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밀리아노 사파타(왼쪽)와 판초 비야
멕시코 혁명은 라틴아메리카의 3대 혁명 중 하나
멕시코는 1521년 스페인의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 후 300년간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821년 독립했다. 그러나 독립 후 55년 동안 36명이 통치하고 75차례나 대통령이 교체될 정도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76년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집권하면서 그나마 안정을 찾았다. 디아스는 30여 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철도를 깔고 길을 내고 공장을 짓고 댐을 쌓는 등 국가 산업화에 기여했다. 정치적 안정 역시 역설적이게도 디아스 독재정치의 산물이었다.
문제는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경제성장이다 보니 내부가 곪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아시엔다’로 불리는 대농장의 소작인으로 전락해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고, 외국인은 멕시코 전체 면적의 20% 이상 토지를 소유했다. 그런데도 디아스는 근대 경제라는 외형에만 치중해 지방 호족, 대농장주, 가톨릭교회, 외국 자본을 일방적으로 비호했다. 디아스의 개발독재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잇따랐으나 디아스는 파업과 봉기를 무력으로 막는 데 급급했다. 반대 세력은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폭압 정치를 펼쳤다.
이런 가운데 1910년 7월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대지주 출신의 젊은 변호사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디아스의 대항마로 나섰다. 그는 자유선거를 요구하고 디아스의 재선을 저지하자는 내용의 소책자를 1908년 출간하는 것으로 첫 포문을 열었다. 그러자 디아스는 마데로를 감옥에 가두고 1910년 부정선거를 자행해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데로는 선거 후 보석으로 석방되자 미국에서 반디아스 운동을 펼쳤다. 그는 선거 무효와 임시 대통령 선거 등을 요구하며 1910년 10월 25일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1월 20일 오후 6시를 기해 전 국민이 디아스 정부에 대항하고 봉기하자는 촉구였다. 이에 호응해 크고 작은 세력이 전국 각지에서 무장 봉기함으로써 쿠바 혁명(1959), 니카라과 혁명(1979)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3대 혁명 중 하나로 평가받는 ‘멕시코 혁명’이 마침내 발화했다. 혁명 초기에는 기대했던 만큼 성공하진 못했으나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북부의 판초 비야가 혁명에 가담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사파타는 ‘멕시코의 전봉준’, 비야는 ‘멕시코의 임꺽정’
사파타는 백인과 인디언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로 태어나 10대 시절 아시엔다의 토지 침탈 과정을 지켜보며 멕시코의 현실에 눈을 떴다. 18살 때는 아시엔다에 항거하는 봉기에 참여했다가 수개월간 징집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가난이라는 구조적인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사파타를 따랐지만 그의 인간적인 매력과 카리스마에도 매료되었다. 사파타는 머리에는 전통 모자 솜브레로를 쓰고 허리에는 권총을 찬 모습으로 백마 위에서 농민군을 지휘했다. 우리로 치면 ‘멕시코의 전봉준’이었던 셈이다.
판초 비야는 아시엔다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 17살 때 누이동생을 강간한 농장 주인을 살해하고 멕시코 북부 산속으로 들어가 산악 지대를 떠돌며 광산주나 지주들의 재산을 빼앗는 ‘멕시코의 임꺽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혁명 발발 후 남부에서는 사파타가, 북부에서는 비야가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전세는 디아스의 정부군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911년 5월 결국 정부군은 항복하고 디아스는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마데로가 1911년 11월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혁명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데로와 사파타 사이에는 현실 처방을 둘러싸고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서구적 민주주의를 꿈꾼 마데로와, 공동체적 자치민주주의와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꿈꾼 사파타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마데로는 대농장주 출신이라는 계급적 한계에 갇혀 구악을 대표하는 행정 관료, 가톨릭교회 세력, 군부, 아시엔다 농장주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언론 자유를 신장시키고 의회 권한을 강화하고 결사의 자유와 정당의 결성을 허용했다. 반면 사파타에게 혁명은 원주민에게서 불법적으로 빼앗은 농토를 돌려주고 대농장 토지의 일부를 농민에게 불하하는 토지개혁이었다.
혁명 세력 내에서 파열음 터져 나와
결국 혁명 세력 내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해산할 것 같던 농민군의 반발로 상황이 다시 악화하자 구체제 세력이 다시 발호했다. 주축은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이었다. 그는 사소한 죄목을 들어 비야를 붙잡아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비야는 1912년 12월 탈옥에 성공,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사이 우에르타가 1913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를 살해하고 반혁명 정권을 세우면서 혁명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마데로를 지지했던 혁명 세력이 재결집해 전국적인 헌정 수호 투쟁을 전개하면서 멕시코는 다시 피로 얼룩졌다.
우에르타 타도를 외치며 혁명을 재점화한 중심 인물은 마데로와 같은 계급 출신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였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다시 잠입한 비야와 사파타도 우에르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의용군을 지휘하던 알바로 오브레곤까지 카란사를 지지하면서 우에르타는 1914년 7월 축출되었다. 카란사는 1914년 8월 멕시코시티에 입성, 공화국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카란사 역시 비야·사파타와는 혁명의 이상과 방법이 달랐다. 사파타와 비야는 여전히 자치적인 농민 공동체를 추구한 반면 카란사는 중앙집권적인 근대화를 추진했다. 격돌이 불가피했고, 혁명과 혁명의 충돌이 예견되었다. 격돌의 두 축은 오브레곤과 비야의 군사력이었다. 오브레곤은 비야를 만나 협상을 시도했지만 비야의 변덕과 폭력성에 실망해 카란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카란사와 오브레곤이 힘을 합치자 비야도 1914년 12월 4일 사파타를 생애 처음 만나 손을 잡았다. 비야와 사파타는 12월 6일 멕시코시티에 공동 입성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그러나 둘은 수도를 장악하고도 여전히 이상을 추구했다. 권좌도 거부했다. 비야는 자신을 혁명 지도자가 아닌 조력자로 여겼으며 사파타는 토지 재분배만 이뤄진다면 고향에서 공동체 사회를 이뤄 평화롭게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사파타는 자신의 고향 모렐로스에서 중앙정부의 간섭이나 도움 없이 1년 동안 주민 자치를 성사시켰다. 자치 공동체에서는 토지 분배, 교육기관 설립, 농업 생산 확대, 자치적인 사법제도 시행 등이 이뤄졌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라틴아메리카의 그 어떤 정부도 성취하지 못한 획기적인 일이었다.
사파타는 결국 ‘비운의 영웅’ ‘좌절한 혁명가’로 전락
더 큰 문제는 사파타가 지방에서의 유토피아 실현에만 집착할 뿐 현실적인 정치 권력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지역적인 한계, 전국적 차원의 비전 부재는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결국 사파타는 군사적 역량에 비해 정치적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까닭에 ‘비운의 영웅’ ‘좌절한 혁명가’로 전락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 북부의 비야 부대는 1915년 4월 셀라야 전투에서 오브레곤 군대에 참패했다. 비야 부대는 이후에도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미국·멕시코의 국경 지대까지 쫓겨났다. 오브레곤이 지휘하는 혁명군은 8월 5일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미국이 카란사 정권을 승인하자 이에 격분한 비야 부대가 1916년 1월 멕시코 북부를 여행 중이던 미국인 열차 승객 16명을 살해했다. 비야 부대는 국경 너머 미국 뉴멕시코주의 콜럼버스시에 주둔한 미국의 기병대도 공격했다. 미국은 존 퍼싱 장군을 멕시코로 보내 비야를 추격했다. 퍼싱이 지휘하는 1만여 명의 기병대가 10개월 동안 비야를 추격했으나 비야는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추격대를 따돌렸다. 이 과정에서 비야는 멕시코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카란사는 1917년 5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 혁명 세력이 제정한 신헌법을 공표했다. 헌법에는 농지의 유상몰수와 유상분배, 지하자원의 국가 소유, 외국인과 교회의 토지 소유 금지, 8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실시, 노동조합 구성 및 노동쟁의 보장 등의 개혁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신헌법은 농민혁명군의 몰락과 미국·유럽의 압력으로 10년도 더 지난 1930년대에야 제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던 중 사파타(1919.4)와 카란사(1920.5)가 연이어 살해되면서 실권은 오브레곤에게 넘어갔다.
오브레곤은 1920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오랜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국가 경제와 정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제한적이지만 1917년 신헌법의 내용을 실천에 옮겼다. 오브레곤은 마데로나 카란사와 같이 대농장주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을 우선시했으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따른 부작용을 고려해 점진적으로 접근했다.
멕시코 혁명이 험난한 역정을 거쳐 1차 목적지에 다다른 것은 1938년
오브레곤의 또 하나 업적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벽화 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벽화 운동은 문맹의 민중에게 멕시코 혁명의 성과와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디에고 리베라, 호세 오로스코, 다비드 시케이로스 등이 벽화 운동을 선도했다. 이렇게 정국이 안정되자 산속에 숨어 지내던 비야가 1920년 7월 최후까지 남아 있던 자신의 부대를 해산함으로써 10여 년간의 무장투쟁을 끝내고 은퇴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1923년 7월 20일 괴한에게 살해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오브레곤은 4년 후 혁명 동지인 플루타르코 카예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카예스는 1924년 12월 대통령에 취임, 토지개혁을 대규모로 실시했다. 그의 집권 기간에 약 300만㏊의 토지가 1,200만 명의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1917년 신헌법에 담겨 있던 반교회 조항도 실천했다. 당시 가톨릭교회 세력은 멕시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수많은 교구와 신학교, 대학, 수도원을 거느리면서 정부에 필적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카예스는 종교 재산의 국가 귀속 등 헌법에 명시된 내용을 강력히 추진했다. 교회 세력은 반발했으나 카예스의 강력한 대응으로 점차 잠잠해졌다. 오브레곤은 또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 192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당선 축하연에서 가톨릭 신자에게 피살되었다.
오브레곤이 암살되자 카예스는 꼭두각시 대통령을 내세워 수년간 멕시코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다가 1934년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카르데나스는 유효 표의 98.1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자 1917년 신헌법에서 합법화한 개혁들을 제도화했다. 군부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 하층계급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으며, 전국에 산재한 노동자 조직은 단일 조직으로 통합했다. 대규모의 농지개혁을 단행했고 농민의 조직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1938년에는 외국계 정유사들이 독점해온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은 험난한 역정을 거쳐 1차 목적지에 다다랐다.