로는 가장 많은 369명이다.

이상룡의 집안처럼 안동은 문중이나 마을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한 경우가 유독 많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2㎞쯤 떨어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의 하계마을도 그런 마을 중 한 곳이다. 하계마을은 진성 이씨들이 450년 전통을 지켜온 집성촌인데 1895년 이만도·이중언이 의병으로 나섰다가 1910년 단식으로 순국하면서 젊은이들이 앞다퉈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이곳에서는 독립운동가를 25명이나 배출했다. 마을 단위로 따지면 전국에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다. 도산면 출신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17차례 옥살이를 하고 마흔의 나이에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동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는 권오설·오직 형제를 비롯해 권준희, 권오상, 권오윤, 권오창 등 여러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특히 권오설·오직 형제가 사회주의운동의 시초를 열었다고 해서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안동시 임하면 수곡리 전주 류씨의 동성마을인 무실마을에서도 독립운동가가 16명이 나오고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서도 20명 이상 나왔다. 내앞마을 출신 독립유공자 중에는 국내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인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문중 단위 망명길에 오른 김대락, 만주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 김형식 등이 있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육사, 이상룡, 김동삼, 김용환

 

파락호처럼 살던 김용환이 사실은 독립운동가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흥미로운 인물도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인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인 김용환(1887~1946)이다. 안동 금계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하라는 입신양명은 팽개치고 밤이면 투전판을 들락이며 노름에 빠져 살았다. 사실 그는 몇 차례 독립운동으로 구속된 적이 있기에 문중에서는 곧 정신차리겠지 했지만 노름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가 13대 종손이 되었을 때 문중 땅은 13만 평에 재산은 지금 시가로 230억원이었다. 이 문중 재산을 김용환이 야금야금 노름판에 털어 넣은 것이다. 심지어는 사당에 모셔뒀던 신줏단지까지 세 번이나 팔아치우고 시집간 고명딸의 시댁에서 장롱 사오라 보낸 장롱 살 돈도 판돈으로 없애버렸다. 이렇게 살았던 김용환이 해방이 되고 1946년 죽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1948년 김용환의 탈상 때였다. 한 동지가 김용환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제문(祭文)에서 소상히 밝힌 것이다. 그가 망나니 짓을 하며 쓴 돈이 사실은 노름에 쓴 것이 아니라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갔다는 동지의 제문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알고보니 김용환은 1919년 독립군자금 운송 중 체포되고 1922년 ‘독립후원의용단사건’으로 또 체포되어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히자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로 살며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것이다. 그가 죽고 또 세월이 흘러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이 파락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집안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는 18명이나 된다.

 

▲칠층전탑

임청각에서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국내 전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그래서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칠층전탑(벽돌을 쌓아 올린 탑)이 서 있다. 높이는 16.8m에 기단 폭은 7.75m다. 일대가 법흥동인 점으로 미루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참고로 온전한 모습의 석탑은 국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온전한 전탑은 전국에 5기뿐이다. 그 가운데 3기가 안동에 있으니 안동은 전탑의 고장이기도 하다. 안동역에서 서쪽으로 100m쯤 지점에 동부동 오층전탑(보물 제56호)도 서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탑인데 한국전쟁 때 일부 파괴됐던 것을 1962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곳은 법림사의 옛터라고 전하는데, 서쪽에 인접해 서 있는 당간지주가 이를 뒷받침한다. 남안동IC 인근 조탑리에도 조탑동 오층전탑(보물 제57호)이 있다.

칠층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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