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6·25 종전 후 남북한 거부하고 중립국 선택한 현동화의 죽음을 계기로 살펴본 중립국행 전쟁 포로들의 실태

↑ 인도를 선택한 포로들이 ‘아스토리아호’ 선상에서 기념촬영했다.

 

by 김지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현동화씨가 향년 89세로 최근 별세했다. 현동화씨는 6·25 종전 후 남북한을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 88명의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인도로 간 포로 대부분은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지로 이주하고 인도에는 3명만 남았는데 현동화씨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종전 후 중립국(인도)을 선택한 6․25 전쟁 포로들의 실태를 알아본다.

 

▲포로 송환 거부하고 중립국 선택한 포로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상 조인 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8월 5일부터 한 달간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 통계에 따르면 휴전 후 남한으로 돌아온 포로는 1만 2,783명(국군 7,870명, 유엔군 4,913명)이었고, 북한으로 송환된 포로는 7만 6,451명(북한군 7만 371명, 중공군 6,080명)이었다. 남북한 모두를 거부한 포로들도 있었는데 남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349명(국군 327명, 유엔군 22명), 북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2만 1,976명(북한군 7,712명, 중공군 1만 4,264명)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포로 숫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전쟁 중 북한 언론에 보도된 전쟁 발발 후 첫 9개월간 6만 5,000여 명, 1951년 6월 25일 북한군 총사령부가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한국군 등 유엔군 포로가 10만 8,257명이라고 노동신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힌 것과 비교하면 남한으로 돌아온 포로 1만 2,783명은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더구나 전쟁 개시 후 1년간의 통계였기 때문에 휴전까지는 포로가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공산 측이 전투 성과를 과장했을 수도 있다.

유엔군 측은 포로 협상 초기부터 6만 5,000명을 근거로 ‘사라진 5만 명’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반대로 공산군 측은 “5만여명을 이미 석방했다”면서 오히려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여 명이 제외된 것을 항의했다. 또한 공산 포로 중 다수의 송환 거부자가 발생한 것을 두고 유엔군 측에서 이들 포로를 강제로 억류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이 때문에 유엔군 측은 어쩔 수 없이 북한이 제시한 포로 명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포로송환 협정에 따라 중공군에 잡혔던 유엔군 병사가 1953년 8월 5일 판문점으로 돌아오는 모습

 

송환을 원치 않았던 포로들은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인도,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져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다. 남·북한과 중국 대표들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자국 송환을 위해 3개월 동안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후 포로수용소에 삼거리가 만들어졌는데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남한, 북한, 중립국(인도행)이 결정되었다. 포로들은 1954년 1월 20일, 3일간 자신의 행로를 선택했다. 1954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경향신문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공산권 포로는 중공군 1만 4,155명, 북한군 7,550명 등이었다.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은 그대로 한국에 남았지만 중공군 1만 4,000여 명은 자유중국(현 대만)을 선택했다. 자유중국 정부는 이들을 맞기 위해 연예인을 포함한 환영팀을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1월 21일 인천항에서 미 LST 수송선을 타고 자유중국으로 떠났다. 이후 자유중국에서는 이들을 주제로 ‘1만 4000명의 증인’이란 반공영화를 만들고 이들이 자유중국에 도착한 1월 23일을 자유일로 정해 기념했다.

중국군 포로 가운데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자유중국을 희망한 포로들을 태운 트럭이 인천항으로 가고 있다.(1954. 1. 20)

 

중립국 선택한 포로(88명) 대부분은 남미로 떠나고 일부만 인도에 남아

전체 포로 중 남북한을 선택하지 않고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당초에는 200여 명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88명만이 제3국행(인도행)을 선택했다. 88명 중 12명은 중국인, 76명은 한국인(북한군 74명, 남한군 2명) 포로였다. 이들은 인도군과 함께 판문점에서 열차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 부두에서는 반공청년단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인천항에서 2만 2,000톤 급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16일간의 항해 끝에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현재의 첸나이)에 내렸다. 이들은 인도 정부가 제공한 군 막사에 기거하면서 자신을 받아줄 나라를 기다렸다. 당초 그들이 원했던 목적지는 미국,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 등이었으나 받아주겠다는 나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참전국이라 불가능했고 스위스와 스웨덴은 수용을 거부했다.

반공 포로 문제를 다룬 인도 신문 ‘The Sunday Stateman’지. 사진은 인도에 도착했을 때 포로들. 선글라스를 쓴 인물이 현동화다.

 

다행히 멕시코에서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이 왔으나 6개월이나 시간을 끌다가 난색을 표명, 또다시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이 다 되도록 받아들이겠다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일부 포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자신을 남쪽에서 받아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남한 정부로부터도 반응이 없자 유엔에 청원했다. 그러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부터 전갈이 왔다.

포로들은 인도 잔류,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갈렸다. 55명이 브라질(1956.2 도착), 26명이 아르헨티나(1957.5)로 떠나고 나머지 3명은 인도에 눌러앉았다. 현동화도 인도에 눌러앉은 한국인 중 1명이었다. 그 전에 1명이 마음을 바꿔 북한으로 돌아갔고, 2명은 현지에서 죽었고, 1명은 병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갔다. 브라질로 간 포로 중 상당수는 기술을 익혀 자동차 정비공, 재봉공, 선반공장 직공 등으로 진출했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포로, 살인을 저질러 27년간 정신감호소에 갇힌 포로도 있었다. 아르헨티나로 간 포로들이 주로 터전을 잡은 곳도 공장지대였다.

 

▲최인훈 소설 ‘광장’

인도행 포로들의 이야기는 ‘새벽’지 1960년 10월호에 실린 최인훈의 중편소설 ‘광장’에 그려졌다. ‘광장’은 6․25 후 북한의 석방포로를 싣고 인도로 향하는 ‘타고르호’에 탄 이명준이라는 한 젊은이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방 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이명준은 해방 직후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방송 시간에 나왔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한 뒤 남한에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적 존엄성을 짓밟는 어두운 밀실만 있을 뿐 사회적 정의가 구현되는 푸른 광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떠밀리듯 아버지를 찾아 북으로 갔으나 인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그곳 역시 푸른 광장은 없고 잿빛 광장만 있었다.

소설 ‘광장’은 당초에는 중편소설로 발표되었으나 1961년 3월 원고지 200장가량이 추가된 단행본(정향사)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졌고, 이명준은 인민군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된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판문점 포로송환위원회에서 남북한 대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착지로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다. 그러나 배에서 명준은 자기가 참으로 오랫동안 ‘이데올로기’라는 잣대에 홀려 있었음을 깨닫고 크레파스보다 더 진한 남지나해 바다로 뛰어들어 투신자살한다.

6·25전쟁 후 반공소설류가 이데올로기 문학의 정형처럼 굳어 있던 시절에 발표된 ‘광장’은 문단으로부터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분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김현은 “정치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였지만 소설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광장’의 해였다”며 ‘광장’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현동화의 삶

현동화는 1932년 함북 청진에서 태어나 평양 사동군관학교에 다니다가 18살 때 6·25가 터져 북한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쟁에 투입되었다. 강원도 화천전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되자 요양 중 국군에 귀순했다. 이후 그는 북한군 패잔병들을 설득해 귀순시키는 임무을 부여받고 국군과 함께 함경도 원산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상처 부위 악화로 후송된 뒤 인민군 포로로 분류되었다. 그는 거제도의 장교용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가 부산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중립국 인도를 선택했다.

현동화

 

소설 ‘광장’에서는 주인공 이명준이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로 선상에서 투신하는 걸로 끝나지만 현동화는 실제로는 다른 이유 때문에 제3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현동화는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사상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귀순으로 인해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갈 수도 없고 혈혈단신 남한에 남는 것도 자신이 없어 공부나 더 하자는 생각으로 미국행이 가능한 제3국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현동화의 가족들은 이미 월남 해 한국에 살고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인도에서 알게된 것은 1964년이었다. 현동화는 1962년 인도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여권을 받고 ‘재외국민’으로 등록했다. 인도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양계장 사업을 시작하고 인모(人毛) 수출, 아프가니스탄 섬유공장 건설 등 여러 사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중동 붐이 일어났을 때는 한국 기업에 인도 노무자들을 송출했다.

1969년, 15년만에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과 눈물의 재회를 하고 중매결혼 후 아내와 함께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 그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인도 한인회장을 맡았고 88 서울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인도인 IOC 부회장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데 숨은 역할을 했다. 2018년 신병 치료를 위해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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